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 중에 술 취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조금 당황스럽다. 술은 단지 기호식품이 아닌가? 하지만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자로 포함한 사람은 ‘술 마시는 자’가 아니라 ‘술 취하는 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술 취하는 자”(μέθυσος)는 NASB와 ESV 성경에 drunkard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술고래”, “술꾼”을 의미한다. 적당히 술을 통제하며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술의 지배를 받는 자, 상습적으로 술에 취해 술의 통제 아래 있는 자를 가리킨다. 스스로 술을 줄이거나 조절하거나 금주할 수 없으니 술 중독이라 말할 수 있겠다.

첫째 질문: 술 취하는 것은 왜 죄인가?
그러면 술 취하는 것이 왜 죄인가? 술을 자주 마신다고 해서, 남들보다 조금 많이 마신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까지 문제인가?

집안에 심각한 술 중독에 빠진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술이 가져다주는 파괴력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통제하지 않고 들이붓는 술은 당사자의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삶 전체를 무너뜨린다. 술에 취하면 술이 사람을 지배한다.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술이 통제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노아는 술에 취해 벌거벗었고(창 9:21), 룻은 술에 취해 자기 딸들과 동침했다(창 19:30-35). 가장 귀한 지혜를 담은 잠언에서 포도주는 종종 사람을 “거만하게 하는 것”, “떠들게 하는 것”(잠 20:1), “부하게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잠 21:17; 23:21)으로 소개한다. 그래서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경고한다(잠 23:20). 술 취하는 것은 “재앙”, “분쟁”을 가져오고, “까닭 없는 상처”와 “붉은 눈”을 만든다(잠 23:29).

성경에 술 취함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구절이 있다면 바로 잠언 23장 31-35절일 것이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으면 눈에 괴이한 것이 보인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한다. 사리 분별을 제대로 못 한다는 말이다. 감각이 둔해지면서 사람이 때려도 아프지 않다고 착각하고 괜히 시비를 걸고 다투기도 한다. 이런 일을 겪으면 다시는 술을 찾지 않거나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건만, 술 취하는 자는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라고 말한다. 술의 통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음주운전으로 무고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지나가는 사람을 폭행하고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더욱 분노한다. 과실치사와 폭행을 일으킨 주범은 자신이 아니라 술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술의 지배와 통제를 받도록 내버려 둔 행위가 결코 가볍지 않은 죄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결과까지 낳지 않는다 해도 술에 중독된 사람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끼친다. 가족과 이웃을 먼저 사랑으로 섬기기보다 술을 먼저 섬기게 된다. 그렇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아무리 자기합리화를 하려 해도 오랜 세월 반복하여 지속적인 고통을 받은 주변 사람은 술이 원수라고 말한다.

둘째 질문: 술 취하는 것은 왜 천국에 못 들어갈 정도로 큰 죄인가?
그러면 술 취하는 자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나님은 왜 그를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하시는가?

술 취하는 것이 술의 “통제”를 받는 것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명령한다(엡 5:18). 술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통제를 받으라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 모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신 6:5; 마 22:37). 앞에 나오는 마음, 뜻, 힘이 의미하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은 단지 지적인 행위나 감정적인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 정, 의가 모두 포함된 전인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영역이 온전하게 하나님께 헌신 되기를 요구하신다. 가장 지혜로웠던 왕 솔로몬은(그가 위에 나오는 잠언을 많이 지은 자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전 12:13).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통제받도록, 그 말씀대로 살도록 지음 받았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하지만 사람은 일찌감치 하나님의 통제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선악과)를 먹음으로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고 선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생은 행복하지 않다. 사람은 자기를 통제할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는다. 예수님은 이런 결핍된 사람의 인생을 가리켜 ‘목마른’ 삶이라고 말씀하셨다(요 4:14).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 대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섬기며 산다(요일 2:16). 권력이나 부, 쾌락이나 명예를 좇아 산다. 그중에 술이 있다. 하나님의 통제 밖으로 뛰쳐나와 무언가 자기를 지배할 대상을 찾는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술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신을 찾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셨다(렘 2:13).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웅덩이를” 팠지만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었다(렘 2:13).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통제 아래 가장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똑같은 문제가 생긴다. 사람은 생수가 없어 언제나 목마르고, 갈증을 채우기 위해 여러 가지를 찾지만,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이 그렇고, 술이 그렇다. 잠시 쾌락을 주고 기분이 좋게 만들고 일시적 만족을 줄지 모르나, 영혼의 공허함을 흡족하게 채우지는 못한다.

문제는 인생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모든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 솔로몬은 이렇게 전도서를 마친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지옥,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을 결정하는 재판관 자리에 하나님이 앉아 계신다. 그리고 당신이 그 앞에 서게 된다. 모든 행위,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때, 계속해서 하나님 대신 술을 섬기는 살았다면 어떤 평가를 받겠는가? 하나님이 아니라 술의 통제를 받는 삶을 살았다면 어떤 판결을 받겠는가?

술 취하는 자는 단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술에 중독되어서, 술로 인해 남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주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술의 통제를 받아 항상 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곧 하나님의 통제 밖으로 벗어난 상태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대체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것이다.

술 중독, 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술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시 모든 사람의 본분인 하나님의 통제 아래 들어가 사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에베소서 5장 18절로 돌아가 보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하하는 것을 금하는 것만으론 해결되지 않는다. 뒤에 따라오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이 핵심이다. 중요한 것은 “받으라”는 말이 적극적인 표현이지만 동시에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라는 것이다(“be filled with the Spirit”, NASB). 즉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해주실 때, 술 취함, 술의 지배를 받는 삶을 끊어낼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술을 끊는 행동의 변화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변화는 알코올 클리닉 등을 통해 극복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꾀하는 변화는 전인적 변화다. 술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것으로 영혼의 갈증을 채우려는 사람이 그 터진 웅덩이들을 버리고 다시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는 변화, 그래서 본분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오직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삶을 살도록 하는 변화를 말한다.

그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하나님 아버지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목마른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올 수 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섬긴 무거운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모두 치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요 14:6).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하나님께 구하여 성령을 그를 믿는 자에게 보내셨다. 그래서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믿는 자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신다. 아들의 영광,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믿는 자 안에서 계속해서 충만하게 나타내심으로 믿는 자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하신다. 술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도록, 그것들의 통제와 지배를 끊어낼 수 있도록 능력과 의지와 욕구와 힘을 더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 안에서 일으키시는 참된 변화, 전인적 변화이다. 이런 변화가 그 사람의 종착지가 영원한 천국임을 확증한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양자의 영”, 성령의 역사가 분명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5-17).

성경은 술 마시는 행위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도들과 예수님도 술을 종종 마셨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두고 많은 논쟁을 벌이고 실제로 술을 마시는 행위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도 적지 않지만(아무렇지 않게 습관적으로 술에 취한 그리스도인들도 많지만), 정작 핵심을 놓친 것 같아 안타깝다.

중요한 것은 누가 지금 나를 통제하고 있느냐이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통제하고 계신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해서 당신 속에서 보고 그분을 경외하며 뭐라고 말씀하시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양심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행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완전한 금주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해 절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천국에 들어가는 자라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라면, 술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충만한 통제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삶을 살 것이다. 그런 자에게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막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