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디 가서 교회 목사라고 소개하기가 부끄럽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온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 시점에 연일 교회는 확산되는 바이러스의 슈퍼 전파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도되고 여론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 ‘복음을 전파해야 할 교회가 질병을 전파하고 있다’, ‘우리는 당신들이 말하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다’ 등 가슴 아픈 비판들이 쏟아지고 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편 미국 LA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존 맥아더 목사)는 정부의 대면 집회 금지 명령에 처음엔 순응했지만, 최근 ‘교회의 머리는 가이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겠다’라고 선포하며 불복했다. 실제로 매 주일 마스크 없이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있으며 현재 정부와 법정 소송을 진행 중이다. 어떤 사람은 존 맥아더 목사와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성도들을 용감하다고 칭찬했고, 또 어떤 사람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참고로 필자가 섬기는 유평교회는 코로나가 시작되고 나서 첫 달을 비대면 집회로 운영했고, 그 이후로는 정부의 방침에 순응하여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지금까지 주일 집회를 운영해왔다. 소모임이 금지되면 소모임을 취소하고, 2단계가 실시되어 50명 미만이 모이도록 권고하면 그 권고에 따랐다. 오는 주일엔 대면 집회 금지 명령에 따라 온라인 예배로 전환할 예정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성도를 섬기며 목자되신 하나님께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고민이 깊어지는 건 사실이다.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서 출근을 한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을 찾는다. 기본적인 인간관계나 비즈니스를 위해서 소모임을 갖는다. 심지어 쉼을 위해 휴양지로 떠난다. 그러면서도 성도와의 교제, 소그룹 성경 공부, 나아가 정규 집회를 멀리하는 것은 이것이 그렇게까지 필수적인 일도 아니고 중요한 일도 아니라고 우리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직장에서 교회 가는 것을 싫어하여 집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말은 목숨을 걸고 모이기에 힘쓰는 중국 지하교회 성도나 북한의 성도들에게 납득이 될까? 코로나 19는 어쩌면 우리 신앙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면 존 맥아더 목사가 그레이스 교회에서 현재 하는 일이 이해가 된다. 무엇을 위해 교회가 함께 용감하고 담대하게 모이기에 힘쓰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물론 방역과 마스크 착용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조심하고 있는 교회의 입장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성도의 건강과 안전도 중요한 가치가 있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는 그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두렵게 만드는 것이 아닌 평안을 선포하는 것이다(롬 13:8-10). 그래서 필자의 교회도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정부 방침에 따라 모이기에 힘쓰고 있다. 가이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말이다(롬 13:1-7).
다만 이런 결정을 하게 될 때 앞에서 고민한 부분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꼭 모여서 예배하라고 했냐?’라고 비난할지라도 우리는 모이기에 힘쓰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그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이웃의 건강을 위협하면서까지 모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냐?’라고 비방해도 우리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동시에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을 공동체로서 함께 경험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 시대 교회에게 막중한 책임이 있다. 만만치 않은 과제가 있다. 모이기 힘든 때,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비접촉 시대, (온라인이든 소규모로든)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합당한 비판을 수용하되 맞서야 할 비판은 맞서야 한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서로 돌아보아야 할 책임을 다양한 대안을 통해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과 이웃의 유한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서 영원한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은 코로나로 파기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일시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이때도 우리의 사명은 조금도 변경되지 않았고, 다만 어떻게 순종할 것인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 참된 교회,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지금 어떻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할까?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세상이 알게 할 수 있을까?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격려하고 돌아보는 일을 지금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사항을 생각해 보자.
복음에 무언가 섞는 것을 부끄러워 하자
최근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치적 선동을 하면 복음에 큰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도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이 있을 수 있다. 성도로서 이 땅의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정부를 뒤집어엎으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정치 운동을 교회의 목사가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참 슬픈 일이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이 전파해야 할 복음에 다른 의도와 목적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은 정치적 견해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죄인을 포용하여 진리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 있다. 하지만 그 순수한 복음에 무언가를 섞으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의가 퇴색된다.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정책을 반대해야만 복음에 합당한 자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나아가 복음에 마치 그러한 항목들이 포함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부모의 징계권 박탈, 동성애 합법화, 낙태 찬성, 간음죄 폐지 등 성경의 가치를 벗어난 정책이 세워지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에 대한 교회의 입장, 성경의 가르침을 선포할 수도 있다. 칼럼을 쓰거나 설교를 하거나 성도들에게 바른 것을 성경을 가지고 교훈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진리를 말하는 것은 복음을 더욱 명료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이 기록하신 말씀을 통해 세상과 죄를 책망할 때, 그 책망은 죄인에게 복음이 전달되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 오히려 복음을 불순하게 드러내는 말과 행동은 아무리 그것이 진리를 일부 담고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이 멀리해야 하는 일이다.
둘째로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바라게 한다. 복음을 소유한 자는 이 땅에 임시 시민권을 두고 살지만 언제나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살아간다. 보물을 땅이 아닌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 닥쳐와도 변치 않는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환경이 어려울수록 세상은 그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묻고 그때 우리는 소망의 이유가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인이 대부분의 시간을 이 세상 정치를 논하는 데 사용한다고 생각해보라.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일에 대부분의 노력을 쏟아붓는다고 생각해보라. 어떤 법이 통과되면 다 망하게 되는 것처럼, 어떤 정당이나 지도자가 힘을 얻으면 소망이 없는 것처럼 온통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입만 열면 그것에 대해 말한다면, 과연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할까? 그리스도께서 언제든 오실 수 있다는 진리를 믿고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우리가 먼저 그분의 뜻과 나라를 구하지 않고 대신 하는 일이 무엇인가?
반성경적인 정책과 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이념과 사상을 가지고 정치 선동에 앞장서는 것 모두 참된 복음에 무언가를 섞어 세상이 복음을 들을 수 없게 막는 행위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진리를 오직 진리만을 사랑 가운데 말해야 한다. 스스로 점검해 보자.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복음에 미치는 영향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한편 최근에 사과하는 목사들이 많이 생겼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말하지만, 궁극적으론 그들이 하려는 일은 문제가 되고 있는 목사와 몇몇 교회들의 잘못을 꾸짖어 분노한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한 사람들은 교회의 정상적인 활동도 문제 삼는다. ‘그냥 모이지 말라면 모이지 마라’, ‘꼭 교회 모여야만 신이 축복하냐’, ‘다 헌금 때문에 저러는 것이다’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 그 자체를 조롱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지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한다면, 우리는 올바른 것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답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말하고 삶으로 보이는 것은 죄 많은 세상이 받아들이기 힘들고 미워하는 일이라고 해도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행해야 한다.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한 것에 대해 사과할 필요는 없다.
만일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 세우신 권세에 순응하고 있다면,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을 부지런히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코로나보다 더 심각한 전염병(흑사병), 혹독한 핍박에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초대교회가 그러했듯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행 2:42). 믿지 않는 사람의 눈에는 교회가 모여서 하는 예배나 교제, 섬김과 돌봄이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에 하지 않아도 될 일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믿는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여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철저한 방역 수칙에 따라 정부 방침에 순응하며 모이기에 힘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모여 교제하는 것처럼, 성도가 같은 소망을 가지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교제를 추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세상은 헌금을 돈벌이라고 비웃지만, 우리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는 무례하지 않은 방식으로 들을 준비가 된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안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복음 외에 다른 메시지가 교회의 이름으로 전파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복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것에 슬퍼하지만, 복음 그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반대로 세상이 복음을 부드럽게 삼킬 수 있도록 진리를 타협하고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행위 역시 반대한다. 편협하다는 손가락질을 받고 너무 좁은 길을 제시한다는 비방을 받아도 우리는 좁고 협착한 길로 인도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과 삶으로 선포할 것이다.
이 땅에 기독교 왕국이 세워진 중세시대, 교회는 오히려 정치와 결탁하여 부패하고 타락한 복음을 세상에 내놓았다. 반대로 공산주의 국가가 교회를 완전히 제거했다고 생각했을 때 자기 목숨을 걸고 참된 복음을 외친 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로마 제국에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기독교인은 로마인도 두려워서 하지 않았던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을 묻는 일을 담대히 행했다. 불이나 칼이나 톱이나 짐승에게 뜯겨 죽는 일도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말하고 행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 그것이 코로나 시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을 뒤바꾸려고 복음이 아닌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에 애쓰지 않는다. 우리가 마주한 세상의 죄를 담대하게 성경으로 사랑 안에서 꾸짖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외칠 것이다. 절대로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빌라도와 가이사의 죄를 지적하시고 유대 종교지도자의 타락을 질책하셨다. 하지만 그분이 말씀하시고 살아내신 복음은 정치개혁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죄인이(빌라도, 가이사,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포함하여) 하나님께 회개하기에 이를 수 있도록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복음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는 우리는 바로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세상에 외쳐야 한다.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