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시 43:2)

하나님은 편재하시다. 계시지 않으신 곳이 없다는 말이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고, 스올에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 계신다(시 139:8-10). 하지만, 우리는 어디든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편재를 찬양한 다윗은 또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시 27:9). 하나님께서 마치 어딘가에 숨어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마치 화가 난 것처럼 거리를 두고 계신 것처럼 여겨질 때, 혹시나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는 않으실까 염려가 생길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느낀다.

내 쪽에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갈급하며 찾고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얼굴을 나에게 보이지 않으시고 만나주지 않으시고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시는 것 같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잊어버리거나 불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 “살아 계시는 하나님”(42:2),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하나님(42:8), “반석이신 하나님”(42:9),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43:2), ‘빛과 진리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43:3), “큰 기쁨의 하나님”(43:4)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 둔 그의 믿음,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다만 그는 낙심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42:6),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42:5, 11; 43:5).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것은 정말 너무나 많다. 환경이 그렇게 만든다. 상황이 그렇게 몰고 간다. 원수 같은 사람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도 우리 마음이 요동치도록 뒤흔들고(42:3, 10), 우리의 최대 원수 마귀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해를 끼치기 위해 애쓴다. 신앙의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는 것을 누구보다 원하는 것이 바로 마귀다. 눈앞에 산적한 문제로 인하여, 혹은 어렵고 힘든 갈등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관한 두려움과 염려 등으로 우리는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낙심한다. 하나님보다 다른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더 크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상태에서 육체가 원하는 감정을 오랫동안 품고 정욕에 따른 행위를 일삼게 되고 그럴수록 더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린다. 하나님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고,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지 않는다면, 뼈가 쇠하기까지 종일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할 뿐이다(시 32:3).

하나님과 단절된 것처럼 느껴질 때, 많은 사람이 그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몰라 방황한다. 시편 기자가 자기 영혼에게 반복하여 명령한 지침을 통하여 어떻게 단절된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하루 세 번 지친 몸을 깨우고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영양제가 있다면, 이 말씀은 하루 세 번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영혼을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영양제가 될 것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11; 43:5).

1. 내 영혼아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많은 사람이 낙심하거나 불안해할 때,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경건의 시간이나 성경 묵상, 신앙 서적 읽기, 아침저녁으로 하는 기도 등을 완전히 손에서 놓는다는 말이 아니다. 무미건조한 마음으로 의무적으로 이행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자 하는 의지가 턱없이 부족하다. 해야 하니까, 누군가가 시키니까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점점 손에서 놓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기도하지 않은 지 몇십일, 성경을 진지하게 읽거나 묵상하지 않은 지 몇 달…이런 식으로 점점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된다. 그런데 낙심과 불안에 빠진 사람은 마치 늪에 빠진 사람과 같다. 하나님을 단단히 붙들 은혜의 방편을 멀리할수록 점점 더 늪에 깊이 빠져들어 간다. 시편 기자는 분명 낙심하고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했다(42:1). 하나님을 갈망했다(42:2). 자기 영혼에게 계속해서 이르기를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주지시켰다. 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건지실 수 있는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신실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아라. 계속해서 갈망하고 갈급해 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아라.

2. 내 영혼아 하나님을 신뢰하라

시편 기자는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했다. “여전히”라는 말은 흥미롭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한다. 시편 기자는 낙심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과거를 회상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42:4),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42:6-8). 우리는 낙심하기 쉽고 불안할 때도 많지만, 항상 그래왔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에는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가득했던 때도 분명 있었다. 당시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보였지만, 지나고 나면 그때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셨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낙심한 영혼은 지금 상황에 압도되고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매몰되기 쉽다. 그래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건지셨는지. 보호하시고 돌보셨는지. 그런 기억은 현재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자기 영혼을 가르친다: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홀로 방황하고 고생하고 있다고 여길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고, 우리에게 도움이 간절히 필요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우셨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라면 우리는 현재 우리가 겪는 일 가운데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을 두고 소망을 둘 수 있다. 영적인 기억상실증에 빠진 우리가 거기서 치유받기 위해서 반드시 바라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십자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원수로 행할 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 우리 영혼의 가장 간절한 필요를 아들의 거룩하고 고귀한 희생으로 채워주셨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금 우리가 겪는 상황에서 돕지 않을 거리고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내버려두실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가? 당신의 영혼을 일깨워라. 그분의 풍성한 구원의 은혜,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가 흐르는 십자가를 기억하라!

 3.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낙심에 빠진 자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다만 그 낙심 거리에서 해방되는 것일 때가 많다.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 사라지면 그걸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본다. 그러나 참된 해방은 이 칼럼이 이야기하는 주제인 ‘하나님과 단절된 것처럼 느껴질 때’에서 회복된 상태, 그러니까 하나님과 친밀하고 기쁨이 넘치는 관계를 누리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정상/건강한 상태로 회복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자리 곧 예배자의 자리를 되찾게 된다. 세상과 마귀, 자기 욕심을 채우며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분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았던 자리가 죄인의 자리였다면, 의인의 자리,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백성의 자리는 예배자의 자리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기뻐하는 자리이다.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성도가 공예배 시간에 어떻게 찬양하고 어떻게 말씀을 듣는지 보라. 앵무새처럼 입을 움직이지만 영과 진리로 찬양하지는 않는다. 눈은 설교자를 보고 노트에 설교를 받아적거나 뭔가 정리를 하려고 하지만 사실 말씀이 그 영혼에 생명력을 불어넣지는 못한다. 불안한 마음이 말씀을 다 튕겨 낸다. 하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혼은 다시 회복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3:4).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며 갈급해 한다. 손에는 수금을 들고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그 임재하신 하나님을 큰 기쁨으로 높여드리기 원한다. 왜 예배자의 자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회복된 성도의 자리가 되는가? 하나님의 속성과 행사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과 사람과 환경보다 더 크고 영광스럽게 보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혼이 감사와 기쁨으로 (환경이 어떠한지 아무런 상관없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사자 굴 속에서 하나님을 본 다니엘처럼, 돌로 치는 자리에서 하늘 보좌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스데반처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그래서 그분을 큰 기쁨으로 예배한다.


낙심과 불안에 빠져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근심과 염려가 사라지고 수고와 고통도 없는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여 그분의 얼굴을 대하여 볼 때까지는 계속해서 숨바꼭질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숨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겪는 무수히 많은 일들 앞에 우리 눈이 가리워져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될 때가 생긴다.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는 성도의 위로와 격려, 권면이 필요하고 그로 인해 큰 도움을 얻기도 하지만, 먼저 우리 영혼에게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할 사항이 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너는 하나님께 믿음을 두라. 너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쉬지 않고 얘기해야 하는 이유는, 낙심과 불안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기 영혼에게 수많은 말들(그것도 영양가 없고 해로운 말들)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그 많은 소리를 잠잠하게 만들자.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말들로 우리 영혼을 가르치자. 그렇게 하나님만을 간절히 바라고,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능력과 우리를 향한 끝없는 사랑을 변함없이 가지고 계신 살아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만을 믿고,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만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찬양하자. 그분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계신다. 이제 마음의 눈을 열어 모든 장애물 밖으로 나와 가까이 계신 그분을 보고 그 손을 만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