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색”(ἀρσενοκοίτης)은 앞서 나온 “탐색”과 더불어 ‘동성애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파트너와 소극적인 파트너’ 둘을 모두 가리킨다. 우리말 성경은 그래서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했다. 또한 새번역은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로 번역했고, KJV 흠정역은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라고 번역했다. 신약성경에 오직 두 번 사용된 이 단어는 고린도전서 6장 9절뿐만 아니라 디모데전서 1장 10절에서도 여러 성적인 범죄 목록 가운데 “남색 하는 자”로 언급되었다. 성경이 남성을 대표로 표현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여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여자’도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에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성애가 왜 죄인지 살펴보았다. 하나님을 부정하더라도 동성애는 개인의 주관적, 감정적, 사회적인 이유로 대다수가 수용한 생물학적인 사실을 전면 부정하기 때문에(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순리가 아니라 역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인 피해를 준다. 성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고 다수가 그 비용과 책임을 부담해야 하고, 악용되거나 인구 소멸에 이르기까지 큰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만일 성경의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인정하면 동성애는 명백한 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동성애를 ‘가증한 일’로 보시기 때문이다(레 18:22, 29; 신 22:5; 롬 1:26-27, 32; 고전 6:9-10).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는 “탐색” 그리고 “남색”하는 자 모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두 번이나 반복하며 못을 박는다. 왜 그럴까? 왜 동성애가 그렇게 큰 죄일까?
둘째 질문: 남색은 왜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갈 정도로 큰 문제인가?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뜻밖의 회심”에서 “그리스도인을 경멸했던” “레즈비언 영문학자”였던 그녀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놀라운 간증을 들려준다. 그 간증 속에서 그녀는 대다수 크리스천이 동성애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자신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어떤 편견을 가지고 대했는지 몇 차례 뼈 있는 말을 했다. 그녀의 말처럼 구토반사(동성애자들의 성행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죄의 심각성과 더러움을 부각하는 행위)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유혹을 받는 사람에게도 유익하지 않다. 동성애가 겉으로 많이 드러나고 평생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음행과 우상숭배, 간음도 동성애만큼이나 큰 죄다. 그러므로 동성애자에게 어떻게 그런 유혹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런 죄를 범할 수 있는가?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
세리와 같이 자신의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동성애자 앞에선 마치 바리새인처럼 ‘적어도 저는 저 동성애자만큼 더럽지는 않습니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음행, 간음, 도적질, 탐욕, 술 취함, 모욕 등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바울은 말했다. 동성애가 다른 죄보다 더 크고 혐오스러워서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죄라서 못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 자신이 힘겹게 싸우고 있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동성애를 더 크고 무거운 죄로, 그래서 그런 유혹이 없는 자신이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 손가락질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 하나님이 ‘가증한 일’로 보신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동성애는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막강한 파괴력을 가진 죄다. 어떤 사람은 동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끌리는 성향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책임이 없거나 책임을 덜 수 있다고 말하지만, 같은 논리로 특정 연령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 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쉽게 분노하는 성격, 자기연민을 많이 느끼는 성향 등을 타고난 것으로 보고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타고난 것이든 후천적으로 생긴 성향이든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신 것은 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배가 고픈 것은 죄가 아니다. 시장할 때 열매를 따 먹는 것도 죄가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 통제하라고 하신 것을 어기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 동기가 굶주림이든 단순한 호기심이든 상관없다. 누군가의 권함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 말씀하신 원칙을 자기 의지로 선택하여 어긴 것이다. 바로 그것이 죄다.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는 피조물의 반역 행위이다.
사실 모든 죄가 그렇다. 죄를 범하는 과정이 똑같다. 정욕에 사로잡히고, 하나님과 그분의 법을 무시한다. 그리고 정욕에 따라 육체가 원하는 것을 행한다. 성적인 죄를 예로 들어보자. 한 남자가 성적인 욕구(배우자가 아닌 대상에게)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이 그것을 간음으로 보신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중심의 생각까지 아신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무시한다. 스마트폰으로 포르노그래피를 찾아본다. 한 여자가 동성애의 욕구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이 가증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안다. 하지만 자기감정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무시한다. 결국 죄를 범한다. 야고보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계속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행위 곧 죄를 짓는 사람, 결국엔 자신이 기뻐하고 원하는 것을 늘 선택하는 사람은 “사망”에 이른다.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망”은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끊어지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분 말씀에 굴복하지도 않은 사람이 장차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래서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이다(고전 6:9-10).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정도로 죄가 없는가?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 하나님 앞에 죄 하나 짓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종종 자기 욕구에 따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죄를 선택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 확신하는가?
먼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완벽한 행위를 갖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살펴본 음행,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모두 그리스도인에게도 유혹이 되고 그들을 넘어뜨리기도 하는 죄다.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해당 사항이 없는걸?’이라고 자신만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행위로는 그리스도인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 그 선하신 기준 앞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율법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한 의”가 구약성경(“율법과 선지자”)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다.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 그 선하고 거룩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값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죄인들에게 선물하신다. 그래서 모든 죄인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는 것이다. 쟁취하거나 취득한 것이 아니라 값 없이 은혜로 얻은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서 원수를 용서하며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의 대명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마의 사형틀에 누군가가 죽어가며 초인적인 인내와 용서를 보였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단지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는 건 솔직히 아름답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정말 의미 있고 사랑의 확증이라 말할 수 있는 건 모든 죄인에게 그 혜택이 실제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량”(죄 씻음)을 믿음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선물하신 ‘의롭다 하심’이 주어진다. 이것이 참된 복음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건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음행 죄를 범할 수 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숭배하는 죄를 지을 수도 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을 수도 있고, 동성애 유혹을 받거나 실제로 탐색과 남색의 죄에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라의 문을 열고 그들을 받아주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들을 맞아주시며 그들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음을 영원히 확증하시기 때문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독생자를 죄인을 위해 내어주실만큼 깊고 높고 넓은 사랑을 은혜로 베풀어주셨다(롬 5:8).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동성애자를 비롯하여 여러 죄인을 바라볼 때 상대적 우월감을 가질 수 없다. 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할 때, 그리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죄의 문제를 생각할 때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의’를 ‘자기 의’로 삼는 것은 율법주의라는 이단적인 행동이다. 항상 값 없이 은혜로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항상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은 다시 죄를 즐길 수 없다. 죄를 지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도박 중독에 빠진 자식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다시 도박장을 찾지 않는다. 물론 죄의 유혹이 너무 강렬하여 자주 넘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회개하고 다시 사랑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좇아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진실로 그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죄를 사해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의롭다 하신 자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데까지 은혜는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은혜로 하나님의 의를 얻은 자, 참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자 곧 은혜를 거부한 자와 똑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은혜가 그렇게 살 수 없게 만든다.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강력하게 붙들어 죽고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 내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 확신을 가지고 은혜 얻은 자처럼 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