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로 한 단어다(εἰρηνοποιός). 영어로는 “peacemakers”인데, 복수형으로, 이 본문 외에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는 단어다. 윌리엄 마운스는 이 단어의 의미를 “평안과 화목을 구축하는 사람”(“one who cultivates peace and concord”)이라고 설명했다.

먼저 주님께서 이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신 것은 말씀을 듣는 청자인 제자들이 여럿이었기 때문이고, 나아가 화평은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 ‘평안과 화목을 구축하는’ 역할은 모든 예수님의 제자가 힘써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 에베소 지역에서 모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힘써 지키라”라고 명령한 것이다(엡 4:3).

화평이 필요한 이유

그러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왜 우리는 화평이 필요한가? 왜 우리는 평안과 화목을 구축해야 하는가? 합리적인 설명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계 속에 화평이 없기 때문이고, 평안하지 않고 화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 주어지는 이 ‘화평’의 부재는 단순히 수평적(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사람과 하나님 사이) 관계에도 해당한다. 성경이 어떻게 이를 지지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 관계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세상과 벗 된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이다(약 4:4). 모든 죄인은 세상의 벗 된 자,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하나님의 원수다(엡 2:1-3). 그래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평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수평적 관계다. 성경은 죄 때문에 사람 사이에 화평이 사라졌다고 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충분히 그렇게 결론 내릴 수 있는 말씀이 많이 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육체가 하는 분명한 일에 대하여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열함, 투기’ 등을 언급한다(갈 5:19-20). 하나 같이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특히 ‘원수 맺는 것’은 직접적으로 화평을 망가뜨리는 일을 가리킨다. 죄는 사람 사이에 온갖 문제를 만들어낸다. 죄를 가진 사람은 서로 평안과 화목을 구축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화평’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이 맺고 있는 수평적, 수직적 관계에 화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 갈등과 분열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원수지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런 자에게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화평, 가능한 일인가?

다음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과연 우리가 화평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화평하게 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냐는 것이다.

화목한 관계를 자랑하는 부부를 주변에서 혹은 방송에서 볼 때,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들이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싸울 이유가 없더라구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부부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거나 화목이 깨지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신화를 믿지 않는다. 모든 인간관계 중 가장 끈끈하고 친밀하여 성과 재물 등 거의 모든 것을 나누는 ‘한 몸’된 부부 관계도 화평을 이루는 것이 무척 어렵다. 몇 차례 일시적인 화목을 이루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안과 화목을 선언하고 그것을 절대 변하지 않도록 영원히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원인은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에게 있다.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단절시키고, 다른 사람과 나의 화목한 관계를 무너뜨리는 건 다름 아닌 내 안에 있는 죄다. 마음에 가득한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열함, 투기’ 등을 가지고 어떻게 화목을 만들어내겠는가? 지금 화평한 관계 속에 있더라도 누군가의 말 한 마디, 표정 하나, 전해 들은 얘기 한 소절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이 내가 누리고 있는 화평의 실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선포하신 팔복의 일곱 번째 복인 “화평하게 하는 자”는 제자들이 절대로 그들 힘으로 완수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복,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복을 절대로 얻을 수 없다. 자격 미달이기 때문이다.

화평을 이루신 분

흥미롭게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제자들에게 “화평을 이루신 분”은 복을 선포하고 계신 예수님이셨다. 수직적, 수평적 관계 모두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화평을 가져다주셨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이루신 수직적 화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함한 만물과 자기의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삼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많은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을 때, 그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죄를 모두 해결했기 때문에 가능한 화목이다.

사도 바울은 또한 예수님께서 수평적 관계에 화평을 가져오셨다고 선포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이방인과 유대인(11-12절)을 가리키는데, 멀리 있던 그들은 13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그들 사이에 형성된 화평은 모든 수평적 관계에 적용이 가능하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4). 수평 관계에서 갈등을 가져오는 육체의 일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살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 금지할 법이 없는 열매를 맺는다(갈 5:22-23). 모든 수평적 관계에 화평을 가져오는 열매들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이루신 수직적, 수평적 화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을 얻는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명백히 선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려진 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이름과 호칭이 바뀌었단 걸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 왕가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는 것이다(롬 8:17).

엄청난 특권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 가문의 비밀이나 숨겨진 가족 관계가 밝혀지는 장면이 나온다. 회사 말단이었는데 알고 보니 회장님의 독자였거나, 온갖 구박과 조롱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왕의 자손으로 밝혀져 인생 역전하는 이야기다.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저런 인생의 대반전을 나도 한번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다. 현실에선 그런 대반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면, 놀랍게도 영원한 운명이 뒤바뀌는 인생 대역전의 드라마가 현실이 된다. 당신의 이야기가 된다.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곳에서 심판과 저주를 받을 사람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곳에서 사랑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과 당신 사이를 영원히 가로막을 정도로 추악하고 더럽고 파괴적인 당신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모두 담당하셨기 때문에 당신에게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주어진 선물이다.

신약시대 특별히 로마의 왕들은 자기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그에 맞먹는 권력을 휘두르며 특권을 누리려 했다.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강요했고, 거부하는 이들을 무력으로 잔인하게 죽였다. 하지만 운명이 뒤바뀌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화평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라 겸손과 섬김을 옷 입고 갈등 속에 들어가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살았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유대인을 잡아 죽이는 그리스도의 원수로서 살았지만,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나서 그는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했다. 그들 가운데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살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화평을 얻은 자의 마땅한 삶은 화평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꼭 닮은 삶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의 삶이다.

화평을 누리는 자 피스메이커가 되어라

그래서 예수님의 일곱 번째 복, ‘화평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수직적, 수평적 화목을 얻은 자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 교회 안에서 화평을 경험하는 자는 반드시 화평하게 하는 자, 피스메이커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이 맏형님 그리스도 예수처럼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먼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누려야 한다. ‘서로 사랑’(벧전 4:8), ‘서로 우애, 서로 존경’(롬 12:10), ‘서로 비판하지 않기’(롬 14:13), ‘서로 받기’(롬 15:14), ‘서로 섬김’(갈 5:13), ‘서로 짐을 지기’(갈 6:2), ‘서로 용납’(엡 4:3, 32), ‘서로 인내, 서로 기도’(약 5:16), ‘서로 연합’(롬 15:5),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히 10:24). 성경에 주어진 ‘서로’ 명령어는 그리스도 안에 한 가족이 된 사람들 안에서 얼마나 화평을 추구해야 하는지 확실히 보여 준다. 교회 안에서 신자의 삶은 피스메이커의 삶이다.

교회 밖 사람과는 아무렇게나 관계를 맺어도 될까? 어차피 남남이고 영원히 안 볼 사이니 말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은 그런 생각을 일축한다. 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행 2:47; 5:13).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에게 “외인에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라고 명령했고(골 4:5), 사도 베드로 역시 그들을 핍박하는 이들과 함께 살면서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말했다(벧전 3:11). 그리스도인은 그들을 “비방하는 자들” 중에서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한다. 그 행실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벧전 2:12).

결론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몸에 난 상처보다 가슴에 난 상처가, 얻어터진 것보다 관계가 끊어지는 아픔이 더 깊고 오래 간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분이 당한 고통의 절정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외침에서 찾을 수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에 대한 복을 선포하신 주님께서 당신과 하나님, 당신과 이웃의 관계 속에 화평을 가져오시기 위해 영원히 친밀하고 하나 된 관계가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셨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리게 된 화평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것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살 것이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 일에 오직 화평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를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를 잊지 말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