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를 위한 것이다. 물론 팔복의 대상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마땅히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마음이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 또한 그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6절)가 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칼럼 시리즈에서 계속해서 강조한 것처럼, 위에 언급한 복을 받는 자는 그들의 힘이나 노력이나 의지나 바람으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복을 쟁취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다. 간혹 일시적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성품을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자랑한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척하는 건 언제나 가식적이고 혐오스러운 꼭두각시놀이와 같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사람의 마음, 그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온갖 더러운 것을 똑똑히 보시기 때문이다(렘 17:9; 마 15:19; 시 139:2).
팔복을 올바르게 적용하는 사람은 첫째, 모든 복과 화를 내리시는 심판주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날 때부터 죄인인 자신에게 내려질 것이 오직 화라는 것을 알고 자기 힘으로 그 판결 결과를 도저히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겸손히 그 아들에게 입 맞추고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한다(시 2). 그럴 때에야만 둘째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주권적인 뜻대로 죄인의 자리를 대신 취하여 그 죗값을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영접하여 그분과 연합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럴 때 팔복의 요구사항이 삶 속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조금씩 닮아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심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한 자의 온전한 본이 되셨다(히 5:8). 예수님은 죄인의 견고한 마음과 그에 대한 심판을 바라보고 애통하게 여기셨다(눅 19:41). 예수님은 자기를 낮춰 죽기까지 복종하실 정도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다(마 11:29; 빌 2:6-8). 예수님은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긍휼을 베푸셨고(마 9:36; 14:14; 15:32), 그 마음에 거짓이 조금도 없으신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셨다(벧전 2:22).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수직적 수평적 화평을 가져오신 분은 예수님이시고(엡 2: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오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의에 주렸을 뿐 아니라 그 의를 위해 박해를 받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복음이 참으로 아름답고 고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복과 화를 내리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의의 기준을 요구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죄인이 절대로 취득할 수 없는 의가 되어 주셨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의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친히 본이 되어주셨다는 것이다. 모세처럼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어떤 신이 이토록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과 가까이하시며 큰 능력이 되어주신단 말인가?(신 4:7).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친구라 불러주시고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 항상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간구하고 필요한 능력을 부어주시는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시작한 이들은 그분을 위한 박해를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다(행 5:41).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
앞에서 말한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처음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라고 하시고는 11절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박해하고”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옳은 것, 의로운 것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옳은 것을 위해 박해를 받는 이들은 세상에도 많다(이단들도 자신들의 거짓 교리를 위해 받는 모든 어려움을 ‘고난’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의를 위해 받는 고난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이다. 단지 옳고 그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 때문에 고난을 받기 원하는 것이다. 또 주목할 것은 “박해를 받은”이란 동사의 형태다. 수동태 완료형으로, 누군가에 의해 강압적인 박해를 받는 것을 가리키고, 일시적으로 받는 고난이 아니라 계속해서 박해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절 마지막에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과거 한두 번의 박해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언제든지 욕을 받고, 박해를 당하고, 모든 악한 말을 들을 위험에 노출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왜 박해를 받는가?
그러면 도대체 왜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는가? 긍휼을 베풀고 온유하게, 겸손하게 화평을 추구하며 살려 하는 이들을 누가 이렇게 미워하는가?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미리 경고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 7:7)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도 이 점을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
사도 요한은 온 교회의 사도이자, 1세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겨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3)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박해와 비방과 욕을 받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들춰내셨기 때문이다. 빛이신 그분이 어둠 가운데 오셨을 때, 어둠은 그 빛을 반기지 않았다(요 1:5, 9-11). 자신의 어둠을 발견하고 빛으로 돌아서기보다는 빛을 제거하여 어둠 가운데 그대로 살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마 5: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마 5:16). “착한 행실”을 보고 누가 그들을 욕하고 박해한단 말인가? 그것은 우리가 “착한 행실”을 쓰레기 줍기, 구제, 자원봉사, 의료봉사, 환경보호 등으로만 제한하는 경우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질문이다.
“착한 행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행실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며, 아버지께로부터 주님께서 받아 주신 말씀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삶은 죄인의 죄를 드러내는 삶이기도 하다. 불륜을 죄라고 말하는 삶이고, 낙태를 살인이라고 말하는 삶이다. 동성애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라 말하는 삶이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들의 삶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삶, 사망이 보장된 심판받을 삶이라고 말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각 사람에게 계속해서 빛을 비추는 삶을 산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 속한 이들에게 미움과 비방, 박해를 받기에 꼭 알맞다.
하지만 그런 삶에는 엄청난 보상이 따른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냉수 한 그릇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위해 욕을 받고 박해를 받는 것을 얼마나 크게 보상하시겠는가?
정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가?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받는 소아시아 성도를 대상으로 편지를 썼는데, 거기서 그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물었다(벧전 2:20).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억울한 일이 정말 부당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지하철에서 종교활동을 하지 말라는 광고를 하는데도 전도지를 들고 복음을 외치다가 사람들의 신고를 받고 쫓겨날 때,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박해가 너무 기뻐’라고 말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 복음이 아니라 볼펜을 팔았어도 받았을 박해가 아닌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족이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좋은데, 제사를 준비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몽땅 가족의 짐으로 맡겨버리고 나 몰라라 해서 받는 고난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 교회 성도의 삶은 종교지도자들의 거센 비방과 박해를 받았지만, 동시에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행 2:47). 그들이 비방을 받은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다. 그들의 삶의 방식, 게으름, 거짓된 말과 행동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그분은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다. 욕을 당했을 때 맞대어 욕하지도 않으셨고(쌍방과실이 아니란 말이다), 고난을 당하실 때도 위협하지 않으셨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셨다(벧전 2:22-23).
팔복의 여덟 번째 복을 받을 이들이 닮아야 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이어야 한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이다.
팔복의 마무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는 말이 팔복의 마지막에 나오는 처음이자 마지막 명령어다(마 5:1-12에서). 여덟 가지 복을 제시하시면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자기를 위해 당하는 모든 일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셨다. 그것도 둘 다 현재형으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이다.
직접적인 이유는 그에 대한 보상이, 큰 상이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12절). 하지만 팔복에 걸려 있는 모든 복을 종합해보면(‘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모든 복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복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다. 하나님을 영원히 보며 교제하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자녀인 우리의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소유다.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긍휼을 풍성히 내려주실 것이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큰 상이 되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큰 상이요 복이다.
천국에서도 자기의 소유와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사람에겐 보상이 죽고 나서 주어지는 무언가이기에 현재의 삶에 큰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연합하여 팔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약속된 보상은 단지 미래의 보상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데 실질적인 힘과 동기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고, 천국은 그들에게 주어질 땅과 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언제나 그들은 긍휼이 풍성하신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복이 되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진정으로 복을 원하는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고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얻을 수 없는, 노력으로 절대로 쟁취할 수 없는, 가장 크고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을 받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분의 은혜를 구하라. 예수님을 영접하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가장 큰 복이 약속되어 있다(요 1:12). 팔복을 이미 얻은 자들이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우리가 받은 복이 얼마나 큰가! 더욱 힘써 우리가 받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자’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벧후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