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의응답
질문(13): 교회 내 신학적 불일치 어떻게 해결하나요?

*2013년 7월 31일부터 8월 3일까지 유평교회에서 있었던 제1회 <말씀과 진리 콘퍼런스>에서 나왔던 질문입니다. 중복되는 질문을 제하고 25개의 질문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학”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합니다. 성경 중심으로 가야지 신학이 그 자리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 일리 있는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읽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해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교리를 정립합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삼위일체 교리가 있습니다. 성경엔 삼위일체 교리를 따로 정리하여 설명한 본문이 없지만 삼위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할 때 삼위일체 교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합니다. 각자 자기 해석을 바탕에 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누구나 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을 지지하지 신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래서 어폐가 있습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나는 내 성경 해석(혹은 내가 정립한 신학)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더 믿을만하다고 본다”라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보통 “성경이 중심에 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학을 배척하는 사람이 우려하는 모양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립된 교리를 따라 성경의 본문을 왜곡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바른 방식은 성경을 기초로, 성경을 근거로, 성경을 최종 권위로 두고 교리를 정립하는 것입니다. 신학이 기초와 근거와 최종 권위가 되어 성경을 이해하는 기준과 틀이 돼서는 안 됩니다.

교회 내 신학적 불일치가 있을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성경은 같아도, 그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관한 이해가 달라서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분리됐고, 세례에 관한 이해가 달라서 침례교가 생겼으며, 오늘날 성경이 말하는 은사에 관한 이해가 달라서 은사 중지론자와 은사 지속론자가 나뉩니다. 이처럼 교회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한 교회 내에서 신학적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먼저, 잘못된 방법을 이야기하면 다수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야외집회 날짜를 잡거나 어떤 종류의 찬송가를 선택할 것인지 등 충분히 다수의 의견을 묻고 그것을 참고하여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신학적 입장을 정할 때 다수의 의견대로 하는 것은 잘못될 가능성이 있고 바른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목사가 결정하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목사는 교회의 교사와 인도자로서 바른 것을 분별하고 교회를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참된 진리를 정립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적 불일치가 생겼을 때 무조건 목사 개인이 지지하는 견해가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첫째로 목사가 틀릴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로 신학적 견해를 분별하는 기준이 목사 개인의 의견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교회 내 신학적 불일치를 해결해주는 기준이 돼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신학적인 견해의 차이(혹은 교리 차이)는 그 지식의 근원인 성경을 기준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성경을 최종 권위에 두고 어떤 견해가 옳은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모여서 신학적 견해의 차이를 어떻게 조정하는지 살펴봅시다(행 15장).

유대 출신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와서 다음과 같은 교리를 가르칩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행 15:1)

이에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신학적 불일치가 일어나 변론이 생겼습니다(15:2). 안디옥 형제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그들 중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15:2).

예루살렘 교회가 이 문제를 듣고 토론을 하는데, 그들 사이에서도 불일치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중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15:5)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였는데 그 가운데도 많은 신학적 불일치가 있었습니다(“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는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자기 의견을 말했습니다(“하나님이…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5:9-10)

하지만 베드로의 권위 있는 말로 회의를 마치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야고보는 성경의 권위를 두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15:15)

야고보는 아모스 9장 11-12절을 인용하였습니다. 구약성경 말씀을 따라 지금 현재 신학적 불일치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어 일으킬 때 남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주를 찾게 하실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분별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15:19-20)

예루살렘 사도와 장로들은 이렇게 성경을 근거로 이방인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구원을 주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유대인이 짊어진 무거운 멍에를 지우지 말자고 결정했습니다. 다만 야고보는 교회 안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분열을 막기 위해 유대인이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들(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을 멀리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각 성에서 모세의 율법을 전하는 자를 통해 유대인이 계속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신학적 불일치는 성경을 근거로 해결해야 합니다. 형제들이 모여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사도처럼 특별한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을 근거로 결정하는 것이 올바른 해결 방법입니다.

물론 같은 본문을 두고도 해석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학적 불일치를 보이는 대상 사이에 오랜 변론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이 성경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고 역사적-문법적으로 올바른 해석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더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씀을 근거로 “의견”을 제시한 것처럼 말입니다.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말씀을 가르치고 연구하게 한 사람의 견해를 참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말씀과 그 말씀을 근거로 한 견해를 들었습니다. 이제 신학적 불일치를 해결할 사람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행 15:22)

결정은 사도, 장로, 온 교회가 함께 합니다. 물론 온 교회에 설문지를 돌려 같은 결과를 냈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방식이 되었든 온 교회의 일치를 끌어냈다는 것이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입니다. 교회의 인도자(사도, 장로)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일치를 이루어 내고 원래 문제가 되었던 안디옥 교회에 그 결과를 전달하기 위해 사람을 뽑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회 내 신학적 불일치는 오직 성경을 기초로, 성경을 근거로, 성경을 최종 권위로 두고 해결해야 한다는 중요한 방향성을 배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학적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목사의 의견만 듣거나 반대로 교회 구성원 전체의 의견을 조합하여 결론을 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말씀에 근거를 두고 바른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 필요하지만, 바른 가르침을 온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 일치를 이루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치를 이루어 내기 위해 많은 변론을 할 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관성 있고 역사적-문법적으로 바른 해석방식을 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하지만 “나는 성경만 가지고 말하고, 너는 신학을 가지고 말한다”라는 자세를 가지고는 신학적 불일치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성경을 근거로 자신이 해석한 내용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누구의 해석이 성경의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랜 세월 성경을 바르게 연구해 온 사람의 의견은 도움이 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성경 자체의 가르침에 근거한 의견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은 왜 교회 안에서 신학적 불일치가 일어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기뻐하는 이들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생길 때 실망과 좌절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학적 불일치는 우리가 더욱 성경의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돕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의견을 들으며 아직 자라지 못한 영역에서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나누는 것으로 서로를 섬기고 자라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행 15:30-31)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들을 권면하여 굳게 하고(행 15:32)

우리가 가진 신학적 불일치가 성경의 권위 아래 형제의 사랑으로 바르게 교정될 때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흘러나온 기쁨과 위로로 우리가 굳게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풀과 꽃은 지고 떨어져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모두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제한된 지식과 이해를 넘어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아름다운 교리적 일치를 가져올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