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아내를 진실로 사랑할 수 없는 이유

아내를 진실로 사랑하고 싶지만, 그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닌 나에게 있습니다. 나는 나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아내보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이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딤후 3:2).

그래서 하나님은 남편들에게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엡 5:28). 어떤 남편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의심스럽다면 아내와 왜 다투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납니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 내가 간절히 얻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입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약 4:2). 아내와의 다툼은 아내의 유익을 먼저 구할 때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의 유익을 먼저 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하여 다투고 싸우고 미워하고 살인하는 것입니다.

운전할 때 아내가 바른길로 가고 있는지 여러 번 물어보면 남편은 쉽게 짜증을 냅니다. ‘아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한 번만 하고 그쳤다면 화를 내지 않았을 텐데…’ 남편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잘못은 아내가 먼저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과 존중받고 싶어 하는 욕구보다 바른길로 가고 있는지 염려하는 아내의 마음을 먼저 생각했다면, 짜증과 분노는 분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먼저 구하기 때문에 분출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은 결국 아내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3:5). 자기 유익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보다 자기의 유익을 타인의 유익보다 먼저 구하지 않는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아내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고전 10:24).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이 말은 아내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몸 된 부부로서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곧 아내의 유익을 자기 유익 구하듯 구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부부의 관계 속에서 남편은 계속해서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욕구와 싸우기 마련입니다. 죄의 본성과 싸우기 마련입니다. 싸움에 실패하면 다툼이 일어나고, 아내에게 상처를 입히며, 부부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어떻게 해야 이 싸움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남편이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1. 아내는 남이 아니다

우리는 앞에서 남편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이 말씀이 무엇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남편들이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얼마나 강조하는가 하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지극히 합당합니다. 뒤이어 나오는 31절의 말씀은 괜히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

남편과 아내는 한 육체가 되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아내를 부른 인류 최초의 남편 아담의 고백에서 우리는 연합의 기쁨을 발견합니다(창 2:23).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하와를 창조하셨고, 그녀를 다시 아담과 짝지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마 19:6). 두 사람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운명공동체입니다(벧전 3:7).

2. 아내와 분리되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죄를 멀리하라

그런데 죄가 저지른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담이 범죄하고 하나님께서 그 죄를 책망하자 그는 자기 아내와 거리를 둡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었던 아내가 “그 여자”가 되었습니다(창 3:12). 아담은 아내에게서 분리되어 모든 잘못의 원인을 아내에게 찾으려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운전할 때 계속해서 길을 확인하는 아내에게 짜증을 낸 남편의 예로 돌아가 봅시다. 만일 아내가 아니라 남편 스스로가 길에 대해 확신이 없어 속으로 ‘정말 이 길이 맞나?’라고 질문을 했다고 생각해봅시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말입니다. 그러면 남편은 자신에게 짜증을 내며 화를 낼까요? 길을 잘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 때문에 답답할지 몰라도, 길을 되묻는 자기의 질문에 짜증을 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길을 묻는 사람이 아내인 경우는 다릅니다. 질문을 누가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는 나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의도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남입니다. 그래서 화를 냅니다. 의도를 오해하고 용납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은 원인제공을 아내가 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아내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나는 죄를 절대로 범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죄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성경은 명백한 악에 대해서도 선으로 갚으라고 요구합니다(롬 12:21). 죄는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배우자가 선으로 행한 일이든 악으로 행한 일이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죄를 선택한 것은 나입니다.

한 몸인 부부의 관계에서 아내를 분리하여 나의 유익을 추구하고 아내를 남처럼 여기는 것에서부터 죄는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로 짝지어주신 관계는 단지 이혼으로 찢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를 자기에게서 분리하고 나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 역시 한 몸으로 부르신 그 연합의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죄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자기의 유익을 가장 먼저 추구하려는 욕구, 그 이기적인 마음과 생각, 행위가 한 몸인 부부관계를 찢는 고통스러운 죄를 낳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은 아내를 진짜 “남”보다 더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그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을 문제, 속상해하지 않을 문제, 짜증 내지 않을 문제에 대해서도 아내가 하면 극단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더 화가 나고, 더 속상하고, 더 짜증이 납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한 몸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남편의 이기적인 반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몸을 찢고 자기의 유익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배가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하는 일을 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친밀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할 부부관계를 남보다 못한 관계로 갈라놓지 않습니까?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를 남으로 여기고 자기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3. 아내와 하나되어 아내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을 하라

에베소서 5장 28절은 “이와 같이”로 시작합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라는 본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 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기심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랑 그리스도께서는 신부 교회를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신부의 유익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랑입니다. 신부가 그럴만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있었을까요?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아닙니다. 오히려 티, 주름, 흠, 더러움이 많았던 신부입니다. 신랑 예수님은 그런 신부를 보며 ‘당신이 이 모양이니 어떻게 내가 이해할 수 있겠냐? 사랑할 수 있겠냐?’고 화를 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 교회가 되도록 만드십니다. 그것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신부의 거룩함과 영광을 추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와 같이”입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하나 됨을 목숨을 다해 지키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거룩함을 입히기 위해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거룩하고 정결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내의 연약함은 분노와 짜증의 제목이 아니라 그녀를 거룩하고 정결하게 씻을 수 있는 섬김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서로 크다고 싸울 때, 예수님은 조용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그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연약함과 죄를 바로잡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이 교회에게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의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의 특별한 죄나 기질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한다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령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나도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사실, 그리스도의 아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완벽하고 거룩하고 죄가 조금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짓는 죄는 어찌 그리 큰지요. 회개하고 돌이키고 용서를 빌지만 주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못 자국난 손과 발을 보면서도 얼마나 많이 저지르는지요. 주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지 못하여 다른 것들(돈, 명예, 인정, 쾌락)에 눈을 돌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흠과 티와 주름이 많은 나를 주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깨끗하게 씻으십니다. 그분 앞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게 되는 날까지 단 한번도 나를 남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신부로 정결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랑의 지극히 크심을 맛보고 있다면, 남편은 “이와 같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남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유익보다 아내의 유익을 더 추구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주님 앞에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나를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피로 사신 귀중한 영혼, 주의 사랑하시는 딸을 주님처럼 귀하고 아름답게 대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앞에서 사탄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을 두고 고민했던 최초의 부부처럼, 우리도 두 목소리 앞에 항상 서 있습니다. 사탄은 아내와 분리하여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진짜 자기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보이신 사랑이 진짜 자기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최초의 부부는 사탄의 목소리를 따랐고 그 결과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고통스런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자, 오늘도 우리에게 두 목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은 어떤 음성을 따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