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로 섬기면서 들었던 말 중에 처음엔 일리가 있다고 수긍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견해인가 의문을 가진 말이 있다. 바로 “교회는 뒷문만 잘 막아도 부흥한다”라는 말이다. 앞문으로 들어오는 성도들이 적더라도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성도를 잘 막으면 교회는 (적어도 수적으로는) 부흥한다는 조언을 적지 않게 들었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참으로 다양하다. 직장을 멀리 옮기면서 삶의 터전 자체를 바꾸는 경우도 있고, 결혼하여 배우자의 교회로 옮기기도 한다. 교회가 성경적으로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실천하지 않아서 바른 교훈을 가진 교회를 찾아 떠나야 할 때도 있다. 이렇게 합당한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제외하고 단순히 교회가 싫어서, 마음에 썩 들지 않아서,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공적인 사역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를 최소한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교회 뒷문을 잘 막는 일이다.

처음엔 수긍이 가는 말로 들렸다. 더해진 성도가 교회를 사랑하도록 만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면 잘 설득하거나 수정하여 마음에 들게 하고, 상처받으면 싸매주고 화해시켜 주고, 공적인 사역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늘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단지 유입된 몇 성도를 위한 일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의 이유로 ‘교회 뒷문 지키기’는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성경이 권하는 목회 원칙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1. 목사는 관리자, 성도는 회원이 아니라 모두 함께 일하는 동역자다

‘교회 뒷문 지키기’는 교회를 철저히 관리자-회원 모델로 바라보게 한다. 목사는 새로 가입한 회원을 어떻게 관리하여 조직에 남아있게 할 것인지 고민한다. 회원에게 불만 사항이 생기면 이를 들어주고 해소하려고 애쓴다. ‘사랑이 없어서 떠납니다’, ‘비슷한 연령대나 관심사를 가진 성도가 없어서 떠나요’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목사는 가입한 회원의 필요를 파악하고 채워줄 필요가 있다.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 성도는 새로 등록한 단체가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평가한다. 회원 관리가 소홀하거나 서비스가 좋지 못하면 언제든 다른 곳으로 쉽게 옮길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다. 일반적인 사회 조직이나 모임의 운영 방식이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런 관리자-회원 모델이 성경이 묘사하는 교회의 모습일까?

성경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를 통해 서로를 섬길 때, 유익을 나타내신다고 말한다(고전 12:4-7). 여기서 성도는(목사를 포함해서) 한 몸을 이루는 여러 지체로 비유되는데, 몸의 지체 중 쓸데없는 것이 없듯이 교회의 지체 중 누구도 쓸데없지 않으며, 오히려 “덜 귀히 여기는” 지체, “아름답지 못한 지체”,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귀함과 아름다움과 쓸모 있음을 보인다(고전 12:22-24). 교회는 관리자인 목사와 돌봄을 받는 나머지 모든 회원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고전 12:25). 그러므로 관리자-회원 모델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 모델로서 어울리지 않는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섬기거나, 소수가 다수를 끌고 가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몸의 모든 지체가 일해야 건강하게 기능하는 몸인 것처럼, 건강하고 좋은 교회는 모든 성도가 함께 일하는 교회다.

2. 성도는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시고, 복음으로 하나 되게 하신다

뒷문으로 성도가 나가는 대표적인 이유는 ‘부적응’이다. 새로 입교한 성도가 ‘적응’하도록 돕는 일, 즉 교회 공동체를 소개하고 여러 가지 사역을 안내하며 교제권 안으로 들어와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며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목사는 새로운 아이를 입양한 부모처럼 더해진 성도가 다른 가족 구성원 속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특별히 더 돌아보고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무엇이 혹은 누가 교회를 하나로 묶는가? 성경은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성도가(오래된 성도나 지금 막 성도로 더해졌거나) 같은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한다(엡 4:1). 그들은 같은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한 세례로 증거한다(엡 4:5). 그들을 부르신 주님도 한 분이시다(엡 4:5). 그 하나님 안에서 같은 소망, 같은 믿음을 공유한다(엡 4:4, 5).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 되게 하신”다(엡 4:3). 결국, 성도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고, 그들이 하나 되는 이유이자 동력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어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같은 복음의 은혜이다.

안타깝게도 뒷문으로 떠나는 성도가 적응에 실패한 대다수의 이유, 다른 말로 친밀한 하나 됨을 경험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문제는 복음과 거리가 멀다. ‘또래가 별로 없다’, ‘편하게 마음을 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 ‘가족 구성원이 유사한 형태인 가정이 적다’, ‘자녀 양육 방식이 비슷한 부모를 찾기 힘들다’ 등 사회적인 이유가 대부분이다. ‘교회 안에 절친한 사이가 한두 명 있어야 교회 생활이 즐겁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같은 요인이 친밀감을 증대하는 데 유리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옵션에 불과하다(있으면 감사하지만, 없어도 만족할 수 있는). 교회는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시고, 복음으로 하나 되게 하신다. 우리는 같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성도에게 교제의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동질감을 잣대로 교제할 성도를 평가하고, 통과된 사람에게만 자신을 열어 적응하려고 하다가는 결국 뒷문으로 점점 밀려날 뿐이다.

3. 우리가 관리해야 할 문은 교회 뒷문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 문이다

나는 부적응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 교제권이 없어서 오래 외로워 봤고, 마음 터놓을 곳이 없는 슬픔을 겪어보았다. 그래서 그것이 단지 부적응자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나는 두 가지 도움의 손길을 통해 부적응자에서 적응자가 되었다. 뒷문으로 나가지 않고 중심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되었다. 도움의 손길은 외부와 내부에서 각각 주어졌다. 먼저, 외부에서 나를 붙들어 주고 위로하고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몇몇 성도가 있었다. 그리고 내 짐을 지는 것을 누군가가 도와주는 것을 넘어서, 내가 누군가의 짐을 들어주려고 했을 때, 나는 마침내 친밀한 공동체를 얻었다.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 도움을 주는 사람, 누가 내 마음을 위로해 주나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그런 외로움을 겪는 사람을 찾아가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어느새 나는 친밀한 사귐과 사랑과 섬김이 오가는 관계의 중심에 있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2, 5)

우리는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고민하는 성도가 어떤 짐을 지고 있는지, 왜 힘겨워하고 버거워하는지 헤아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짐을 대신 져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은 본문이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내용처럼 단순한 짐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으로 마음에 생긴 죄의 짐일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짐은 필립 라이큰이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설명한 것처럼 “슬픔, 걱정, 의심, 실패, 가난, 외로움, 질병, 이혼, 장애, 우울증 등 많은 어려움”의 짐이 될수도 있다(REC, 248p).

각자가 자기 짐을 지는 삶은 이를 꽉 깨물고 버티며 억지로 짐을 지고 사는 모습과 거리가 멀다. 우리에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가 계신다(시 68:1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분을 우리가 따르고 있지 않은가? 그분께 맡기는 삶, 그래서 쉽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지고 기쁨으로 주를 따르는 삶을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게 주님 안에서 짐을 벗고 쉼을 누리는 자만이 다른 사람의 짐에 관심을 두고 또 도움의 손을 내밀 수 있다. 그렇게 각자 자기 짐을 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성도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도움을 줄 수 있다.

한편, 주님께 삶의 짐을 완전히 맡기지 못하고 혼자 떠안고 있는 사람은 도움이 절실하다. 성도는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가 주님께 그 짐을 맡길 수 있도록, 그래서 쉼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짐을 서로 지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방식이다. 같은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서로 같은 주를 바라보게 하고, 같은 믿음을 굳게 세워주고, 같은 소망을 품도록 권면하고, 같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은혜를 맛보게 하는 것, 같은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함께 성장하는 비결이다. 뒷문은 목사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지키는 셈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결론

‘교회는 뒷문만 잘 지키면 부흥한다’는 말은 완벽한 문장이 아니다. 누가 지켜야 하는지 책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 뒷문은 하나님이 지키신다. 그러니 지나친 죄책감과 과도한 책임감을 갖지 말자.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우리가 힘써 지키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니 복음의 은혜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용납하고 서로의 짐을 지면서 자신을 지키고 서로를 지키자. 그러면 우리는 같은 주님 안에서 같은 부르심의 목적을 위해 함께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