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현장에서 과거엔 믿음을 가졌지만 현재는 의문이 생기는 대상을 발견할 때마다 본질적인 질문이 생긴다. ‘과연 저 성도는 구원받았는가?’ 성도의 구원 여부를 쉽게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또 자기가 책임질 것처럼 성도를 인도하고 돌봐야 할 의무가 목회자에게 있기 때문에 마냥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다. 왜 어떤 성도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말하고 나서 금세 열정이 식고 크고 작은 시험이나 유혹 앞에 완전히 믿음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는가? 왜 어떤 성도는 수십 년간 신실하게 교회 생활을 했는데 어떤 계기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는가? 그 혹은 그녀는 지금 방황 중인가 아니면 교회 안에 사탄이 뿌려 놓은 가라지라서 그런가?
주재권 구원 논쟁은 이런 고민이 극대화된 시점에 존 맥아더 목사를 통해 폭발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만 요구되는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삶을 요구하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은 주재권 구원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행위도 구원에 발들일 수 없도록 막으려 애쓴다. 믿음 자체에 우리의 의지가 들어설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 그러니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관한 지적 동의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목회자 입장에서 믿음을 지적 동의로 정의하는 것은 참으로 속 편한 일이다. 근심되는 성도의 상태를 볼 때마다 ‘저 성도는 확실히 구원받았지만, 아직 삶이 뒤따르지 못한 것뿐이야’라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구원하는 믿음에 주재권 혹은 믿음에 합당한 열매로서 행위가 포함된다고 보는 측면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구원받고 침례에 순종한 성도가 열심히 하나님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자처럼 보일 때(딤전 1:19), 과거의 신앙과 현재의 신앙 중 무엇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대변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존 파이퍼는 <구원하는 믿음>이란 책에서 믿음의 본질에 지적, 의지적 요소뿐만 아니라 정서적 요소가 들어있다고 주장한다(생명의말씀사, 2023): “이 책에서 나는 구원하는 믿음이 그리스도를 보배롭게 여기는 정서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보배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이용한다. 이것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런 것을 구원하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극이다”(21p). 파이퍼는 존 맥아더가 주장한 주재권에 관한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더 깊은 동기로 나아간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애초에 구원하는 믿음 안에 그리스도를 보배로 여기고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마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밭의 비유를 통해 열매 맺는 자와 열매 맺지 못하는 자를 구분하셨다(마 13장). 좋은 씨와 나쁜 씨가 뿌려진 것이 아니다. 모든 밭에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린 동일한 씨앗이 뿌려졌다. 차이는 어디에서 왔는가? 밭의 상태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위, 좋은 땅. 이 말씀에 적합한 적용으로 ‘좋은 땅이 됩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다. 모든 죄인은 견고하고 딱딱한 마음 밭을 가졌다. 죄와 허물로 죽어 생명이 자랄 수 없는 땅이다. 그런데 말씀의 씨앗이 떨어졌을 때 누가 자라나게 하시는가? 누가 견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누가 진리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영혼을 새로운 영으로 거듭나게 하시는가? 누가 자기 영을 주어 그 속에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도록 소원과 능력을 공급하시는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하는 믿음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에 더해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입하신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존 파이퍼는 그래서 이렇게 설명했다: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창조하신 것으로 자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 없이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하는 믿음은 귀신이나 사람이 초자연적인 신생 없이도 가질 수 있는 여느 믿음과 다르다”(155p). 앞서 파이퍼는 구원하는 믿음의 특징으로 1)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 2) 의심에 반하는 경험, 3) 염려와 두려움에 반하는 경험, 4) 하나님의 약속과 실행에 관한 신뢰, 5) 그리스도 자체를 영접하는 것(받아들이는 것), 6) 자증적인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시각(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7)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의 실재를 현재 맛보는 것, 8)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를 가져오는 하나님 주시는 소원과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믿음은 아주 단순한 것이 아니었나? 그렇다. 하지만 아주 단순한 남성 세포가 여성 세포와 만나 심히 기묘한 사람을 창조하는 것처럼, 믿음은 그 안에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이 포함된 씨앗과 같다. 좋은 씨앗은 생존과 성장을 위한 모든 요소가 빠짐 없이 갖춰져 있다. 마찬가지로 구원하는 믿음은 파이퍼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의심, 염려,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를 가져온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인격체로서 그리스도와 그분께 속한 모든 것을 통째로 받아들인다. 말씀하신 그대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게 한다. 구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보게 한다. 그 빛을 바라볼수록 우리는 보배롭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 앞에서 다른 모든 것이 점점 무가치하게 여겨진다. 구원하는 믿음은 우리 안에 그분의 뜻이라면 뭐든지 하고 싶어 하게 만들고, 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는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꽃을 타오르게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구원하는 믿음 그래서 이 땅에서는 산 소망, 마지막엔 영혼의 구원에 도달하는 그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실천적인 측면에서 존 파이퍼가 예리하게 설명한 ‘구원하는 믿음’은 구원이 의심스러운 성도를 바라볼 때, 행위와 동기 모두를 진단하게 한다. 주께서 말씀하신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의 참 의미가 단지 순종하는 행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종을 일으키는 동기도 포함된다는 말이다(마 7:2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5). 같은 의미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도 하셨다(요 14:21). 사랑과 순종의 결코 뗄 수 없는 결합된 관계를 본다. 이는 구원하는 믿음이 작동하는 원리가 주를 향한 합당한 마음에서 시작하여 반드시 주가 기뻐하시는 생각, 감정, 의지 등의 열매를 맺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에 넘어져 믿음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성도를 볼때, 혹은 자신이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느껴질 때, 1) 단지 외부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내면의 동기를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에 관한 신뢰,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에 관한 믿음이 남아 있는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려움과 염려, 원망과 반항심만 생기는가, 아니면 그분을 여전히 보배롭게 여기고 사랑하는가? 2)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다. 초자연적으로 새 생명을 당신 안에서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부족한 행위를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애쓰는 삶은 미지근한 신앙을 외식주의로 굳어지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매료되고 하나님 사랑에 압도되도록 계속해서 복음의 은혜를 부지런히 찾고 마음껏 누리라. 3)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 나의 삶에서 하나님에 관한 신뢰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그리스도보다는 그 외의 것이 의미있게 여겨진다면, 애초에 마음 밭에 심겨진 믿음의 씨앗이 하나님이 심으신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귀신이나 나 자신이 스스로 가질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수준의 믿음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라.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 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