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둘로 갈라진 것 같다. 좌와 우로. 예전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좌우로 갈라진 진영논리가 교회 안에서도 점점 더 큰 목소리를 낸다. 페이스북 친구들이 거의 대부분 크리스천인데, 정치 기사에서 볼만한 내용을(그것도 편향된 내용을) 각각 좌우의 관점으로 날마다 포스팅하는 친구도 있다(잘 모르는 온라인 친구이지만).

물론 정치적인 성향이 다를 수 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가 그 자체로 잘못된 건 아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놀드 클링이 분석한 것처럼 진보(Progressive)는 억합하는 자-억압받는 자로 사회구조를 파악하고 억압받는 자 쪽에 서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며 이를 위해 억합하는 자를 견제하는 정책을 편다. 보수(Conservative)는 문명-야만으로 사회 구조를 분석하고 문명을 지탱하는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그것에 대항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규제한다(참고: http://achurch.or.kr/?p=11177)

가령 동성애에 관한 좌와 우의 생각이 다른 이유는 성적 소수자를 억압받는 자로 보고 그것을 억압하는 다수를 견제하기 위한 관점과 동성애가 문명을 지탱하는 가치를(성 정체성이나 성 인식) 훼손한다고 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성경은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동성애가 죄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좌파와 우파 중 어디에 속하셨을까? 진보와 보수 중 어떤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셨을까?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와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을 책망하신 것을 보면 좌측에 계신 것 같다. 하지만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모두 문명을 창조하고 지탱하는 하나님의 진리임을 기억할 때 우측에 계신 것 같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으셨다.

성경 역시 좌파나 우파만의 경전이 아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는 가난한 백성을 착취하는 이스라엘 지도자의 부패와 비리를 강력하게 꾸짖고 책망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분명한 뜻과 명령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모든 행위를 엄중히 벌한다. 어떤 사람은 신약 성경엔 사랑만 가득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달려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받으신 이유는 인류가 과일 하나와 뒤바꿈과 동시에 계속해서 무시해온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세우기 위함이 아닌가? 성경은 절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는 이들 가운데 좌로나 우로 치우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보통 이런 특징을 보인다.

좌우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의 특징 1: 형제, 자매를 정죄한다

좌로나 우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은 반대 진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보수적 관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지지하면 대기업 부패와 비리도 눈감아주고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인 것처럼 몰아세운다. 반대로 권력의 비리에 반대하고 억눌린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으면 동성애를 지지하고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함께 그리스도의 피로 한 교회가 되어 한목소리로 찬양을 하고 영원한 삶을 공유하는 형제자매가 진영논리로 금세 원수가 되어 버린다.

일제강점기와 군사정부 시절 교회가 기득권의 잘못된 일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 부패한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을 왜 지금 시골 교회에서 조용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성도를 향하여 하는 걸까?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고, 지금 그런 일을 행하고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지금 정부가 잘 하고 있는 일을 칭찬하는 것이 왜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일이라고 쉽게 손가락질하는 것일까? 좌우로 치우쳐서 그렇다.

좌우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은 다른 생각과 관점을 가진 형제자매와 교제하기 힘들다. 첫째로 대화의 소재가 쉽게 정치적 이슈로 넘어가고 진영논리에 갇힌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쉽게 대화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영적 건강이나 말씀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어도 대화는 계속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정치 이야기로 쉽게 빠진다. 둘째로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이 치우쳐 있기 때문에 중도에 가까운 대답을 해도 쉽게 반대 진영에 있다고 판단하고 비판을 쏟아붓는다. 심지어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정신 차리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라고 충고한다. 결국 자기 생각과 의견에 동의하고 찬성해야만 대화가 좋게 끝난다.

침묵이 곧 긍정과 지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그 사람의 정치적 색깔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좌우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은 침묵하는 성도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충분한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판단한다. 예를 들어 코로나의 전파가 몇몇 정치색이 강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 것에 분노하면 진보를 지지하는 자로 취급한다. 언론이 ‘교회발 감염 20명’이라고 크게 제목을 달아놓고 내용을 보면 교회를 통한 감염자 5명 그 외에 몇 명, 이런 식으로 보도하는 것이 일종의 종교탄압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본다. 마치 세상에 좌와 우만 있는 것처럼 보고 쉽게 판단하고 정죄한다.

좌우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의 특징 2: 시선이 땅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나그네와 체류자로 살아간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의 어둠을 비추고 부패된 것을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책임 이행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신분으로 소속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좌우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은 그 목적을 상실하기 쉽다. 시선이 땅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기독교 출판사 대표는 페이스북에 사회적 약자와 민족 화합, 통일 등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오직 믿음, 사랑, 성령 충만 이런 것만 말하는 설교자는 사회적 외식자라고 비판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이 설교를 듣는 청중이라고 생각해보라. 설교 시간에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면 ‘지금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아무런 쓸데없는 무의미한 설교로군’이라는 판단을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와 그가 세우신 사도들이 선포한 성경에 기록된 설교문에는 당시 팽배했던 양극화된 사회 구조와 권력의 부패에 대한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모른 척 하거나 그들이 받는 억압을 간과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초대 교회가 자기 땅과 소유를 팔면서까지 서로의 필요를 돌보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그들의 가르침이 ‘오직 믿음, 사랑, 성령 충만’으로 가득했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 관심사가 일시적인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그리스도인의 힘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사랑, 성령의 충만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어떤 정당이 들어서는지, 어떤 정책이 세워지는지에 최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 굴복되어 살아가는 불순종의 아들들을 더욱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는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에 관심을 갖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다. 오직 믿음, 사랑, 성령 충만은 현실과 동떨어진 쓸모없는 가르침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령 충만할 때에야만 그리스도인은 참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현실의 문제를 바르게 바라보고 담대히 싸울 수 있다.

안타깝게도 좌우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은 과도하게 이 땅에 일어나는 일과 그것을 바로 잡는 일에 사로잡힌 나머지 실제로 그 일을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지키고 제자를 양육하는 신실한 교회도 만일 이 땅의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나서지 않으면 외식적인 교회로 치부한다. 정작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두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한 훈련 곧 경건에 이르는 훈련에 게으르면서도 세상의 부조리에 강력하게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면서 하나님의 도구로 이 땅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설교자 역시 외식자가 아닐까?

좌우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의 특징 3: 사명에서 멀어진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추종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을 나타낸다(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리스도를 세상에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내 증인이 돼라’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짊어진 이름이 무엇인지 늘 기억해야 한다. 전파하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듣는 이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풍겨야 한다(고후 2:16).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어떤 정권이 세워지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사명은 가까운 이웃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만이 인생에 줄 수 있는 영생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 일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사회적 약자의 일시적 안위와 복지를 위해 구제하지 않는다. 영원한 안식과 복지가 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더 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좌우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은 종종 사명에서 멀어진 모습을 보인다. 좋은 이웃, 좋은 직장 동료로 살아가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복음을 전달하는 일에는 소극적이다. 사회를 평등하고 자유롭게 바꾸자고 말하면서도 온전한 정의와 공의로 영원히 다스리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개하지 않는다. 죄로 물든 이 땅에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에서는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지도자가 세워지든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이 여기저기 일어나기 마련이다. 거기서 나오는 탄식은 장차 임하실 완벽한 왕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탄식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도 그 결과 모든 탄식을 찬양으로 바꾸실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려는 목적의식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말하고 가르치고 돕고 섬기고 구제하고 때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모든 목적은 사명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좌우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은 그 사명에서 멀어지기 쉽다.

결론:

짐 엘리엇은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에콰도르 아우카족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29세에 순교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가 노래한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하나가 된 자들이다. 영원한 소망, 영원한 구원,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영원한 진리, 영원한 기쁨과 만족, 영원한 영광, 영원한 나라…

영원하지 않은 이 땅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소게임을 하듯 이쪽저쪽으로 치우쳐 무조건적인 지지나 비판을 반복하는 일은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자”의 모습과 너무나 다르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한 목숨 건 경주를 우리가 함께할 수는 없을까?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그렇게 살 수 없을까? 마귀와 악한 세대, 옛 자아와 힘겹게 싸우는 삶을 사는것도 모자라 형제자매가 진영 논리로 서로 싸워야 할까? 우리가 서로 땅에 고정된 시선을 하늘을 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에서 멀어질까 날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녀에게 계명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실질적 무신론자처럼 살아가기 쉬운 세상에서 서로에게 그리고 자녀에게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날마다 말해줄 책임이 있지 않나?

좌우로 치우치지 말자. 좌우로 치우친 이들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지 말자. 그들의 SNS나 책만 골라 읽지 말자. 그런 미디어만 구독하여 보지 말자. 자칫 잘못하면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결코 그리스도가 제시한 적 없는 길로 걷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가 피로 사신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영원하지 않은 것을 위해 포기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