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은 맥아더 목사의 설교 <The Marvelous Birth of the King>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아직은 좀 이를 수 있지만, 곧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게 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캐럴은 “저 들 밖에 한 밤 중에…”로 시작하는 <The First Noel>이라는 캐럴입니다. 특히 “노~엘~ 노~엘~”로 시작하는 후렴 부를 좋아하는데요, 이 찬송은 마지막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우리말 가사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기는 하지만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만 백성 맞으라”라는 가사도 본래는 “온 땅이여, 왕을 맞으라(영접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맑고 환한 밤 중에>의 가사 중에도 “평강의 왕이 오시니”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서 오신 분이십니다. 크리스마스의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종종 ‘아기 예수’만 생각하는데요, 사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왕’하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 실제로 왕정을 경험하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잘 아시는 마태복음은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왕의 족보(마 1:1-17)

신약성경을 처음부터 읽어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마태복음 1장 1-1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자칫 독자의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는 지루한 족보를 무엇보다 먼저 기록한 이유는 그 필요성 때문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왕으로 소개하면서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왕의 족보를 가장 먼저 기록한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족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정말로 중요했습니다. 족보 없이는 삶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족보에 따라 기업을 얻었고, 땅을 사고 팔 때도 족보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왕’이라고 말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족보입니다. 진짜 왕족인지 증명을 해야 합니다. 마태는 이를 위해 유대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인 아브라함(유대인의 시작)과 다윗(유대인의 가장 존경받는 왕)을 먼저 언급하면서 족보를 시작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보다 다윗이 먼저 언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아브라함을 먼저 언급했지만 원어에서는 다윗이 먼저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보다도 다윗 왕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족보는 다윗 왕을 거쳐 예수님에까지 이릅니다. 특별히 여기서 마태는 요셉 쪽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경우, 3장 23-38절에서 마리아 쪽의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법적으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셨지만, 혈통만 따지면 마리아의 아들이셨습니다(마 1:16, “마리아에게서…”). 왜냐하면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하여 관계를 갖기 전에 성령님을 통하여 마리아가 임신을 하여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분명하게 말합니다(마 1:25). 마리아는 처녀로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마 1:23). 따라서 예수님이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 되려면 그 어머니인 마리아가 다윗의 자손이어야 했는데, 실제로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인 나단(선지자 나단이 아님)을 통하여 왕의 혈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법적으로 정통을 따른 왕이 되려면 나단이 아닌 솔로몬의 자손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인 요셉이 솔로몬의 자손이기에 해결됩니다(마 1:7). 모든 왕족의 권리는 아버지를 따라 전승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법적 아버지인 요셉의 권리를 이어받아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계획 아래서 이루어졌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은 왕의 혈통으로 오셨고 왕이 될 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왕의 특징(마 1:1-17)

사극을 보면 ‘성은’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게 됩니다. 별 일이 아닌 것 같은데도 신하들은 연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쳐댑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의 우리는 사실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최고의 통치자입니다. 심지어 왕은 생사를 명할 수도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왕 앞에 서는 자는 항상 왕의 은혜를 구해야 했습니다. 특히나 왕의 법을 어긴 경우라면 왕의 자비를 구하는 것 외에는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있어 좋은 왕은 공의로우면서 약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왕이셨습니다. 왕의 법을 어긴 자들을 용서하고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왕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하늘나라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구름을 타고 떠들썩하게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죄인인 인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거룩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도 왕의 법을 어긴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자를 통해 오셨습니다.

예수님 족보에 있어 대표자들인 아브라함과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죄인들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거짓말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불리는 다윗은 간음에 살인까지 했던 자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죄인들이 있습니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밧세바)가 그들입니다. 다말은 근친상간을 통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가나인 여인으로 창녀였습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 우상을 숭배하던 자였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아닌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족보는 왕의 법을 어긴 죄인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로 예수님의 족보에 들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도 전에 보여주신 은혜입니다.

 

왕의 탄생(마 1:18-25)

예수님의 탄생은 다른 어떤 왕의 탄생보다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이 관계를 가지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마 1:20). 그들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동침도 하지 않았습니다(마 1:25). 어떤 왕도, 아니 어떤 사람도,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 없이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나셨습니다(마 1:23).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태는 이사야 7장 14절 말씀을 통해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많은 아기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왕’만이 아기가 되셨습니다(<One King>의 가사 중). 이것이 예수님의 탄생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아기로 태어나셔서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왕이신 분이 아기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왕에 대한 경배(마 2:1-12)

마태복음 2장에서 우리는 유명한 동방 박사의 이야기를 만납니다. 동방 박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들은 당시의 영향력 있는 엘리트 집단이었을 것입니다. 천문학을 비롯해 점성학, 자연사, 건축, 농업 등에 상당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었을 것이며, 왕을 포함한 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물은 질문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고 그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았을까요(마 2:2)? 그들은 다니엘을 비롯한 바빌론, 메도-페르시아 시대의 유대인들을 통해 이 놀라운 왕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별’을 통해 그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왕이 그저 평범한 왕이 아닌 것 또한 알았기에 굳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경배하고자 했습니다(마 2:2). 예수님을 찾은 그들은 그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마 2:11). 마태는 그들이 누구를 경배했는지 분명하게 말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왕을 세우는 자’였던 그들이 ‘왕이신’ 예수님 앞에 나와 경배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경배하며 드렸던 예물은 황금, 유향, 몰약이었습니다. 이 예물들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금은 왕을 상징합니다.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악취를 제거하여 삶을 더 살만하고 기쁘게 만드는 방향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세 예물은 예수님이 하나님-인간이신 왕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런 예수님을 경배했던 것입니다.

 

왕에 대한 선포(마 1:23; 2:6, 15, 18, 23)

마지막으로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여러 차례 구약의 말씀이 인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 주권자,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정확히 이루셨습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사야 7장 14절에서 예언된 말씀입니다.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처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 분명한 예언입니다.

마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미가 5장 2절의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왕이 태어날 것인데, 그 장소는 베들레헴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까요? 누가복음 2장 1-7절을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아래서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호세아 11장 1절의 말씀입니다. 사실 호세아 말씀은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신 사건은 예수님에 대한 ‘예표’였던 것을 마태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예레미야 31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앞에 언급한 호세아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표로서 그 슬픔과 더 나아가 예수님이 가져오실 소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말씀은 사실 구약에서 정확하게 예언된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사렛 사람’은 구약에서 언급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마태는 여기서 기록된 말씀이 아닌 구전된 예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사렛에 대한 당시의 통념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6에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에 기초해서 ‘나사렛 사람’은 ‘멸시받고 미움 받는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마태는 아마 시편 22편 6-8절, 이사야 49장 7절, 53장 3절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런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

 

유일한 만 왕의 왕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왕이셨습니다. 그 어떤 왕과도 다른 놀라운 왕이셨습니다. 만 주의 주요, 만 왕의 왕이셨습니다(계 17:14; 19:16). 예수님의 탄생은 이런 면에서 정말로 놀랍습니다. 한 아기가 태어나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한 왕이 아기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의 가사를 담은 캐롤을 한 곡 소개하며 글을 줄입니다.

 

<One King>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순전한 사랑을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멈춰서 그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보기에는 어떤 기쁨도 평안도 희망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후렴>

그래서 그는 별빛 함께 그 눈에 사랑을 담고 내려왔습니다.
그가 첫 울음을 터뜨렸을 때, 어떤 왕에 대한 환영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아기들이 왕이 되었지만,
오직 한 왕 만이 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순전한 빛의 보좌와 면류관을 포기했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대신 그는 베들레헴의 말구유를 택했습니다.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와
기쁨도, 평화도, 소망도 없는 나를 보았습니다.

<후렴>

그래서 그는 별빛 함께 그 눈에 사랑을 담고 내려왔습니다.
그가 첫 울음을 터뜨렸을 때, 어떤 왕에 대한 환영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아기들이 왕이 되었지만,
오직 한 왕 만이 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천사의 날개와 노래 속에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아기의 울음을 이해할 것을 알았고,
섬기는 왕으로부터 사랑을 배울 것을 알았습니다.

<후렴>

그래서 그는 별빛 함께 그 눈에 사랑을 담고 내려왔습니다.
그가 첫 울음을 터뜨렸을 때, 어떤 왕에 대한 환영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아기들이 왕이 되었지만,
오직 한 왕 만이, 오직 한 왕 만이 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