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을 부리는 자”(πλεονέκτης)는 ‘원래 가져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BDAG). 신약성경에 이 단어는 “탐하는 자”(고전 5:10, 엡 5:5), ‘탐욕을 부리는 형제’(고전 5:11) 등 네 군데서 욕심이 많은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고전 6:10 포함). 성경은 또한 욕심의 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한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욕심이 과하면 끝내 해를 입는다는 것은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인정하는 인생의 법칙과 같다. 욕심이 과하면 자신에게도 해롭고 결국 타인에게도 해를 끼친다. 그런데 ‘과하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원래 가져야 하는 것’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가?
초등학교 때 매일 학교에 오가는 차비는 70원 정도였고, 부모님은 차표(당시엔 차표가 있었다) 두 장과 함께 목에 걸린 동전 주머니 속에 몇십 원의 비상금을 넣어주셨다. 16명가량 되는 소규모 시골 학교 학급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어쩌다 비상금과 함께 차표를 매점에 팔아야만 집으로 십 리가량 걸어오며 먹을 수 있는 과자를 항상 마음껏 먹었다.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그런데 이게 욕심일까? 과한 욕심일까? 정말 이 정도의 욕심도 죄란 말인가?
첫째 질문: 탐욕을 부리는 것이 왜 죄인가?
성경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라고 말한다(딤전 6:8). 잘못 이해하면 이 말씀은 그 이상을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 혹은 ‘탐욕을 부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원하는 것’ 자체가 욕심 혹은 탐욕이 아니란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원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죄를 낳을 만큼 강력하게 원하는 것, 그것이 죄다. 야고보 말씀에 따르면 욕심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욕심이 잉태한 것이 죄다.
초등학생이 맛있는 과자를 먹고싶어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그 원함이 점점 커져 결국 부자 아이를 때리고 과자를 빼앗아 먹는 데까지 나아갔다면, 그것이 죄다. 그런데 폭력과 갈취만 죄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 정도로 커져 버린 욕구가 겉으로 드러난 죄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인까지 나아간 강렬한 욕구를 첫 번째 책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부부, 아담과 하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농사하는 가인, 둘째는 양을 치는 아벨이었다. 둘은 각각 자신이 수고한 것을 가지고 여호와께 제물로 바쳤는데, 여호와께서는 둘째 아벨과 그의 제물만 받으셨다. 그걸 본 가인은 안색이 변했고 분했다(창 4:1-6).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불공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제물도 하나님이 받으셨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하나님은 그의 판단이 틀렸음을 밝히셨다. 하나님은 그의 제물을 이유 없이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가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않으신 것이다. 그리고 가인은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 그리고 잘못된 욕구를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욕구를 키워 결국 살인이라는 죄를 낳았다(창 4:8). 중요한 것은 살인이라는 죄를 낳기 전에도 하나님은 그의 마음속에 커가고 있는 욕구를 죄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폭발하는 분노는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욕구에 사로잡혀 일어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사고가 정지되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릴 능력을 상실한다. 앞서 우리가 다룬 여러 가지 죄의 문제 즉 음행, 우상숭배, 간음, 동성애, 도적 모두 욕심이 잉태하여 낳은 죄들이다. 음행은 성적인 욕구가 다른 어떤 것보다 커져서 낳는 죄,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무언가를 하나님처럼 숭배하고 간절히 원해서 낳은 죄, 간음과 동성애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 밖에서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죄, 도적은 자기 유익을 너무나 간절히 원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죄다. 결국 모든 죄는 탐욕이 낳은 자식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언가를 원하는 것 자체를 죄로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이 명백한 죄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무언가를 원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 원함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 데까지 자라지 않도록 다스리고 통제해야 한다. 욕구(-하면 좋겠다)는 언제든지 쉽게 요구가 되고(-해야만 해)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죄를 낳기 때문이다.
둘째 질문: 탐욕을 부리는 것은 왜 천국에 못 들어갈 정도로 큰 죄인가?
탐욕은 ‘죄를 낳기까지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탐욕의 대척점에 서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왜 탐욕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로 천국에 못 들어갈 정도로 심각한지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마 22:37). 이것은 십계명의 전반부를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나아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0:37-38). 무슨 말인가?
욕구를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장 큰 갈망과 욕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모와 자식보다 더, 자기 목숨보다 더 하나님을 원하고 바라고 갈망하고 사랑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탐욕의 대척점에 계신다. 죄를 낳기까지 무언가를 강하게 원한다는 건 결국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욕구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탐욕은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다.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탐심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재물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겠는가? 예수님이 문제로 삼으신 것은 “재물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똑같이 사랑하고 바랄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우선순위에 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더 원하면 재물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통제될 수 있다. 하지만 재물을 더 원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재물에 대한 욕구가 지배한다.
이런 측면에서 사람의 마음은 욕구의 전쟁이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욕구와 자기 육체가 원하는 여러 가지 탐욕의 전쟁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전쟁을 생생하게 잘 묘사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2-25)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는 자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원하고 바라는 자들, 영원토록 그분을 기뻐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금하신 죄를 낳기까지 하나님보다 자기 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 들어가는데, 탐욕을 부리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다른 오만 가지를 겸하여 섬기려는 자이기 때문에, 결코 그들은 하나님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질문: 욕심을 버리는 비결은 무엇인가?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난다는 걸 알기에,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는 마음을 얻으려 애쓴다. 특히 불교에서는 유한한 인생을 생각하며 집착을 버리면 욕심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욕심을 잘 통제한다고 해서 욕심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구 전쟁이 종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사도 바울이 말한 내면의 욕구 전쟁은 계속된다. 전투에서 패배한 결과는 어떨까? 전쟁은 끝내 누구의 승리가 될 것인가?
기독교는 어쩌면 불교와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은 유한하고 이 땅은 심판을 받을 것이니 땅의 것에 집착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니 말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불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기독교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해결자를 제시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욕구 전쟁을 토로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노래했다(롬 7:25). 그리고서 그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외쳤다(롬 8:1-2).
불교는 각종 훈련과 고행으로 자신의 욕구와 맞서 싸우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해결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갈 5:24).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 육체에서 일어날 모든 탐욕의 죄책을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신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탐욕과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는 보장되었다.
동시에 해결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육신의 욕구와 싸워 이기게 하신다. 날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구 전쟁에서 우리는 자기 힘으로 싸우지 않는다. 해결자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신 강력한 욕구를 따라 살 때 우리는 실제로 탐욕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살 수 있다. 전쟁의 승리가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그 나라에서 궁극적으로 얻기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평안하고 안락한 삶, 엄청난 보상 혹은 끔찍한 지옥을 면하는 것 등이 최우선순위에 있는 경우다. 하지만 천국이 평안하고 안락한 것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원하는 마음과 탐욕의 전쟁이 마침내 끝이나 이제는 그토록 바라고 사랑하고 갈망하던 하나님을 보상으로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이 모든 탐욕과 싸우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더 얻기 위해, 더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산다. 그리고 우리에게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유익한 건, 마침내 모든 탐욕과의 전쟁을 끝내고 영원히 원 없이 그분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만족 혹은 자족의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다. 단지 인생의 비극적인 유한함에 대한 반응으로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욕심의 실체를 부인하거나 집착을 버리는 훈련을 통해 억지로 자족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만족이 참된 만족이 될 수 있는 건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을 놓았을 때 얻을 수 있는 분이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골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