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발달할수록 범죄는 줄어들어야 할 것 같은데,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다양한 수법의 범죄가 오히려 늘어나는 것을 본다. 과거에 사람들이 전화를 통해 종종 사기를 쳤다면, 이제는 들고 다니는 전화로 언제든지 사기를 친다. 매일 수십 통씩 쌓이는 메일 중엔 엄청난 유산을 받아서 나누고 싶다는 솔깃한 메일부터, 당장 은행 정보를 주지 않으면 심각한 형벌을 받을 수 있다는 협박 메일까지 각양각색의 낚시 메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길에서 나눠주는 물건도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도 믿을 수 없다. 때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는다.
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남을 속여 가진 것을 빼앗으려 하는 걸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왜 그런 삶의 방식을 취하여 사는 것일까? 기발한 속임수와 기술로 다른 사람의 돈을 쉽게 빼앗는 것이 영특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잘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어서 양심을 져버리고 그 일을 하는 것일까? 속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양한 동기가 있겠지만, 속은 사람 입장에서는 동기가 무엇이든 ‘속여 빼앗는 일’로 상처와 손해를 입었으니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길 것이다. 사실 속이는 사람도 체포되고 나면 ‘왜 그랬냐?’는 질문에 ‘잘못했다’고 대답한다. ‘속여 빼앗는 일’이 명백한 잘못이라는 말이다.
첫째 질문: 속여 빼앗는 것은 왜 죄인가?
그러면 왜 ‘속여 빼앗는 일’이 죄인가? 속여 빼앗는 것(ἅρπαξ)은 “노략질”(마 7:15), “토색”(눅 18:11)으로 번역하기도 했으며, 기본적으로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가리킨다. 남이 자발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속여서 혹은 강압적으로 빼앗는 것이다.
예수님은 ‘속여 빼앗는 일’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의 본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마 7:15). 다른 양들과 같은 동류인 것처럼 겉모습을 속이며 접근하지만, 본심은 ‘어떻게 하면 저들을 잡아먹을까? 내 배를 어떻게 채울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조직적으로 남의 물건을 속여 빼앗는 경우를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 행위를 죄라고 말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구멍가게에서 내가 구입한 물건의 값을 실수로 싸게 받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항에서 구매한 물건에 대한 관세를 내야 하는데, 운 좋게 넘어갔다. 당신은 자신 납세를 하겠는가? 의도적으로 남을 속이든, 실수로 속게 되든 금전적인 이익을 남이 모르게 얻었다고 생각될 때 당신은 그것을 정직하게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은가? 아니면 하나의 불로소득으로 여기겠는가?
남에게 주는 피해가 적다고 느껴지면 혹은 피해 본 사실을 잘 모를 거라고 여겨지면, 우리는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일에 양심의 거리낌을 쉽게 벗어버린다. 내가 적극적으로 속인 것은 아니니까…상대방이 직접적으로 피해 보는 것은 별로 없을 테니까… 이런 생각으로 자기합리화하면서 우리는 정직을 뿌리치고 속여 빼앗는 일을 한다. 속여 빼앗는 일은 그만큼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일을 분명히 금하셨다.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레 19:11). ‘속여 빼앗는 일’이 죄인 일차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2). “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말은 레위기에 여러 번 등장한다(레 18:4-6, 21, 30; 19:3, 4, 10, 12, 14, 16 등). 하나님께서 “도둑질”과 ‘속임’, “거짓말”을 금하신 이유는 언약의 백성이 그 행위를 저지를 때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기 때문이다. 단지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만 해당 사항이 있는 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자기 형상을 온 땅에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 창조하셨다(창 1:28).
여기서 우리는 ‘속여 빼앗는 일’이 죄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정직한 성품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속임과 거짓을 담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무리 남에게 적은 손해를 입혔다고 해도, 남이 그것을 잘 모른다 해도, 일부로 속인 것이 아니라고 해도, 정직함을 버리고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모든 종류의 ‘속여 빼앗는 일’이 죄가 되는 것이다.
둘째 질문: 속여 빼앗는 것은 왜 천국에 못 들어갈 정도로 큰 죄인가?
한 가지 충격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라고 엄포를 놓으셨다는 것이다(고전 6:10). 왜 그럴까?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들만 들어갈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고, 죄로 인해 그들의 형상이 깨어졌을 때 동산에서 그들을 내어쫓으신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어그러지고 깨진 형상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들만 들어갈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집으로 영접할 때, 자기 아들과 99% 닮았다 해도 아들인 셈 치고 영접하지 않는다. 100% 아들이어야만 아들로 영접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참으로 자기 형상을 지닌 이들을 자녀로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
이 말은 당신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반하는 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속여 빼앗는 일’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히는 죄이기에, 그런 일을 행한 이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죄들도 마찬가지다. 그분의 온전하고 거룩한 형상에 흠집 내는 죄를 조금이라도 범한다면 하나님 나라 밖 어둡고 고통스러운 지옥에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누가 가질 수 있는가?
그러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처럼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품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 중에 누가 하나님 형상 그대로 조금의 왜곡이나 훼손 없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없다. 아무도 없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켰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분을 보내주셨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은 그를 가리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했다(요 1:14).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히 1:3).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골 1:1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고후 4:3).
놀라운 진리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롬 8:29).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롬 8:3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단순히 모든 죄가 사라지고 이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 온전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영화롭게 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도 바울이 한 고백을 들어보라.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러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믿는 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을 나타내심으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신다. 맞아들 예수를 닮아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자들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가진 분은 오직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성취할 수 있는 수준은 하나님의 영광에 훨씬 못 미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와 합하여 그분의 온전한 의를 옷 입게 하셨기 때문이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이들은 그래서 거짓말, 속임수를 버려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예전에 입고 있었던 옷이다. 그들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새로운 옷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정직과 선을 추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쉽게 말하면 무엇에든지 하나님의 형상대로 생각하고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에든지 참되시다. 그러므로 참된 생각과 참된 행위를 가지라. 하나님은 무엇에든지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즉 경건한 생각과 삶을 가지라. 하나님은 무엇에든지 옳으시다. 그러므로 옳은 것을 생각하고 올바른 삶을 살라.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속여 빼앗는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둘 다 죄로 인해 그 형상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온전한 형상까지 지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7:16). 어그러진 육체가 맺는 열매는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죄의 목록과 같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갈 5:19-20).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맺는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다(갈 5:22-23). 전자를 맺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갈 5:21). 후자의 열매를 맺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이다. 당신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