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이 처음 나왔을 때,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신비롭고 복잡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으로 연결되는지 단순하면서도 재미있게 설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오묘하고 복잡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그려낸 것에 큰 점수를 주고 싶었다. 물론, 사람의 감정을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두 번째 영화에서 추가된 불안, 부럽, 따분, 당황, 추억이 추가되어도 여전히 한계가 있다. 그런데도 영화가 묘사하는 것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이 사람을 조종하는 주체가 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사실 감정은 인격체가 아니라서 스스로 무언가 사고하고 느끼고 의지를 가지고 조종할 수는 없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조종간 앞에서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지 결정하는 것처럼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감정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억누르거나 뒤흔들 때가 있다는 걸 안다. ‘그렇게 할 수밖에/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게 되는 때처럼.

영화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통제하는가?”이다. 특별히 2편에서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아’가 등장하는데, 가장 깊은 곳에 심어진 여러 가지 신념이 하나의 강력한 힘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사람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으로 묘사된다. 사춘기 아이가 되기 전까지는 주로 감정에 영향을 받아 본능적으로 살았던 사람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부터 가장 강력한 동력인 자아에 따라서, 다른 말로 자신과 타인 그리고 모든 것에 관한 굳은 신념을 기반으로 살아간다. 한 마디로 믿음이 감정을 통제한다. 영화는 “I am good”(“나는 선하다”)라는 굉장히 긍정적인 자아상을 시작으로, “I am not enough”(“나는 부족해”)라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아상까지 복잡한 사람의 신념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엔(스포일러!) 개인이 갖고 있는 모든 신념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일 때, 참된 안정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나는 선할 수도 있지만, 부족하기도 하다. 긍정과 부정이 모두 존재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진정한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다. 남들과 비교하거나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갈급해 하면서 그렇게 타인이 정의하고 요구하는 불안하고 건강하지 못한 자아를 버려라.

1. 누가 나를 통제하는가?

영화는 조종간의 총책임을 맡은 캐릭터가(주인공 라일리에겐 기쁨이가) 그날 일어난 특별한 일과 그에 관한 감정을 깊은 심상에 심는 것으로 자아가 하나하나 생성되는 것처럼 묘사한다. 기쁨이가 선별하고 심은 자아는 대부분 긍정적이다. 일부러 그런 것들만 골라 심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반에 등장하는 불안이는 전에 심긴 모든 긍정적인 자아를 파괴하고 온통 불안한 자아를 심는다. 밝게 빛났던 자아의 나무가 붉게 변해버린다. 영화가 묘사하는 방식대로라면 우리는 경험하는 모든 일에 관한 우리의 감정이 만들어낸 신념, 바로 그 믿음 체계가 빚어낸 자아상을 갖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앞서 제기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다시 던져보자: “그래서 누가 통제하는가?” 만일 우리의 감정이 자아를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유물론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자신과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그러진 자아상으로 자신과 남을 파괴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을 각자가 타고난 감정의 문제로 봐야 할까? 만일 그렇다면, 개인이 저지른 악한 일에 대한 죄책을 그에게서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심신미약, 호르몬 과다, 정신적인 문제 등만이 악의 문제를 설명하는 유일한 대답이 될 것이다.

책임은 조종간에 앉아있는 캐릭터에게 있는 게 아니라 주인공 라일리에게 있다. 감정이 사람을 통제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감정을 통제한다(그래서 영화 속에서 드물지만, 라일리가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거부하는 장면이 나올 때, 이 점을 완전히 망각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이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야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은 감정을 통제하고 생각을 변화시켜 어떤 자아상을 만들어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한다. 영화 속에서는 각각의 캐릭터가 인격체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지만, 실제로 인격체는 나 자신뿐이다. 내 속에 있는 말 못 하는 감정이 마치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 감정을 수용하고 해석하고 처리하는 것은 모두 다 나다. 주변에 있는 사람과 벌어진 일들을 통해(혹은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한 것을 통해) 신념을 쌓는 것도 내가 한다. 옳고 그름,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 기준과 믿음 체계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아는 자신이 만들어간다. 내면에서(INSIDE) 벌어지는 어떤 현상이 밖으로 나오는 것(OUT)이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속사람을 빚어 그것을 밖으로 내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명령한다(신 6:5).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지 모두 우리 책임이기 때문이다.

 2. 나는 나를 통제하는가?

그런데 나는 나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앞서 감정이 우리를 통제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어떤 면에서 영화가 묘사하는 것처럼 우리는 감정의 통제를 받을 때가 많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깊이 사고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당황하거나 분노하거나 우울해한다. 때로는 그런 감정의 골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다(가령 우울감에 빠져 오랜 시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크게 휘둘린다. 그들의 말이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오랜 세월 반복된 타인의 악행 때문에 어그러진 자아상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무조건 남 탓만 할 것도 아니다. 나도 완벽하지 않다. 항상 옳은 것을 생각할 수도 없고, 바른 것을 택하지도 않는다. 과잉되거나 억압된 감정을 갖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실패할 때가 적지 않다. 무엇이 진실에 근거한 믿음인지 거짓에 뿌리내린 믿음인지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할 때도 많다. 때로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즐겨하기도 하고, 거짓된 신념이라는 걸 알지만 계속 붙들고 있을 때도 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나 죽으면 모두 소멸하고 사라져 버릴 것이란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그렇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바르게 통제할 수 없는 상태라고 분명히 밝힌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것이 진짜 문제다. 감정이 아니라 내가 나를 통제한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에 휘둘린다. 남들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이 나를 통제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불안정하다. 자아를 만드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를 항상 건강하고 올바르게 만들어낼 자신도 능력도 없다. 영화 속 주인공 라일리는 이런 연약하고 부족한 상태의 치명적인 결과를 삶에서 많이 경험하지 않았지만, 더 오래 인생을 경험할수록 라일리도 우리처럼 알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나를 통제할 수 없을 때가 많고, 내가 통제하는 나의 삶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3. 주가 나를 통제하신다

인사이드 아웃2는 해피엔딩일까? 영화는 결국 라일리 자신이 인생의 조종관을 차지하는 것으로 모든 감정과 자아의 대통합을 이루어낸다. 이제서야 진짜 삶의 주인을 만났다고, 자아의 주체를 찾았다고 기쁨으로 선포한다. 하지만, 진짜 해피엔딩은 도덕적으로 어그러지고 성품적으로 불완전한 자를 통제하는 최고 책임 자리에 두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거룩하고 완전한 성품을 지니신 분을 그 자리에 모시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아 진리와 거짓을 완벽하게 판단하시는 분,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손으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제하시는 분, 언제나 선하고 경건하고 옳고 바른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분, 그분이 우리 삶을 다스리게 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명령하고(롬 12:2),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요구한다(고후 10:5).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다른 말로, 자신이 삶의 주권자가 되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셨다(고후 5:15). 그리스도께서 주권자가 되시는 삶, 은혜의 십자가 복음이 가져온 변화된 삶을 가리켜 바울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라고 했다(갈 2:20). 이것이 진짜 인사이드 아웃이다. 내 안에(inside)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내 삶을 주관하실 때 밖으로 드러나는(out)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통제하면 겪게 될 고생스러운 이생의 삶과 고통스러운 영원한 삶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삶을 다스리실 왕을 보내주셨다. 그분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모두 지키신다. 우리가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통제하게 하신다. 수많은 거짓된 신념에 속지 않고 오직 영원히 진실한 신념을 붙들게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조종간에 모셔라. 그분이 다스리도록 삶을 온전히 내어 맡기라. 그렇게 삶의 진짜 주인을 만날 때, 우리는 참된 자아실현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를 만드신 분, 그분을 거역한 우리를 되찾아 새롭게 하시는 분, 그분만이 우리를 통제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