찰스 스펄전은 사복음서 89장의 내용 중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신 구절은 단 한 곳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 데인 오틀런드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죄인과 고난받는 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알려준 스펄전의 이 발견에 관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신” 단 한 구절, “하나님의 아들께서 휘장을 걷어내고 자신의 본성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단 한 구절이라 말하고(23-4pp) 그 의미를 깊이 파고들었다(개혁된실천사, 2022). 오틀런드는 먼저 성경이 “마음”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순히 이런저런 감정의 복합체 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혼잡하게 섞여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체” 자체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마음은 “동기의 지휘소”, “존재의 중추”, “우리를 규정하고, 인도”하는 주체, “생명의 근원”(잠 4:23),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이”끄는 곳이다(24-25pp). 온유함과 겸손함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

물론 예수님도 분노하신 적이 있다(의로운 분노였지만). 때론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하셨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지만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의 가장 깊은 동기는 온유함과 겸손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이렇게 평가할 때가 있다: ‘그 친구는 참 착해’, ‘그 사람은 정말 항상 따뜻한 사람이야.’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든 이렇게 그분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분은 참 온유하고 겸손하셔.’

그런데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는 것의 특별한 의미를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자. 어쩌면 이 말씀은 당신에게 너무 익숙해서 별로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시지. 그러니까 하늘의 부귀영화를 잠시 버리시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종처럼 섬기며 사신 거잖아. 병든 사람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만져주시고 고쳐주시고, 결국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잖아.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하셔. 그런데 여기서 뭔가 더 특별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건가?’

이 책의 부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죄인과 고난받는 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마음.” 우리는 평온할 때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묵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러나 죄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심하게 넘어졌을 때, 고난 중에 하나님의 본심을 오해하고 그 친밀한 관계 밖으로 밀려나려고 할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죄로 넘어진 나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며 ‘내가 너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는데, 너는 고작 그 정도 죄도 이기지 못하느냐?’라고 호통치실 것만 같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어디 계시나요?’라고 부르짖을 때, 예수님은 ‘내 손과 발에 무슨 자국이 남아있는지 좀 봐라. 어떻게 너는 항상 의심하고 염려하느냐?’라고 혀를 차실 것만 같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예수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아니, 믿지 못한다. 더 불행한 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 가운데 자백으로 빨리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고난 중에 더 신속하게 우리의 방패와 도움 되시는 주님께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마음을 오해하는 문제는 이처럼 심각하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 마음이란?

데인 오틀런드는 “온유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신약성경에 단 세 차례 나온다고 밝힌다. 각각 ‘온유함’, ‘겸손함’, ‘온순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오틀런드는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이해심이 가장 많은 분”이라고 설명했다(26p). 예민하고 까다롭고 쉽게 화를 내고 손가락으로 항상 지적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팔을 활짝 펼”쳐 우리를 맞이하는 분으로 묘사한다(26p). 오틀런드는 “온유”와 짝을 이루는 “겸손”의 의미를 신선하게 찾아내는데, 바로 “상황의 빈궁함과 열악함”(26p)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겸손”의 본래 의미에 가깝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점을 가지고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신성과 영광과 거룩함을 옷입고 계셨으면서도 세상의 가장 빈궁하고 열악한 자들까지 차별하지 않고 만나주셨다. 조건도 없고, 장벽도 없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누구든지 내게 오면… ‘너의 죄의 짐을 다 벗어버리면 그때 만나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라고 하셨다. 그 짐을 가진 채로 주님께 나오면 주님이 쉼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오틀런드는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자상하고, 개방적이며, 너그럽고, 포용적이며, 이해심이 많고, 친절하시다”라고 소개한다(27-8pp).

만일 주님께서 정말 이런 분이시라면, 왜 죄인들에게 분노하시고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누차 경고하시는 것일까? 주님이 마음을 뒤집으신 것일까? 본래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이었는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분노하고 저주하는 마음으로 바뀌신 걸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마음 깊은 동기는 여전히 온유와 겸손으로 가득 차 있다. 만일 그분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않으셨다면 죄인들은 회개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들에게 지겹도록 회개할 것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단숨에 그들을 처단하시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계속 경고하시면서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 또한 그분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분은 죄인이 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악인이 심판받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겔 18:23; 33:11).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그분의 본심이시다(딤전 2:4).

주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은 주님을 찾고 주님께 나온 자들에게 특별히 더 주어진다. 데인 오틀런드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언제나 “온유”라고 말한다. 온유가 그분의 “본질이자 마음”이기 때문이다(28p).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죄나 약점이나 불안이나 의심이나 근심이나 실패가 있더라도…온유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감싸주신다”라고 말한다(28p).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언제나 이런 마음이시다. 어쩌다가 한 번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멍에가 쉽다고?

주님은 당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후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여기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러면 그렇지’라고 썩은 미소를 짓는다. 양팔 벌려 우리를 맞이하시고 이제 쉬라고 하셨으면서 결국 “멍에”를 지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실제로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 속에 그리스도인도 많은 고난을 겪는다. 죄와의 싸움은 예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더욱더 힘들다. 과거엔 죄라는 것도 몰랐고, 알았어도 마음껏 저지르는 것이 나름 짜릿했는데, 이제 더 많은 생각과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죄를 짓고 나면 훨씬 더 무거운 죄책감이 짓누른다. 그냥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 해도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겪는 고난과 시험이 가중됐다. 그래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지라고 하신 멍에가 그렇게까지 쉽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데인 오틀런드는 그래서 ‘쉽다’는 말은 사실 ‘친절하다’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설명한다(엡 4:32). 예수님의 멍에는 인생의 짐 위에 추가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생의 짐을 지고 살 때, 주께서 언제나 “친절”하게 자기 백성을 맞이하시고 도와주신다는 약속이다. 오틀런드는 “그분은 우리가 어려울 때 단지 도움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신다. 그분은 언제나 싫어하는 내색 없이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주신다. 이것이 그분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항상 이런 마음으로 행동하신다”라고 설명했다(30p). 그러므로 개인의 노력으로 인생의 짐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수고하는 자들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밖에서 누르는 무거운 짐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유일하고도 참된 희망이 되신다. 그분께 나오는 자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하시는 주님은, 친절하게 그들의 짐을 대신 지시고, 그들 대신 수고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함께 하는 자들의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 과거엔 그리스도 없이 살았다면 이제는 온 우주에서 가장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분과 함께 산다.

지금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 그분은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진정으로 은혜를 바랐던 이들을 불쌍히 여겨 만져주며, 치유와 포용과 용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35p). 혹자는 계속 그분의 온유와 겸손에만 집중하면 균형 있게 주님을 바라보는 데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고 묻겠지만, 저자는 1) 예수님의 속성이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2) 예수님의 속성은 단순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논의하는 것에 문제가 없고 3) 성경이 증언하는 것에 충성하는 것뿐 일부러 치우친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구약의 율법을 예로 든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는 것이 거룩함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부정한 땅에 오셨고, 부정한 백성을 만지셨다. 심지어 율법이 부정하다고 규정한 병자들과 죄인을 만나주셨다. 그분의 심연에 깊은 연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분의 마음이 그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고 설명했다(41p). 심지어 “동정심이 육신을 입고 세상을 돌아다닌다면 어떤 모습일까?”라고 물으며 “궁금해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사셨다고 확신했다(42p). 지금도 예수님은 그 마음이 변치 않으셨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히 13:8).

그리스도의 영(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보이신 행동이 온통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으로 점철되어 있으셨다면, 지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역사하실 때, 우리가 경험하는 그분의 마음은 틀림없이 넘치는 긍휼과 자비와 온유와 겸손일 것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마라. 주님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분의 마음을 오해하지 말고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당신이 아무리 심각한 또는 반복되는 죄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분을 볼 낯이 없다고 여겨지더라도, 이런저런 상황과 환경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원망하고 있더라도, 그분만큼 당신을 친절하게 맞이해줄 분이 어디 있는가? 그분만큼 당신을 두 팔 벌려 맞이하고 자상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그 짐을 대신 지시고 그 수고를 대신해 주실 분이 어디 있는가? 그분만큼 당신의 죄를 깨끗이 용서하시고 새로운 힘과 정결한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실 분이 어디 있는가? 그분만큼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를 영원무궁하게 하실 분이 어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