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미국 아이오와주에 있는 엠마오 성경 학교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방학 때 학교 식당이 문을 닫는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방학 기간 동안 한국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도 쉽지 않았고, 결국 기숙사에서 어떻게든 생존해보기로 했다. 길다면 긴 두 달여 동안 매 끼니를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급한 대로 아마존 웹사이트를 통해, 라면 한 박스를 구입 했고, 일주일에 한 번 지역 제과점에서 팔다 남은 빵을 학교에 와서 나눠줄 때면 나가서 줄 서 있다가 빵을 원하는 만큼 받아오기도 했다. 출석 중인 교회에서는 난민이나 노숙자에게 나눠줄 음식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원하는 음식을 가져가도록 은혜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배고팠다. 굶주림이 무엇인지 조금은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당신은 주려본 적이 있는가? 너무 배가 고파 그것이 심각하게 느껴져 몸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가 돼본 적이 있는가? 오래된 속담 중에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라는 말이 있다. 굶주리면 평소에 하지 않았던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이 배부른 사회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한국 전쟁 후에 한국은 아주 오랜 시기를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도 ‘배고픔’은 매우 익숙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로마의 군사 정치를 통해 많은 것을 빼앗기는 피지배국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부패한 유대교의 종교적 탈취로 인해 백성들은 지독한 배고픔의 문제와 싸워야 했을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채우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 가운데 예수님은 “주린 자”가 복이 있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다. 도대체 어떻게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의에 주린다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5)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고 그 결과로 “배부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배고픔과 배부름을 각각 조건과 약속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배고픔’은 음식으로 포만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강렬한 욕구를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다. 나아가 몸에 필요한 양분을 섭취하여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 하는 자연스럽고 순수한 욕구를 말한다. ‘배부름’은 그 필요가 흡족하게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한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여 배부름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참고로 ‘주리다’에 사용된 헬라어 페이나오(πεινάω)는 ‘시장하다’(마 12:1, 3; 21:18), ‘주리다’(눅 6:21)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누가복음 4장 2절에서는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느끼신 극심한 굶주림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목마르다’(디파오, διψάω)는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을 설명하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요 4:13-15; 7:37; 계 21:6; 22:17).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영혼의 목마름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영원히 해갈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팔복에서 가르치시고 약속하신 ‘배부름’ 역시 우리 영혼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다. 그냥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 예수님은 물질적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비교하시면서 물질적 필요에 대해서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6:32). 동시에 예수님은 영적 필요를 구하라고 명령하시면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여기서 예수님은 “의”에 대한 굶주림을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갈급하라.’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것을 간절히 원하라.’ 한 마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라’는 명령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신다고 노래했다(시 33:5).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노래했다(시 89:14). 다윗 역시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라고 요청했다(시 36:10). 영적으로 부패하고 심각한 지경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선지자 이사야는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라고 노래했다(사 1:27). 또한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며 그가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보존하실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9:7).
‘하나님의 의’로 성경 전체를 바라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창조-타락-구속-영원의 관점에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시기 심히 좋은 상태로(의로운) 창조하셨으나, 죄로 인해 만물이 그분의 의로우심 앞에 불의하게 되어 사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의의 보좌에서 내려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자기를 믿는 모든 죄인에게 의가 되셨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모든 불의를 심판하시고 자기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은 택하신 자들과 함께 영원히 의와 공의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스리실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는 자들에게
팔복의 말씀을 듣는 이들 그리고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의로운 자인가?” “그리스도 안에 의롭다함을 얻은 그분의 제자는 과연 그분이 온전히 이루실 의를 갈급해 하고 있는가?”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의를 참지 못한다. 불의한 일을 보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즉각적으로 알고 반응한다. 가령 지하철에서 노약자가 학생에게 사정없이 맞고 있다면,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해도 뭔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담대한 사람은 나서서 그 학생을 뜯어말릴 것이다. 소심한 사람도 마음속으론 꿈틀대는 분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의로움의 기준이 제멋대로인 것이다. 가령 인신매매로 여성을 납치하고 불법으로 성매매를 하게 만든 이들에 대하여 불같이 화를 내고 공정한 심판을 요구하는 사람도 유사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성인 영상을 즐겨 보는 일에는 관대하다. 힘들게 만든 고가의 물건을 훔친 도둑을 처벌하라고 요청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많은 수고와 노력으로 만든 저작물을 불법으로 받아 사용한다. 남이 하면 공의의 잣대를 급히 내밀면서도 내가 하면 그 잣대를 구부러뜨리고 왜곡시키려 한다. “우리는 의로운 자인가?” 솔직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는 온전히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없다. 우리의 행위가 악하므로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요 3:19).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앞에 죄인은 마땅히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의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은 영적으로 고장 난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회심의 열쇠다. 자신이 불의를 사랑하고 의를 미워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아는 자가 의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시는 그리스도께 속에서 솟아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샘물을 구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 다섯을 두고 사람들을 피해 물을 길러 나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그녀가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낱낱이 밝혀 주셨다. 그리고서야 그녀에게 영생의 샘물을 권하셨다.
당신의 불의를 자백하라. 의에 주리거나 목말라 하지 않는 자신, 불의를 사랑하는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라. 정의와 공의를 베푸시는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하는 메마른 당신의 영혼에 친히 생수의 근원 되는 웅덩이가 되어주실 것이다. 당신의 영혼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주실 것이다. 어둠이 아닌 빛을, 불의가 아닌 의를 사랑하고 갈급해 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실 것이다. 주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다(벧전 2:2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그렇다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에 대하여 살게 된 자라면 스스로 이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진실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가? 나는 나의 물질적 필요보다 먼저 그의 의를 구하는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시선이 이 땅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의한 세상은 주께서 언젠가 공의로 심판하여 불로 모두 태워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 의의 보좌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 나라와 의가 실현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명령한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골 3:2).
예수님이 약속하신 “배부름”을 생각해보라.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다면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무엇으로 배부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평생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는다면 천국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공의와 정의에 흡족히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당신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불의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고 걱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먼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을 때 영생의 생수를 누구든지 목마른 자에게 와서 마시라고 선포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에게 부탁하고 명령하신바, 영생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영혼의 목마른 자들에게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의 영원한 배부름이 되신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증거함으로써 그리해야 한다.
그런 자들에게 참된 복이 있다. 천국에서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공의로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불의가 제거되고 온전한 공의가 세워지는 날이 마침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날을 진정으로 기다리는가? 진실로 예수님께서 공의와 정의로 영원히 다스리실 그 나라를 기대하는가?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1-12)
만인의 심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속히 오시겠다 약속하신 그분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누가 상을 받을 것인가? 불의를 행하는 자? 더러운 자? 그들은 성 밖에 있어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상을 받는 이들은 의로운 자, 거룩한 자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다 여기신 ‘성도’들이여, 당신은 의로운 자로서 의를 행하며 주를 기다리고 있는가? 거룩한 자로서 거룩함을 추구하고 있는가? 주께서 속히 오실 것이다. 당신에게 주실 상을 가지고 보상하실 것이다. 배부르게 하실 것이다.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자.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고 계신다(딤후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