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냉전 시대가 펼쳐진 것 같다. 국가 전체가 좌측과 우측으로 갈린 것처럼 보이고, 정치에 관심이 많은 몇몇 사람만 뚜렷한 의견이 있었던 교회 안에도 이제는 진보와 보수의 색깔이 분명해졌다. 젊은 세대야 예전부터 여러 가지 경로로 정치 기사를 접해왔지만,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까지 유튜브로 정치 관련 영상을 얼마나 보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교회 전체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성경을 통해 제시하고 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목회를 하면서 갈수록 정치적인 의견을 묻거나 특정 방향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자주 듣는다. 보수를 지지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이라는 비난, 반대로 보수를 지지하면 진보가 의문을 제기한 보수의 비리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비난 등 세상이 전개한 진영논리를 가지고 압박하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비전문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대답하기 쉽지 않으면서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정치 분야의 다양한 정보를 취득하고 분석해야 하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왜 공화당을 지지했는가?
미국 캘리포니아 LA에 위치한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는 이례적으로 두 차례 트럼프가 속한 공화당을 지지했다. 노골적으로 ‘공화당’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와 낙태라는 두 가지 큰 이슈에 관해 반성경적인 법을 제정하고 국가 전체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로 방종하게 만들 정당을 하나님 나라 백성이 지지할 수는 없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지만 그래도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더 나아 보이는 정당과 후보자를 지지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자신이 반대하는 정책을 법으로 제정하여 지금보다 더 많은 성 정체성의 혼란과 유아 살해가 일어날 사회를 만들 정당을 어떻게 선택하고 지지할 수 있을까?

목사는 정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정책이나 전략 등을 평가하고 분석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도 존 맥아더 목사가 성도를 권면하여 특정 정당을 지지하도록 인도한 것은 누군가에겐 목사의 ‘정치적 발언’으로 들릴 수 있지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응하고 선을 베풀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사역자인 땅의 권세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함이다(롬 13장). 세상은 어떤 정당이 세워지든 침몰하는 배처럼 가라앉고 있지만, 반성경적인 정책, 그것도 사회 기반을 뒤흔들 정책을 진취적으로 추구하는 정당보다는 똑같이 반성경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으나 반대쪽보다는 조금은 사회 전반적인 영향이 적을 것 같은 정당을 택하는 것이 침몰하는 속도를 어쩌면 늦출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의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선악의 기준에서 그나마 덜 멀어진 정책을 추구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합당하다(딤전 2:2). 물론 땅의 권세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그분의 뜻대로 세워지는 것이니, 우려했던 일들이 생겨도 하나님 나라 백성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의 권세를 존중하고 순종하되(벧전 2:13-17),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요구하거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금할 때 수많은 믿음의 선진처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행 4:19).

확실히 ‘YES’ 혹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
결국 목사가 어떤 정치적 이슈에 관하여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기반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항목에 제한된다. 개인의 생각이야 어떤 영역이든 가질 수 있지만, 특별히 목사로서 성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인도하고자 할 때,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전제조건은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목사는 영적으로 양들을 인도하는 역할 안에서 정치를 알고 대처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가령 자녀의 징계를 제한하려는 현 정부의 정책이나, 동성애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분명히 부모에게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근실히 징계하라고 명하고 있고(잠 13:24), 동성애는 순리가 아니라 역리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불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고전 6:9). 낙태를 확대하여 더 편하게 태아를 죽일 수 있게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을 살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이기 때문이다(출 20:13; 롬 13:9; 약 2:11).

열심히 일한 사람이 그만한 대우를 받고, 자기 소유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지지하지만, 부한 자가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것을 반대한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레 19:13; 약 2:6). 어려운 사람을 돕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9:19). 하지만 구제와 헌신을 강요하고 억지로 빼앗는 제도는 반대한다. 그 또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착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탐욕과 방탕을 반대하고(마 23:25) 거짓과 속임수를 미워한다(막 7:22). 정치적 분쟁과 시기, 다툼을 기뻐하지 않고(롬 1:29),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과 칭찬을 받을 만한 것, 덕이 있고 기림이 있는 것을 지지한다(빌 4:8).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정치
모든 정치적 이슈가 성경을 통해 명확하게 분별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물리학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한 책이 아닌 것이 분명하듯 정치적 전략과 정책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 나라 국민답게 살도록 하는 일에 있어서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충분한 진리와 능력을 제공한다(딤후 3:16-17). 목사는 바로 이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성도를 도와줄 책임이 있다. 하지만 종종 하나님 나라 백성 중에 이 땅의 정치에 관해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현 정부가 나라를 통째로 팔아 중국 정부에 넘기려고 하는데 우리가 지지할 수 있겠냐는 질문, 친미 정책이 아니라 친중 정책을 펴고 있어서 다른 친중 정책을 편 나라들처럼 망하게 될 것인데 반대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 지금 정부의 정책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사상 가령 사회주의, 공산주의 뿌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반대하지 않으면 교회 탄압이 시작되고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수 있는 길이 막히는데 왜 그걸 가르치지 않냐는 질문.

솔직히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친미 혹은 친중 정책이나 대북 정책 등은 현 정부가 선택한 정치, 외교 전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 대한 내 생각은 있지만, 성경을 근거로 뭔가 말해주고 인도해야 할 만한 것인지 잘 몰라서 그렇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기독교를 탄압하고 복음을 반대하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그런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반대한다. 하지만 지금 정부가 ‘좌’측에 속한 정책을 많이 도입하는 것과 공산주의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미국에 민주당이 집권하면(현재 그렇다) 곧바로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여러 유튜버나 반대 정당에서 만든 소위 ‘팩트’에 따라 현 정부의 주요 인물의 사상과 인맥을 조사하고 공산주의로 만들 사람이라고 분별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래서 어디까지 알아야 할까?
나를 굉장히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런 질문을 하는 성도 대부분이 ‘목사’ 타이틀을 가진 유튜버들에게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다. 세계사를 연구하며 지금 정권을 분석하는 목사도 있고, 이승만 대통령을 기독교에 바탕을 둔 나라를 세운 위인으로 추앙하고 현 대통령은 그 반대편 최악의 인물로 제시하는 목사도 있다. 현 대통령의 말 한 마디, 과거 기록의 문장 하나하나를 샅샅이 조사하여 사상을 파악하는 목사도 있고, 지금 세운 정책 자체의 평가가 아니라 그 정책에 숨은 의도를 파헤쳐 현 정부의 실체를 폭로하려는 목사도 있다.

‘목사’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인가? 마땅히 이런 일을 해야하는데 나는 안 하고 있는 것인가? 지난 몇 년간 나에게 이것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부담과 짐이었다.

한국 교회는 말씀에서 점점 멀어져 도덕적, 윤리적 부패가 세상이 염려할 만큼 심각한 지경이 되었고, 교회 안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세대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한 설문조사에서 그리스도인 가장이 가정 예배로 가정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10%도 되지 않는다고 발표했고, 그 10% 안에서도 1/10이 회심한 자녀를 낳는다는 충격적인 결과도 있었다. 80년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핍박을 감수했던 구령의 열정은 미지근해졌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물질, 재능과 영적 은사 등을 주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며 사용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누구나 그랬듯이 더 나은 “본향 찾는 자”로서 천국을 갈망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세상 백성처럼, 이 땅이 본향인 것처럼 살 때가 많다.

이렇게 산적해 있는 영적 과제를 풀기 위해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간구하고, 각 성도를 찾아가 가르치고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고,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지 않도록 보호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힘써야 할 목사가 이 땅의 정치를 어디까지 알아야 할까?

그리고, 목사가 아니더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이 땅의 정치를 어디까지 알아야 할까?

앞으로 몇 번의 칼럼으로 그동안 마음의 큰 부담으로 안고 있던 문제를 풀어가 보려 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은과 금 같은 공적을 쌓으라고 권면했다. 그날에 주님을 위한 일이 아닌 나무나 짚 같은 것들은 허무하게 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10-15). 만일 정치가 금, 은, 보석 같은 그리스도 터 위에 세워져 영원한 가치가 있는 공적이라면 나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땅히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가 나무나 풀이나 짚같이 그날에 다 타버려 나를 부끄럽게 만들 것이라면, 알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이처럼 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질문, 오래 묵혀 두었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제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