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

이런 오래된 속어가 있다. 여자는 물론, 어머니와 아내, 딸을 둔 남자들도 ‘뭐 이런 말이 다 있어’라고 분노하게 만드는 속어다. ‘여자’ 특별히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된 존재로 때려서라도 훈육할 필요가 있다는 극단적인 표현이다. 이 속어는 여러 면에서 문제가 되지만 첫째로 ‘아내’가 훈육의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존재라는 것(물론 가정 안에서 역할의 차이가 있지만)을 무시한 반성경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창 1:27),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명령하셨다(엡 5:25).

그러면 저 반성경적인 속어에 “여자” 말고 “자녀”를 넣어보자.

자녀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

이것은 어떻게 들리는가? 자녀는 확실히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훈육의 대상으로 맡기셨다(신 4:10; 6:7; 11:19; 시 34:11). 하나님은 아비들에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령하셨다(엡 6:4).

하지만 아무리 자녀가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고(독립하기 전까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책임과 역할이 있다 해도,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는 말이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폭력적으로 들릴 뿐만 아니라, 그 목적과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면 불편함이 많이 해소될 것이다.

자녀에게는 자녀의 유익을 위한 사랑의 징계가 필요하다

“자녀의 유익”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사랑의 징계”라는 징계의 성격이 규정되어 있다. 무조건 때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 징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떠한가? 당신은 이 말에 동의하는가? 성경은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자녀를 양육할 책임이 주어진 부모에게 하나님은 자녀의 유익을 위한 사랑의 징계가 필요하다고 성경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다음 말씀을 잘 생각해보며 읽어보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 12:6)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부모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 기뻐하는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를 그와 같이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히브리서 기자는 이 연결고리를 매우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육신의 아버지와 그 아들/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7-11)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을 아들과 딸처럼 대우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의 유익을 위해 사랑으로 징계하신다. 자녀가 거룩한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시려고, 그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시려고 징계하신다. 징계는 결코 달콤하거나 행복하지 않다.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 하지만 그 연단 후에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 그것이 징계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얻게 되는 최고의 유익이다. 만일 이런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근실한 사랑의 징계가 주어진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한다는 확실한 증거 중 하나이다. 자녀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은 신실하게 사랑으로 징계하신다.

이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옛 자아에 따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의의 병기로 지체를 습관적으로 내어주는 어리석은 아이 같은 우리를 하나님은 신실하게 징계하셔서 거룩하게 만드신다. 거짓말하는 자를 참된 것을 말하는 자로, 속이고 뺏는 자를 구제하는 자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 교만한 자를 겸손한 자로, 분노하는 자를 온유한 자로 하나님이 빚어가신다. 그렇게 하기 위해 참으로 신실하게 자녀를 징계하신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삶을 뒤돌아보며 하나님이 베푸신 징계에 감사할 수 있다. 아버지의 징계로 값진 유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불순종하는 자녀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때려서라도 아버지가 나를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케 하심에 진정으로 감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는 마음이 솟아난다. 징계는 아버지의 신실한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녀를 징계하며 희열을 느끼는 분이 아니시다. 이스라엘을 징계하며 하나님이 부모로서 하신 말씀을 보라.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마치 아이를 때리면서 끝까지 자기가 행한 악한 일을 반성하지 않고 파멸의 길로 나아가려고 하는 아이의 강경한 태도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절대 아이가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도록 손을 놓아버리지 않는다. 때려서라도 아이가 돌이켜 살 수 있도록 사랑으로 징계한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런 측면에서 위에서 제시한 문장을 부모의 입장에서 적어보자.

자녀에게는 자녀의 유익을 위한 사랑의 징계가 필요하다
→부모는 자녀의 유익을 추구하는 일에 있어 사랑의 징계를 근실하게 사용할만큼 자녀를 사랑한다

이것은 삼일에 한 번 무조건 때리라는 것도 아니고, 매를 대는 것이 무조건 옳다는 말도 아니다. 아이의 기질과 성격, 정신적, 육체적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겠지만, 자녀를 참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녀의 유익을 추구하는 일에 최고의 관심을 두고 있을 것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랑으로 신실하게 징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꼭 필요한 경우 매를 대면서까지 말이다.

자녀가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아이로 자라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위에도 순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로 잡는다. 한 마디로 양육한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자녀를 양육할 때,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령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양육을 본으로 보여주셨다.

물론, 부모는 인간이라 연약하고 불완전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육신의 아버지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자녀를 징계하였다”고 말한다. 육신의 부모는 이 땅에 있는 동안(그것도 독립하기 전까지) 자기의 뜻대로 자녀를 징계한다. 그래서 부모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징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잘못된 기준과 뜻대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를 기준으로 자녀를 징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여 자녀의 유익을 위해 징계하는 것처럼, 부모는 자녀의 유익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징계해야 한다. 여기서 실패한 많은 경험이 ‘징계’를 불편하고 불필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아동 학대, 가정 폭력 등이 생겨나 피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어디까지나 부모의 징계는 아버지 하나님의 징계를 본받아야 한다. 자녀의 유익을 위해 근실하게 사랑으로 징계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

2019년 5월 대한민국은 민법을 바꾸기로 했다. 민법 915조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라는 법을 변경할 계획이다. “징계”라는 말이 불편하기 때문에 “훈계”로 바꿀 방안을 검토하고 있고 ‘징계권’의 범위에서 체벌을 제외할 방안이다. 체벌은 징계가 아니라 학대라는 사회적 인식을 높일 계획이라고 그 분명한 뜻을 밝혔다. 매를 댈 수 없게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다.

폭력을 통해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에게서 불쌍한 자녀를 격리하고 보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동학대 범죄나 가정 폭력 범죄를 다루는 법으로도 다스릴 수 있다. 이번 민법 개정의 더 큰 문제는 국가가 부모에게서 징계할 권한을 빼앗아간다는 데 있다. 부모가 자녀의 필요에 따라 자녀의 유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하겠다는 것이다. 부모가 아니라 국가가 자녀에게 무엇이 유익한지 규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부모가 볼 때 자녀의 유익을 위해 체벌이 필요하다고 느낀 경우,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스라엘을 애타는 마음으로 때리신 것처럼, 아이가 파멸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부는 그런 경우에도 부모는 아이를 체벌 할 수 없도록 막겠다는 것이다. 그 외 다른 방법으로 아이를 “징계”(아니, 이 말은 불편하니, “훈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 방안은 어떠한지 들어보라.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무조건 아이를 때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말로도 충분히 듣고 따르는 아이에게 매를 대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위에서 정리한 것처럼 부모는 자녀의 유익을 추구하는 일에 있어 사랑의 징계를 근실하게 사용할 만큼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 매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매가 필요한 경우에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한다면 필요할 때는 근실히 징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아이를 학대하는 문제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이를 징계하지 않는 것이다. 매는 그만큼의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인권을 생각해볼 때 매는 합당한 도구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아이는 말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주위 사람들은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아이가 호기심이 많아서, 자기 생각에 집중하고 있어서 듣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매를 아끼고 아끼며 사실상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매를 무조건 대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매가 필요한 경우에도 아끼는 부모는 그의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는 어려서부터 주변 사람에게 판단을 받는다. 버릇없고, 제멋대로이고, 자기만 아는 아이, 주변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아이, 공공장소에서 모든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아이로 자란다. 부모에게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아도 ‘저 아이의 부모는 뭐 하는지 모르겠어’, ‘아이를 저렇게 방치해도 되나’라는 판단을 받는다. 아이는 어려서 다듬어지지 않은 인격과 습관과 성품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며 결국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며 산다. 사랑받는 아이로 자라기보다는 손가락질받는 아이로 자란다. 그래서 성경은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한 것이다. 결국 자식이 해를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반면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한다. 사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체벌하는 것은 부모에게 대단한 도전이다. 분노로 때리지 말아야 하고, 체벌이 필요한 경우를 분별해야 하며, 문제가 무엇인지 확실히 가르쳐 줘야 하고, 때리고 나서도 사랑으로 회복하는 시간을 가져 친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잘못된 태도로 징계한 부분에 대한 사과도 필요하고 그럴 때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죄를 지적하고 그것을 징계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절묘하고 아름다운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필요할 때마다 신실하게 행한다는 건 부모가 자녀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증거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를 그렇게 신실하게 징계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정부의 민법 개정 방안은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을 기뻐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고 거룩한 성품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며 간절히 바라는 부모라면, 마땅히 자기 자녀를 양육할 때 자녀의 유익을 하나님 아버지처럼 추구하기를 기뻐할 것이다. 필요한 경우 매를 아끼지 않고 신실하게 자녀를 징계할 것이다. 아이의 유익을 위해 사랑으로 양육할 것이다.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막는 법이 제정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그 법 때문에 자식을 미워할 수 없다. 자식이 멸망하는 길로 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 체벌은 학대라는 정부의 규정을 따르기보다 반드시 필요한 경우 체벌을 아끼지 말고 신실하게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양육방침을 따를 것이다.

정부가 자녀에게 무엇이 가장 유익인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자녀의 인생뿐 아니라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조금도 책임지지 않는다. 자녀를 태어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며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가 대답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여기에 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할 것인가?

마귀는 항상 하나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고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