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새벽, 예수님은 배 안이 아니라 배 밖, 물속이 아니라 물 위에 서 계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었다. 그래서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간청했고, 주님은 “오라!”라고 허락하셨다(마 14:28-29). 그리고 그렇게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나아갔다. 물 위에서 내딛는 한 발짝마다 주님이 그 걸음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진리가 말없이 그러나 큰 소리로 선포됐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혹은 자기 지혜나 비법으로 물 위를 걸어가는 게 아니었다. 베드로가 아니라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래서 바람과 파도가 그 발밑에 굴복하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분명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시선이 옮겨졌다. 예수님이 아니라 바람을 본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 담대함을 얻었던 그가 바람을 보고 곧 무서움에 휩싸였다. 예수님께 자기 몸을 의탁하여 물 위를 걸어갔던 그가 바람을 보고 그만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베드로는 수영을 곧잘 하는 어부 출신이다. 그런데도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를 지른 것을 보면, 바람과 파도가 그가 이겨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때 주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베드로는 무엇을 의심했을까? 무엇에 관하여 작은 믿음을 가진 것일까?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셨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때 바람이 그쳤다(마 14:32).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을 단련하기 위하여 시험을 마치시고 바람을 멈추신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그렇게 종종 제자들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두셨다. 남자만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라고 하시면서 뻔히 그들 수중에 충분한 돈이 없는 걸 아시고도 ‘한 번 해보라’라고 하신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 의탁하도록 병든 제자가 정말 부활이 필요한 때까지, 다시 말해 죽을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신다.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시면서 돈이나 배낭이나 여분의 옷이나 신발, 지팡이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의 필요를 주님께 의탁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의탁하는 법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 의탁하는 완벽한 본을 보이셨다. 그분은 이 땅에 그 어떤 곳에도 머리를 맡기지 않으시고, 사람에게 의탁하지도 않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요청하신 그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자기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하셨다.
의탁(依託)은 “어떤 것에 몸이나 마음을 의지하여 맡김”이라는 뜻이다(표준국어대사전).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의탁은 바로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의지하고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 삶을 맡긴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예수님께 우리 몸과 마음을 의탁한다. 하지만 베드로처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상황과 문제를 직면하면, 우리의 시선은 주님에게서 옮겨진다. 그리고 곧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한다. 불신의 늪에 빠져들어 간다. 우리는 무엇을 의심하는 걸까? 무엇에 관하여 작은 믿음을 보인 것일까? 아니, 우리는 누구를 의심하는 걸까? 누구에 관하여 작은 믿음을 갖는 것일까? 바로 하나님이다. 때로는 작은 시험 앞에서도 우리는 쉽게 넘어진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지경에 있는지, 얼마나 무서워하고 놀라며 당황해하는지 전혀 모르고 계신다고 착각한다. 또는 하나님도 이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을 만한 힘과 지혜가 없으시거나 혹은 그렇게 하실 수 있더라도 알 수 없는 변심으로 모른 척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한다. 그분의 능력(전능하심)과 동기(선하심) 모두 의심의 대상이 된다.
CCM 가수 오벧의 김은주는 욥의 고백을 담은 노래 “주시는 이도 거두시는 이도”에서 이렇게 의탁하는 자의 마음을 노래했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주님이시니
오직 모든 것은
주의 뜻대로 될 것임입니다주께서 이 모든 것보다
선하시고 옳으시오니
오직 모든 것은
주 말씀대로 될 것임입니다나는 언제나 십자가를 붙들리
나를 위해 죽으신 사랑
그 기이한 사랑 앞에
오늘도 내 맘을 둡니다
욥이 겪은 모든 상황은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만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셔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행하신다’라는 가르침은 우리가 겪는 고통스러운 일을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이해가 안 되고, 감당이 안 되고, 받아들이기 힘들고, 아프고 괴롭고 울분이 터지고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어쨌든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분이 선하시고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해 보라. 그분에게 당신의 몸과 마음을 기쁨으로 의탁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가사의 후렴이 참 좋다. 십자가, 나를 위해 죽으신, 그 기이한 사랑! 우리는 그분께 우리를 의탁한다.
십자가는 힘들 때 마냥 붙들고 버티는 의미 없는 막대기가 아니다. 십자가에서 확증된 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언제나 붙드는 이유가 된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사랑. 그 사랑은 참으로 놀랍다. 우리는 지금 착한 사람을 위하여 용감히 죽은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반역과 모욕의 죄 가운데 있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죽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께서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위하여 죽은 사랑 이야기이다. 그 사랑이 얼마나 기이한가? 하늘 보좌에 닿기까지 높고, 땅속 깊은 스올에 이르기까지 깊다. 온 하늘을 두르고 온 땅을 뒤덮을 만큼 넓고, 창세 전부터 시작하여 영원까지 이를 만큼 길다. 그 사랑은 천사도 살펴보기를 원하고, 영원히 그 사랑을 받은 자들에게 칭송과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다.
이 사랑이 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오늘도 우리 마음을 의탁할 수 있다. 우리 안에 믿음으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서 우리가 점점 더 하나님께 우리 몸과 마음을 의탁할 수 있도록 능력과 지혜를 제공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시선을 계속해서 주님께 고정하는 것이고, 계속해서 주님께 둔 우리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육신의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 문제가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능력과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님을 계속해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오벧의 김은주는 “내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곡을 통하여 우리가 만나는 모든 상황, 특별히 주님께 의탁해야 하는 그때, 우리 믿음의 눈(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엡 1:18-23):
내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그 부르심의 소망
우리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 그 풍성한 유산
우리가 알게 되길 원합니다내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우리의 소망 되신 하나님의 아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예수
우리가 보게 되길 원합니다우리 맘의 눈을 밝히소서
우리를 부르시는 아버지의 기쁨
다함이 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온전히 알게 되길 원합니다내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태초부터 우리를 택하여 부르신
그 사랑으로 거룩하고 온전하게
우리를 이끄시길 원합니다내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그 부르심의 소망 우리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 그 풍성한 유산
우리가 알게 되길 원합니다
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계속해서 그분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두시기를 간구한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아버지 하나님을 의탁하며 사셨던, 그 믿음과 사랑의 아름다운 본을 닮고 싶다. 주님이 우리에게 즐겨 허락하시는 시험을 만날 때, 내 힘과 지혜를 아무리 짜내도 헤쳐나올 수 없고,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상황 혹은 욥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보기 원하시는 믿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사랑을 보여드리고 싶다. “주님이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나요?” “바람과 파도도 주님이 다스리고 계시는데 겁날 것이 뭐가 있나요?” “사람의 생명과 죽음이 주님 손에 달려 있고, 죽어도 주님이 부활이 되시니 사망의 쏘는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이 이미 십자가에서 확증되었는데, 주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나요?” “주님의 크신 능력이 이미 부활로 증명됐는데, 그 크신 능력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지 않으실까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날이 갈수록 더욱더 주님께 의탁하는 자가 되고 싶다. 그렇게 의탁하는 삶이야 말로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