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도둑)은 행위와 그 행위자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따위의 나쁜 짓, 또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표준국어대사전). 성경에서 도둑은 여러 단어로 표현되는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는 사람으로 소개된 도둑(κλέπτης)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마 6:20; 눅 12:33, 39; 요 10:1, 8; 12:6). 성경이 말하는 도둑의 특징은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 수 없게 와서(마 24:43) 남의 물건을 훔치고 빼앗기 위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한다(마 6:19). 예수님은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0:10).
어렸을 때, 충격적인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집에 포인터라는 견종의 개를 여러 마리 키운 적이 있었는데, 밤중에 도둑이 와서 몽땅 훔쳐 간 것이다. 도대체 왜 철문을 넘어 들어와 쇠창살을 뚫고 그런 짓을 했을까? 과거엔 도둑이 들면 감춰둔 귀금속을 훔쳐 갈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값비싼 전자기기 예를 들어 TV를 들고 가기도 했다. 도대체 왜 그 무거운 브라운관 TV를 들고 갔을까?
도둑이 도둑질하는 구체적인 목적을 다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목적은 너무나 명확하다.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다. 개를 팔거나 TV를 자기 집에 가져다 두거나 도둑은 자기가 훔치고 빼앗은 남의 물건을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한다. 요즘엔 무거운 물건을 직접 들고 나르는 도둑이 드물다. 하지만 신종 도둑질 가령 보이스피싱, 불법도박, 각종 기발한 사기 수법으로 남의 재물을 노리는 이들이 많다. 국가 전체가 바이러스와 싸우는 시국에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을 대상으로 도둑질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건 참 기가 찬 일이다.
첫째 질문: 도둑은 왜 죄인가?
그러면 왜 도둑이 죄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남의 물건을 빼앗고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웠으니 말이다. 어떤 엄마도 자기 아이가 친구 물건을 훔쳐 왔을 때 ‘친구가 물건 간수를 잘했어야지, 잘했어, 기회를 아주 잘 노렸어’라고 칭찬하지 않는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법은 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기본적인 법에 해당한다(출 20:15). 이 법은 개인의 소유권을 전제한다. 개인은 각각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재물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용납할 수 없다.
도둑질은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하고 손해를 끼친다. 만일 도둑질이 죄가 아니라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누구든지 원하는 것을 무슨 수단을 동원하든 빼앗고 훔쳐도 괜찮은 세상을 상상해보라. 미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광란의 약탈 현장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모든 곳에 벌어지지 않겠는가? 이웃과 이웃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서로 위협하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도적이 죄라는 사실은 굳이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히 죄라고 모두 동의할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둘째 질문: 도둑은 왜 천국에 못 들어갈 정도로 큰 죄인가?
예전엔 “서리”라는 것이 있었다. 수박 서리, 참외 서리처럼 과일을 주인 몰래 따 먹는 행위를 가리킨다. 일종의 도둑질인데, 과거엔 주인이 인심 좋게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했다. 성경에는 추수를 하다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한 곡식을 나그네와 고아,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는 말씀이 있다(신 24:19). 사실 그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해 배려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특별한 율법은 모두 주인에게 약자를 배려하고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서리하는 사람이 훔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밭에 당연히 곡식을 놔두고 갈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둑질을 논할 때 우리는 위에서 말한 원칙에 어긋나는 현상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불법 다운로드로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를 공짜로 보면서 많은 돈을 벌거나 소유하고 있을 주인이 나 같은 사람이 훔쳐서 보는 이 행위 하나로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한다. ‘천만이 봤으면 벌 만큼 벌었으니 이렇게 봐도 괜찮지’라고 합리화한다. 어쩌면 당신도 어느 정도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불법 스캔하여 올린 만화책을 보거나 소프트웨어를 설치하여 사용하는 것, 어떤 종류의 도둑질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많은 사람이 손쉽게 행한다.
왜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어떤 종류의 도둑질에는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경우엔 거의 모든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도둑질을 하는 현상. 뭔가 모순적인 이 현상은 우리가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각자가 생각하는 도둑질의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넘지 않으면 죄가 아니란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법을 교묘하게 피하거나 법이 강력하게 처벌하지 않는 부분에 도둑질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대부분 생각하는 도둑질의 기준이 법이 규정하는 수준 언저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법이 없었던 시절 예를 들어 부족 국가 시절엔 도둑질의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약육강식의 법대로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의 것을 빼앗을 때 무엇을 근거로 죄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신론자는 우주 만물이 자연법칙에 따라 약육강식의 법대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고 주장한다. 우세한 종족이 열세한 종족의 자원을 빼앗고 훔쳐 강력한 종족을 보존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둑질은 생명이 지속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일 뿐 죄가 아니다. 물론 현대사회 자행하는 도둑질을 지지하는 무신론자는 드물겠지만, 적어도 만물의 탄생과 성장의 원리를 설명하는 무신론자의 논리엔 도둑질이 왜 죄인지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국가의 도둑질 곧 개인의 사유재산을 국가가 모조리 빼앗고 훔쳐 마음대로 나눠줄 수 있다는 사상은 철저히 무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도둑질이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신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신다(마 6:8; 행 17:26). 그래서 주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라고 명령하신다(딤전 6:8; 히 13:5). 그리고 타인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출 20:15). 도둑질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타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훔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타인의 물건을 훔쳐 그에게 손해를 끼친 부분만 생각한다(수평적 관계). 하지만 도둑질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수직적 관계).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다른 이에게 주신 재물을 훔치는 것이다.
법은 당신의 도둑질을 발견할 때도 있고, 발견하지 못할 때도 있다. 법은 당신의 도둑질을 강력하게 처벌할 때도 있고, 처벌하지 않을 때도 있다. 심지어 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다(어쩌면 언젠가 법 없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토록 졸거나 주무시거나 간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모든 종류의 도둑질을 죄라고 말씀하신다. 도둑질이 죄인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적은 왜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갈 정도로 큰 죄인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을 어기기 때문이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욕심) 하나님을 무시하고 반역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을 가리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엡 2:3). 자기 욕심을 위해 기꺼이 하나님께 반역하는 진노의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이 도둑질에서 손 씻으려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진노의 자녀가 도둑질하는 건 그들의 육체의 욕심을 따른 열매이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자족하는 마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사랑으로 공급하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경건한 삶의 비결이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 없이 태어나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인생, 결국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생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도 하시고 취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아주 기본적인 것들 가령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우리는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그거라도 있으면 감사한 줄 알라’는 식의 권면이 아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공급하신 것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우리의 눈은 금세 타인이 가진 것을 향한다. 우리의 손은 타인이 가진 것을 향하여 뻗는다. 우리의 마음은 탐심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타인의 것을 갖기 위해 우리는 뭐든지 한다. 결국 자족하는 마음이 도둑질에서 손 씻는 비결이다. 당신은 범사에 감사하고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감사의 삶, 범사의 삶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이 요구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찔끔찔끔 공급하시는 구두쇠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시기를 너무 아까워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냐고 우리에게 묻는다(롬 8:32).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분이 우리에게 다른 것을 주시기를 아까워하시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코로나 19 사태 속에 교회가 모이는 것을 우려하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헌금을 비방하는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다. 교회가 모이려는 이유는 사람들의 돈을 도둑질하기 위해서라는 비방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나라 백성의 돈을 억지로 빼앗거나 훔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항상 욕심이 가득한 도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자족할 수 있도록 만드시기 위해 아들을 주셨다.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시고 그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재물(헌금)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자발적인 표현이다. 아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보물을 땅에 쌓아두기보다 아들이 계신 그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다(마 6:20).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를 맞아 주시는 그리스도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만족과 기쁨을 주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그리스도 앞에 앉아 이 땅에 있을 때 우리에게 주셨던 것들에 얼마나 만족하고 감사했는지 결산하면서 타인의 것을 탐내고 도둑질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탄식하며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마땅히 이 땅에 나그네로 있을 때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도둑질에서 손 씻는 최고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