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1일은 종교개혁 기념일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날(1517년 10월 31일)로부터 506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교회는 자신의 전통과 견해보다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워야 할 강력한 필요를 느낀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세에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혔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예전에 ‘말씀 전파’가 포함되지 않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문제는 교회가 선포하는 그 말씀이 정말 ‘오직 성경’의 권위와 내용에 근거한 말씀이냐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살아가는 때를 미리 보기라도 한 것처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라고 경고했다(딤후 4:3-4). 그러므로 좋은 설교는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설교 즉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과 방식으로 전달되는 설교가 아니다. 오래 참는 사랑으로 가르치는 “바른 교훈”이 좋은 설교다. 하나님 말씀은 단순히 감상하는 연설이나 참고할 만한 조언이 아니다. 듣는 이의 삶을 책망하고(회개하도록), 경계하고(주의하도록), 권하는(바른 교훈을 따르도록) 권위가 담겨 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할 때, 교회는(로마 가톨릭)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의 권위를 앞세웠다(교황에게 성경 해석권이 있었다). 교회의 전통과 규율이 성경의 바른 교훈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사제는 때로 자기 견해를 하나님 말씀처럼 권위 있게 내세웠고, 성경의 가르침은 오히려 필요에 따라 축소되거나 왜곡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성경’을 주창하며, 교회가 찬탈한 말씀의 권위를 다시 돌려놓으려 한 것이다. 우리는 루터가 작성한 두 권의 책,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을 통해 ‘오직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1. ‘오직 성경’은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권위 앞에 두려워 떨게 한다

문65: ‘설교를 경청하고 말씀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하나님의 말씀과 선포되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모든 것 이상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실천한다는 뜻입니다(소교리문답, 복있는사람, 2018, 117p).

우리는 모든 것을 평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음식, 상품, 장소, 음악, 영화 등에 평점을 주거나 짧은 댓글로 평가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말씀과 설교도 쉽게 판단 대상이 된다: ‘본문이 지루하다’, ‘설교가 길다’, ‘짧다’, ‘어렵다’, ‘장황하다’, ‘너무 뻔하다’, ‘울림이 없다’, ‘소리가 작다’ 등. 물론, 설교는 여러 가지 합당한 기준에 따라 더 좋은 설교를 위해 평가하고 개선하기 위해 힘써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청자가 갖춰야 하는 태도가 있다. 바로 ‘경외’다. 루터는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말씀을 대할 때도 우리는 루터가 말한 ‘경외’의 태도를 갖춰야 한다. 루터는 이 태도에 관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실천”하는 것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당신은 아침이나 저녁, 성경을 펼치고 그날 읽을 본문을 대하기 전, ‘경외’를 갖추려 애쓰는가? 이제부터 읽게 될 말씀이 당신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는가? 설교를 듣기 전 당신의 자세는 어떠한가? 선포되는 설교가 아무개의 말이 아니라 (본문에 충실한 설교일 때)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는가?

루터는 하나님 말씀의 힘을 믿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고 듣고 읽고 깊이 숙고하며 실천할 때, 그분의 말씀은 각 사람의 인격과 시간과 행위들을 거룩하게 만듭니다”(대교리문답, 복있는사람, 2017, 93-4pp). 당신이 만일 ‘오직 성경’이 요구하는 바른 태도를 갖춘다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당신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요 17:17). 루트는 이를 “가슴 깊이 새기며 기쁘게 귀담아듣는” 태도라고 말했다(소교리문답, 118p). 말씀을 눈과 머리로만 대하지 말고 가슴 깊이 새겨질 때까지 묵상하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잔소리처럼 귀찮아하거나 반항심을 품지 말고 기쁘게 청종하라.

2. ‘오직 성경’은 말씀과 설교를 우습게 여기지 않게 한다

문70: 우리는 어떤 식으로 말씀을 우습게 여깁니까?
교회에서 설교 시간만 되면 졸기 일쑤이고 설교를 귓등으로 듣는 것, 그 반대로 설교의 감독관이 되어 삐딱하게 들으며 따지기 좋아하는 것, 집에 가서는 말씀 한 구절 쳐다보지 않고 기도하지도 않는 것, 하나님의 말씀은 주일에 한 번 눈으로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말씀은 듣기만 하고 스스로 공부하지도 고민하지도 않는 것과 같은 태도와 행동입니다(소교리문답, 121p)

루터의 ‘소교리문답’의 목표는 ‘가장이 가족에게 쉽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소교리문답, 18p). 그러니까 위의 내용은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이자 자녀가 부모의 본을 통해 배워야 할 사항인 셈이다. 루터는 대교리문답에서 설교를 듣는 악하고 재앙 같은 태도를 가리켜 ‘게으름’과 ‘타성’의 죄라고 불렀다(대교리문답, 97p). 마귀는 설교를 듣는 그 순간에도 마음 속에 불신과 악한 생각들을 심어 말씀에서 점차 멀어지게 만들지만,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듣고 실천하면, 말씀의 능력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기쁨, 새로운 경건을 일깨워주며 순전한 마음과 생각을 창조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게으르거나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힘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대교리문답, 98p). 그렇다. 성경을 펼쳐 읽으려는 순간, 설교자가 올라가 말씀을 전파하는 순간, 영적 전쟁이 시작된다. 그때 우리 지체를 불의 또는 의의 병기로 드릴 것인지 선택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루터가 위의 문항에서 설명한 방식대로 듣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말씀과 설교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라고 루터는 바르게 지적했다.

하나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종종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8:8). 게으름과 타성의 죄에 빠진 자는 아무리 말씀이 들려도 그 말씀을 겸손히 마음에 받을 수가 없다. 당신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설교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어떠한가? 당신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자녀가 있다면, 자녀에게 들을 귀를 갖도록 어떻게 도와주고 있는가? 말씀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기기 원한다면, 단순히 말씀 앞에 나오게만 하지 말고, 말씀을 듣는 합당한 태도를 가르치라.

결론

위에서 인용한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의 내용은 루터가 가르친 십계명 중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에 관한 해설에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만큼은 하나님 말씀 앞에 나와서 경외심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분을 예배하기를 바라셨다. 떡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그들을 살게 한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기를 원하셨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도 마찬가지다. 갈수록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고,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 세상 풍조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보여주시는 영광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거룩하게 지켜낸다. 그래서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말한 ‘오직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합당한 태도를 갖춰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절대로 우습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분의 권위가 담긴 말씀 앞에 두려워 떨면서 그 말씀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의 능력으로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자녀들도 말씀 앞에 바른 태도를 갖추도록 부지런히 교육해야 한다. 이어지는 제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고 거기에 ‘형통한 삶’이란 약속을 두신 분명한 이유가 있다.

500여 년 전, ‘오직 성경’을 따르는 이들은 다른 믿음으로 변질된 종교 시스템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바른 교훈에 정착할 수 있었다. 지금도 종교개혁은 계속되고 있다. 당신은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오직 성경’을 따를 것인가? ‘오직 성경’이 반대하는 잘못된 태도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오직 성경’이 요구하는 바른 태도를 갖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