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영화 대사 중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대사가 있다. 수년간 종처럼 수발든 부하를 합당한 이유 없이 죽이려 하자 그가 ‘나에게 왜 그랬어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어요?’라고 물었을 때 한 말이다. 모욕, 그게 뭐가 그리 큰 죄길래 하나님은 그를 죽이실 뿐 아니라 영원한 불못에 던져버리시는 걸까?

한글 성경에 “모욕하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 역본에 “욕설하는 사람, 비방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revilers”로 번역되었다(NASB, ESV, KJV). “언어폭력”을 의미하는 “verbally abusive”(HCSB, NET), “비방하는 자들”을 뜻하는 “slanderers”(NIV)로 번역하기도 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모욕하는 자”를 “남을 헐뜯는 사람”이라고 번역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모욕은 다른 사람을 말로 욕하고 깎아내려 그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쉽게 말로 누군가를 욕한다. 운전하면서 상식 밖의 상황을 만날 때 당신의 입에서 모욕이 쉽게 튀어나오지 않는가?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라고 말했다(약 3:2).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다(약 3:8). 모욕하는 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모욕은 한마디 말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때로 엄청난 영향력을 갖는다.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순식간에 태워버리듯 작은 지체인 혀는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죄를 일으킬 수 있다(약 3:5-6). 몸에 난 상처는 오랜 세월이 지나 거의 사라지지만, 말로 받은 마음의 상처는 죽을 때까지 아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야고보는 혀의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라고 말했다(약 3:6).

당신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물론 치명적인 모욕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모든 사람이 밥 먹듯 하는 모욕까지 다 죄라고 말한다면 너무 기준이 과하지 않은가?

첫째 질문: 모욕은 왜 죄인가?

실제로 사회에 세워진 법의 기준을 보면 누군가를 모욕했다고 해서 무조건 모욕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평가를 해할 때”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러므로 모욕죄로 누군가를 고소하려면 실제로 사회적인 평가가 얼마나 안 좋아졌는지 입증해야 한다. 연예인의 경우 악플러를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 고소하는데, 그들의 평판은 상대적으로 계산하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일반인인 경우 추상적인 명예나 평판이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계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를 욕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이는 실제로 어떤 손실을 봤기 때문이기보다 기본적으로 인권을 침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 말을 할 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은 공분에 사로잡힌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모욕을 기분 나쁘고 옳지 않은 일이라 여기는 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존중받아야 하는 권리가 있다. 당신은 이 말에 동의하는가?

문제는 하나님을 빼고 인권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인권, 과연 인간의 기본적인 존중받을 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세상이 약육강식의 방식으로 먼지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을 뛰어넘는 어떤 강력한 종 혹은 인간 중에서 가장 월등하다고 믿는 종족이 나머지 종족을 제거하고 우세한 종자로 세상을 채우는 것을 지향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 어렵다. 히브리대학의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인간 종족을 제거하고 살아남은 우세한 종족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무신론을 기반으로 논지를 펴는 하라리 입장에서는 비슷한 일이 오늘날 발생해도 도덕적 책임을 물을 근거를 찾기 힘들 것 같다.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학살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지만, 히틀러가 만약 나치즘으로 세계를 정복했다면, 그에게 모욕당하고 죽임당한 자의 인권을 찾을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흥미롭게도 성경은 모욕의 문제를 다루면서 동시에 인권이 어디로부터 나는지 분명히 밝힌다. “이것으로(혀)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9-10). 입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저주가 나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왜냐하면 저주의 대상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권은 하나님이 부여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모욕이 죄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평판을 해치기 전에, 실질적인 손해가 얼마인지 계산해보기 전에, 마음이 얼마나 상했는지,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헤아려보기 전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근거가 우리가 하는 모든 모욕이 죄가 되게 한다.

둘째 질문: 모욕은 왜 천국에 못 들어갈 정도로 큰 죄인가?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모욕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라고 못 박았을까? 사실 모욕이 지옥에 던져질 죄라고 먼저 말씀하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을 잘 알고 있던 이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5:21-22). 형제에게 라가(“바보, 멍청이”의 뜻을 가진 아람어 욕) 혹은 미련한 놈이라고 모욕하는 자에게 살인과 마찬가지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는 살인과 모욕이 똑같은 죄라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써서 주신 율법을 보면 살인한 자와 모욕한 자를 같은 형벌로 처벌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맞다. 하나님께는 살인과 모욕이 똑같은 죄다. 같은 무게를 가진 죄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에 미치지 못하는 죄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쉽게 저지르는 실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잘못의 경중을 판단할 때, 죄의 무게를 측정할 때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를 논할 때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순위를 매긴다. 이번 칼럼 시리즈 제목처럼 “누가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연쇄살인범과 같은 0순위 죄인부터 시작하여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갈 만한 죄인을 쭉 세워놓고 나머지는(자신을 포함하여) 그래도 안전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하지만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 앞에 모든 죄는, 물론 경중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미치지 못할 만큼 치명적이고 파괴적이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모욕은 살인만큼 심각한 죄는 아니지만, 지옥 불에 들어갈 만큼 심각한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리를 영원히 다스리실 왕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모욕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혀를 가진 우리가 지옥 불에서 나와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방법은 과연 존재하는가?

입술이 부정한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이사야 6장에는 하나님 나라 보좌에 앉아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참으로 놀랍게 묘사되어 있다.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고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며 그분을 모시고 있는 천사들이 자기 눈과 발을 가리고 입을 열어 계속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화답하며 찬양하는 장면이다. 그 광경을 보던 선지자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탄식한다. 우리가 바로 그런 심정이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또 거룩하신 하나님 나라에 부정한 입술을 가진 우리가 절대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천사 중 하나가 제단에서 집은 숯을 가지고 입술에 대며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라고 말해주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 부정한 입술을 가진 사람, 선지자 이사야에게 다가오셔서 제단에 핀 숯을 통해 그의 죄를 사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입이 되게 하셨다.

바로 그런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모든 모욕하는 입술을 가진 우리에게 베푸셨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제단에 올라 죄인을 대신하여 돌아가셨을 때, 죄를 사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에게 주어졌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신 분이다(벧전 2:22). 그런 예수님의 거룩하심이 믿는 자에게 옷 입혀졌고, 그들의 더러운 죄는 그리스도께서 모두 안고 죽음으로 제거하셨다.

그러므로 입술이 부정한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우리는 착한 말을 많이 하는 행위로, 모욕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노력으로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살면서 나 또한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절대로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는 없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에, 단 한 마디의 어두운 말도 하나님과의 사귐을 막는 데 충분하다(요일 1:5).

한 가지 또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단지 그분의 의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입술에 댄 제단의 숯이 실제로 그의 입술을 하나님 말씀을 전달할 도구가 되게 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의 입술을 변화시키신다. 모욕이 아니라 선한 말을 내게 하신다. 거짓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게 하신다. 베드로는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고 말했다(벧전 4:11). 그리스도께서 우리 입술을 주장하셔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말을 내게 하신다. 그래서 베드로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말씀을 결론지었다(벧전 4:11). 부정한 입술을 가진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내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 입에 모욕을 달고 산다면, 우리는 그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보기 어렵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착지를 하나님 나라로 바꾸셨다면, 지금 그의 입술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한다. 말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 순종하게 하고 제어하게 만드는 것처럼(약 3:3), 자기 입에 그리스도를 물려 무엇을 말하든지 그분께 순종하고 그 기쁘신 뜻에 따라 말하는 자,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어 하나님 나라에 담대히 들어가는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