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선택해야 할 때가 많다. 오래전부터 교회에 다니고 싶었는데 어떤 교회를 가는 것이 좋은지 몰라서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 취업 때문에 먼 지역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다닐 교회를 새롭게 찾는 경우도 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혼부부는 각자가 오랜 세월 다녔던 교회로 서로를 인도하고 싶어 하고 결국 부부가 참석할 새로운 제3의 교회를 찾기도 한다. 다니던 교회에서 온갖 상처를 받고 한동안 교회를 멀리하다가 결국 하나님께서 개인이 아니라 무리인 교회를 불러내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전 교회의 단점이 최대한 보이지 않는 교회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지금 출석 중인 교회의 이런저런 단점 때문에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다.
교회를 찾는 과정을 보면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인다. 자녀 또래 학생이 얼마나 되고 주일학교 프로그램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유익하게 잘 제공되고 있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자녀 양육이 교회 선택에 있어 매우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교회가 멀어서 다니기 힘들다며 다른 교회를 찾는 성도는 집과 교회의 거리가 생각보다 중요한 교회 선택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좋은 설교를 찾아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사실 좋은 설교가 무엇인지 각자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맹점이 있다. 좋은 시설, 편리한 교통편, 친한 사람이 많은 곳, 봉사와 섬김의 부담이 적은 곳, 헌금 강요하지 않는 곳 등 실제적인 이유가 교회 선택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특정 가르침의 부재 혹은 지나친 강조 등의 교리적 문제가 교회 선택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교회를 선택하게 만드는 모든 요소가 중요하겠지만, 모두 같은 중요도를 갖지는 않는다.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우선순위를 갖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해도 무관한 것이 있다. 거리나 시설 등이 후자에 속한다면, 복음과 성경적 교리 등이 전자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에 치중하여 지혜로운 결정을 하는 데 실패한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때문에 엄청나게 중요한 것을 포기한다. 그러면 교회 선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어떤 것을 포기하지 말고, 타협하지 않아야 할까? 교회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어떤 것을 생각해야 할지 몇 개의 칼럼을 통해 순차적으로 살펴보자.
첫 번째 우선순위: 교회가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는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가운데서 ‘불러낸 무리’이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가 정확히 그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로 구분하신 것처럼(마 13:24-30) 실제 교회 건물 안에는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께 속한 참 성도와 함께 여전히 세상에 속한(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는) 불신자가 공존한다. 그래서 두 부류의 교인을 모두 포함하여 눈에 보이는 교회(가시적 교회)라고 칭하고, 오직 참 그리스도의 제자만을 구분하여 보이지 않는 교회(비가시적 교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수님은 교회에게 지상대위임령(대명령)을 맡기셨는데, 모든 민족을 단순히 등록 교인으로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요구하셨다(마 28:19-20).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이다. 단순히 등록 교인 숫자를 더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인으로 길러내는 게 아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심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통하여 주님은 자기 “교회를 세우리”라고 선언하셨다(마 16:18).
신약시대 교회에게 쓰여진 편지를 보라. 그들은 확실한 정체성을 가졌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로마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6). 이어서 그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를 축복했다(롬 1:7). 고린도 교회는 어떻게 불렸는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 1:2).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고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가 함께 공유하는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말했다(갈 1:4).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 불렸고(엡 1:1), 골로새 교회도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 불렸다(골 1:2).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였다(살전 1:1; 살후 1:1).
결론적으로,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 거룩함을 날마다 입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충격적인 사실은, 많은 교회가 실천적인 면에서 교회를 이렇게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 등록하면 자동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택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이유로 신실하고 훌륭한 성도가 되고, 심지어 교회 직분까지 준다(집사, 권사로 임명). 강단 설교는 회중석에 앉아있는 불신자가 듣기에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도덕적 설교로 착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거나 감화적 설교로 위로와 감동과 도전을 주면 그만이다. 세속적인 삶을 살아도 교회는 권징하지 않는다. 모두 다 죄인이며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다 괜찮다’고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의 은혜를 깊이 맛보거나 복음의 능력을 강하게 체험하는 일은 거의 없다. 모두 감정 위주 혹은 행위 위주의 이벤트, 행사, 퍼포먼스를 통해 얻는 거짓 은혜, 싸구려 체험뿐이다. 믿음이 떨어진 것 같으면 각종 봉사와 섬김에 매진하게 만들어 열심을 끌어올리면 된다. 교인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지 혹은 배나 지옥 자식이 되어가는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다.
이런 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자기 영혼에 재앙과도 같다. 영적 출생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교회가 어떻게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교회가 정확히 누구인지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하나의 종교 시스템에 불과하다. 그리고 종교인을 찍어내는 그 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비판을 받기에 합당하다: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육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성도라 불리며, 돌이켜 회개하도록 조금도 돕지 않는 교회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교회다. 주님은 그런 미지근한 교회를 “입에서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셨다(계 3:16). “책망하여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셨다(계 3:19).
강단 말씀과 성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혹은 목사와 리더십의 권면과 상담을 통하여 문밖에서 두드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하고, 마음 문을 열게 하는 교회, 그래서 주께서 함께 더불어 먹고 친교를 나누도록 돕는 교회,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전하여 끝까지 이 세상과 마귀를 대항하며 싸우게 하고, 죽도록 충성하도록 함께 독려하는 교회, 한 마디로 진짜 교회가 누구인지를 교회가 하는 모든 일(가르침, 상담, 위로, 봉사, 섬김, 예배 등)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내는 교회가 참 교회다.
교회 안에서 불신자를 차별하고 그들에게 무례히 행하며 망신을 주거나 부끄럽게 만들자는 게 아니다. 불필요한 구별과 대우를 없애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태도로 대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교회는 사랑과 온유가 넘치는 교회가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냄새만이 가득한 교회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 영적으로 연약하고 부족하여 각자의 짐을 지고,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는 자들이 모인 병원과 같다는 말에 어느정도 동의한다.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복음이 필요하고, 또 영혼의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필요하다는 말도 옳다. 하지만, 성경이 일관성 있게 강조하고 있는 복음의 부르심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간과하는 교회는 사실상 병원이 아니라 영안실을 운영하는 것과 같고, 영혼의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살리시고 온전케 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교회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이것을 생각하라. 그 교회가 택하신 자들의 모임인지, 참된 회심을 경험하고 거듭남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무리인지,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참 교회인지.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가 되는 이것을 갖추지 않은 교회는 아무리 가깝고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어도 영적인 능력과 생명력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