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2020년, 미국 LA 선 밸리에 위치한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셰퍼드 컨퍼런스가 열린다. 전 세계적으로 3,000명 이상의 목회자 및 평신도 리더들이 참여하는 복음주의 개신교 최대 세미나 중 하나인 셰퍼드 컨퍼런스에서 내년 20회를 맞이하여 한 가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주 강사진에서 미국 남침례교단 총장 알버트 몰러 박사, 리폼드 신학교 총장 리건 던컨 박사(T4G 창립멤버), 한국에 “건강한 교회의 9가지 특징”으로 소개된 워싱턴 DC에 위치한 캐피털 힐 침례교회 마크 데버 목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년 함께 해왔던 강사들이기에 20회를 맞이하는 중요한 시점에 왜 함께하지 않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어쩌면 작년 컨퍼런스에서 날카로운 대립과 긴장을 보여준 패널 토론 때문이 아닐까? 당시 패널 토론을 인도하던 사회자 필 존슨 목사가 “사회 정의”(Social Justice)에 관한 조약에 왜 동의하지 않는지, 서명하지 않는지를 집요하게 물었고(참고: https://statementonsocialjustice.com), 세 사람(몰러, 던컨, 데버)은 이 질문을 회피하며 불편함을 드러냈었다(패널 토론 영상: https://www.gracechurch.org/sermons/15443).
참고로 사회 정의 조약은 19세기 시작된 사회 복음주의 운동이 강조한 범죄, 빈곤, 아동노동, 전쟁 등 사회적 문제를 기독교 사상으로 변화시켜 복음을 확장하려는 것이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복음에 합당한 적용이기는 하지만, 복음 그 자체에 절대 포함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긴 신조이다. 영혼을 변화 시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을 증언하는 복음뿐이라는 것이다(세 사람은 사회 정의 조약에 모두 동의하지만 서명하는 데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는 식으로 답변을 회피했었다).
지난달 16일에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있었던 Truth Matters 컨퍼런스에서는 ‘성경의 충분성’을 다루었는데, 패널 토론 시간에 진행자 토드 프리엘(Todd Friel, ‘Wretched’ 라디오 진행자)이 남침례교단 소속 여성 설교자 벳 무어(Beth Moore)에 관하여 존 맥아더 목사의 생각을 딱 한 단어로 표현해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Go home”(‘집으로 돌아가세요’)라고 말했다가 엄청난 후폭풍을 맞기도 했다. 성경이 여성 목사나 설교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었지만,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당사자 벳 무어와 그녀의 지지자들이 온라인에 존 맥아더 목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쓰거나 SNS에 비판적인 의견을 남기기도 했다(존 맥아더 목사의 관련 설교: https://www.youtube.com/watch?v=n8ncOf82ZJ0).
지난 3월 셰퍼드 컨퍼런스 패널 토론 시간에 존 맥아더 목사는 ‘주님이 사랑하고 기뻐 사용하시는 일꾼이자 사랑하는 친구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독불장군처럼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다’라는 진지하고 위트있는 말을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원치 않았던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화를 사랑한다. 사랑과 관용, 너그러운 마음과 자비를 사랑한다. 어떻게든 상처 주지 않기 원하고, 상처받는 것도 원치 않는다. 성경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 13:2).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다(요 1:14).
하지만, 진리도 중요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시 31:5). 예수님은 은혜만 충만하신 것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다(요 1:14). 성령님은 다름 아닌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7).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목사는(장로, 감독, 목회자 어떻게 불리든지 교회를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 진리의 말씀을 분별해야 한다(딤후 2:15).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목사는 또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딤후 4:2).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그리해야 한다(딤후 4:1). 목사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한다(히 13:17). 그러므로 성경에 관한 분별, 가르침, 견해를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 여기에 자신이 맡고 있는 영혼이 걸려 있다. 주님께서 피로 사신 영혼들이다. 다른 사람의 사욕을 채우거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으로 바꾸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여 참된 것을 사랑으로 말해야 한다(엡 4:15, 25).
모든 목사가 이렇게 주님 바라보고 말씀에 따라 살며 항상 힘써 말씀만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만일 교회 참석한 방문자가 찾아와, ‘제가 참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한 여자 목사님이 저를 말씀에 따라 깊이 위로해주고 바른길로 인도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없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요?’라는 식의 질문을 할 때다.
혹은 다른 교회 목사들과 함께 연합하여 중요한 세미나나 발표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 주제에 관한 생각이 서로 다를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가령 동성애는 타고난 것으로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성경적인 성 정체성에 관한 발표를 한 목소리로 해야 한다면, 또는 유신진화론을 지지하는 목사와 함께 창세기를 기독교 안에서 다양하게 바라보는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으로 끝맺음을 하는 세미나를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대한 교단을 인도하는 총장이라고 생각해 보라. 같은 교단 내에 소속된 교회 가운데 영향력 있는 큰 교회들 혹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작은 교회들이 교단이 정한 교리에 반대하여 교단을 탈퇴하려고 한다면, 총장으로서 얼마나 큰 압력을 받겠는가? 예를 들어 미국장로교(PCUSA)는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애자가 목사, 장로, 집사가 될 수 있도록 교단 헌법을 수정하여 수많은 이탈자를 낳았다. 반대의 경우도 분명히 있다. 최근에 남침례교단(SBC)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의 법을 반대하여 탈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모든 목사가 존 맥아더 목사나 알버트 몰러 박사와 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처럼 많은 사람에게 큰 파급력을 가져올 자리에 있다면(수천 명의 성도, 그들의 의견을 듣는 수많은 목사, 선생, 교단 소속 목사, 그 청중들) 얼마나 더 큰 압박과 책임감을 가지고 살겠는가?
하지만 크든 작든 목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하나님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 진리의 말씀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 전파하는 것이다.
종종 SNS나 개인 블로그에 조나단 에드워즈부터 시작하여 대상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의 오류란 오류는 이 잡듯 찾아내어 모조리 다 이단이라고 말하는 그런 식의 교만하고 부당하고 부적절한 방식으로 진리를 외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존 파이퍼가 한 이 말이 적격이다.
논쟁을 즐기는 것이 교만의 표시인 이유는, 겸손은 진리에 기초한 승리보다 진리에 기초한 연합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겸손은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싸움보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변론보다,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기쁨을 더 사랑한다. 겸손은 영과 진리로 그리스도께 예배하기를 기뻐한다. 만일 겸손이 예배를 뒷받침하는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지만, 그것은 싸움이 즐겁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며 그리스도가 실제로 어떤 분이며 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선포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진리의 영웅들”, 부흥과 개혁사, 2008, 17-18페이지)
사람을 사랑하고, 특히 하나님이 맡겨주신 성도를 사랑하는 목사는 목자장 되신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알기 원하고 가장 깊이 사랑하기 원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 때로 그 결과가 진리를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말이다. 온유와 겸손, 오래 참음이라는 태도로 전달했다면, 진리의 내용이 가져다주는 반응을 각오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로 진리를 말하는 대가로 가까운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 비판과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다. 대세를 거스르는 외톨이가 된 기분이 될 수도 있고, 외로움과 고독함을 지독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래도 목사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주님과 조용히 방언으로 기도하며 기뻐하는 사람에게 성경적인 방언은 언어이며 모든 은사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성도를 세우기 위해 주신 것이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 성도의 기쁨을 빼앗으려 하는가?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삶을 바치기로 결단한 여성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목사로 부르지 않았다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람이 부정할 수 있는가? 가정 부채와 교육비 문제로 남편과 아내가 함께 힘에 부치도록 일하며 살아갈 때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줄이더라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녀를 양육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라는 말을 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 사정을 다 아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간음과 유기가 아닌 다른 이유로 이혼하려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받은 상처와 고통을 다 알면서도 하나님이 그 이혼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그래서 목회는 어려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 그 영혼을 인도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일이지만,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확신”이 필요하다. 앨버트 몰러는 그의 책 “확신의 리더”에서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진리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진리가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다. 그러나 크리스천 리더가 돋보이는 까닭은, 확신이라는 충만한 힘 때문이다. 확신은 크리스천 리더십의 본질이며, 언제나 그러했다(“확신의 리더십”, 요단, 2016, 26페이지).
목사에게 확신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성도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것, 지지하는 생각,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가장 유익하다는 확신 말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분명히 밝히신 뜻, 그 뜻이 우리 영혼에 가장 필요한 영적 양식이라는 확신, 여러 가지 난해한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분명히 있을 수 있지만, 진화론, 과학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세속 문화가 밀고 들어오며 다양한 해석 중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압박하는 것은 성경이 진짜 말하고 있는 것과 함께 받아들일 수 없다는 확신, 지금 당장 사람들의 지지와 환호를 받을지 몰라도 진짜 평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 그 날엔 그리스도 앞에 목사 홀로 서서 말씀대로 가르쳤는지 평가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마 28:20).
최근에 만난 한 기독교 출판사 간사는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만난 대부분의 보수적인 목사님들은 표정도 굳어있고 비판적이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이더군요.” 나는 진실로 그런 목사가 되고 싶지 않다. 사도들이 본 예수님의 얼굴에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었다. 은혜가 충만해 보였다. 주님이 부르실 그 날까지 진리를 고수하고 붙들고 지키고 힘써 전파하면서도 인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점점 더 닮기 원한다. 반대로 나는 열린 사고, 넓은 마음, 유연하고 개방적인 생각이라 말하며 성경의 진리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성경의 진리가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바른길로 나를 교정하는 것 외에는 사람이나 세상의 문화, 상황이나 그 어떤 이유도 이 좁고 협착한 길에서 나를 한발자국도 퇴보하지 않게 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왜냐하면 내 앞에는 그 좁고 협착한 길을 묵묵히 앞만 바라보며 걸어가신 상처 입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내 뒤에는 내가 가는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 확신하며 따라오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