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에 꽂혀 모든 영화나 드라마를 분별없이 볼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어서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고 밝힌다(고전 6:12). 또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이든지 자기 유익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까지 고려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고전 10:23). 존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은 삶의 원리를 제시하여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보고 보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세상보다 나은 기독교>, 생명의말씀사, 2010, 24-31pp): 1) 이 행동은 영적인 유익을 가져올 수 있는가?(고전 10:23), 2) 이 행동은 우리를 죄의 노예가 되게 하는가?(고전 6:12), 3) 이 행동은 내 몸과 마음을 타락시키지 않는가?(고전 6:19-20), 4) 이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가 아니면 시험에 빠뜨리는가?(고전 8:8-9), 5) 이 행동은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마 28:18-20), 6) 이 행동은 내 양심에 위배되는가?(고전 8-10장), 7) 이 행동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인가?(고전 10:31)
여러 측면에서 <파묘>는 분명 성경이 지지하는 사상보다는 반대하는 사상을 많이 담고 있고, 그래서 비판 없이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리뷰하는 이유는 천만 즉 대한민국 5천만 인구(2022년 기준) 중 1/5이 본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봤다면(그중엔 크리스천도 제법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반성경적인 부분을 알 필요가 분명히 있고, 잘못된 생각과 그에 따른 두려움에서 벗어나 올바른 생각을 품고 그에 따른 건강한 경외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먼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명백한 오류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모든 사람은 죽기를 무서워한다
성경은 사람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한다고 말한다(히 2:15).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단지 죽는 것의 고통을 겁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무지함이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공포를 대면하기 싫어한다. “파묘”의 뜻은 “옮기거나 고쳐 묻기 위하여 무덤을 파냄”이다. 단순히 무덤을 파내는 행위 자체는 종종 이루어진다. 가령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선산에 있는 무덤에 묻었는데, 모시고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가까운 납골당에 안치하면서 멀리 계신 할아버지도 옮겨 와서 같이 기억하기 원하는 경우 그렇게 한다. 하지만 영화 <파묘>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상을 다룬다. 단순히 이장하는 행위가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만들어낸 공포심이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 가령 무덤, 무덤 주변에 동물들, 무덤을 옮기는 행위 등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이다.
죽음은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라서 혹시나 과거에 죽은 자의 영혼이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까지 만들어낸다. 파묘의 등장인물도 모두 죽은 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 풍수사로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구분하는 지관,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고 속이며 소통하는 무당, 장례를 적법하고 합당하게 주관하는 장의사(염을 하는 교회 장로라니…) 등 이들 모두 어떻게 죽은 자를 묻고 또 고쳐 묻을지 신중하게 고민한다. 왜냐하면 어디에 어떻게 어떤 절차에 따라 묻느냐가 후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가령 건강이 나빠지거나 심지어 의문사를 당하기까지 한다). 사람은 그렇게 죽기를 무서워하고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에 공포심을 느낀다. 그 공포심을 떨쳐내기 위해 사람들은 온갖 미신적인 도구를 만들어낸다(동물의 피를 사용하거나 굿을 하는 등).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곧바로 이 땅을 떠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1).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하여 죽고 나면 바로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으로 옮겨지거나 음부로 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눅 16장). 십자가 옆에 함께 달린 강도에게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눅 23:43). 무덤에 묻힌 몸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부활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예수님은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무덤에 묻히지 못한 몸도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계 20:13). 그러므로 진정한 파묘는 단 한 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진다. 이 땅에서 영원한 세상으로 하나님이 우리 몸을 옮기실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은 한 번도 죽은 자의 영혼을 가리킨 적이 없다. 귀신은 언제나 타락한 천사 곧 마귀의 수하로 하나님과 그분께 속한 백성을 대적하고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여(엡 2:2) 그들로 죄의 노예로 살다가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하는 대상을 가리킨다(눅 11:18; 계 20:10). 물론 거짓의 아비 마귀와 그 수하들인 귀신이 연약한 사람을 공포에 젖게 하고 평생 노예로 부리기 위해 망상을 보게 하거나 거짓으로 미혹할 수는 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이 한이 맺혀 구천을 떠돌며 내세로 가지 못하고 있다거나 묻힌 곳이 잘못되어 후손에게 못된 일을 저지르는 일 따위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고(벧전 4:5), 그 심판을 맡기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신다고 선포한다(롬 14:9). 주님은 죽은 자를 곧바로 낙원 또는 음부로 불러내실 것이고, 그들의 몸 또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언젠가 천국 또는 불못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다.
2. 모든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죽은 자를 함부로 만지거나 숭배하거나 기념하지 말라고 엄히 말씀하셨다. 죽은 짐승이나 사람을 만지는 것은 부정한 일이고(레 11:39; 민 6:7), 죽은 자 때문에 문신을 하거나 무늬를 놓는 것 또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이었다(레 19:28). 접신, 무당 등 죽은 자의 영혼과 소통하려는 모든 종류의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시고 그런 일을 행한 자를 백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셨다(레 20:27). 신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 교회에게도 주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처럼 귀신을 섬기거나(고전 10:20), 귀신의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딤전 4: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주변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미신적인 사상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들로부터 거룩하게 구별되기를 원하셨다. 산 자나 죽은 자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오직 산 자의 몸을 죽일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까지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만 두려워할 것을 요구하셨다(마 10:28).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풍조를 만들어내는 원수 마귀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그 자리에 항상 대체하려고 한다.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 내세로 떠나는 과정에 불과하고, 앞서 말한 성경의 가르침대로 죽은 영은 이생에 사는 자들에게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도 죽음에 넘겨진 자도 두려워할 대상이 못 된다.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여 귀신을 섬기기도 한다. 사람과 차원이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지혜나 힘에 있어서 그들을 어르고 달래서 해를 면하고 덕을 입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진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군대 귀신처럼 많은 귀신 떼나 아주 독하여 귀신 들린 사람을 거의 죽음까지 이르게 한 귀신 등 모든 종류의 귀신이 그분 말씀에 즉각 순종하고 조금도 대항하지 못했다. 그분은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고, 앞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산 자와 죽은 자를 온전히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바로 그분이 몸은 죽여도 영은 어찌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몸과 영을 모두 벌할 수 있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
과학과 기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된 오늘날, 더 이상 미신 따위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시대, 그래도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의 공포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 <파묘>는 인기를 끈다. 우리는 이 공포심을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모두에게 죽음은 찾아온다. 죽음 그 너머엔 도깨비불이 아니라 진짜 불타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고, 정령 따위의 귀신이 아니라 진짜 타락한 천사인 귀신들이 존재한다. 갑자기 쓰러지거나 피를 토하거나 줄초상을 치르는 등의 해괴망측하고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보다 훨씬 더 괴롭고 슬프고 공포스러운 운명이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운명은 그 어떤 부적이나 미신적인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고통과 공포가 언제나 뒤따를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 두려움을 그냥 회피한다. 미루고 또 미루다가 피할 수 없는 날이 이르면 덜덜 떨며 직면한다.
나는 당신에게 지금 그 죽음의 공포를 직면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들을 놓아주기 위해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지니고 죽음에 넘겨졌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자에게 누구든지 사망의 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함과 부활의 소망을 선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라고 권하고 싶다. 모든 사람은 죽어서 무덤에 묻힌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은 자들은 <파묘>가 그려내는 공포의 수만 배 되는 세상으로 옮겨져 벗어날 수 없는 저주 아래 살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그분의 은혜로운 손길에 이끌려 죽음의 공포를 면하고 새로운 생명, 그 아름답고 영원하고 풍성한 삶을 그분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당신은 어떤 <파묘>를 맞이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