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기한은…너희의 알 바 아니요 (사도행전 1:7)
1992년 10월 28일은 시한부 종말론 단체, 다미선교회를 신봉하던 사람들,
특히 자신의 재산을 대부분 헌납하고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뜨겁게 찬양과 기도를 드리던 자들에게는
참으로 충격적이고 허탈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교주 이장림은 바로 이날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 주장하였고
그 말을 신뢰했던 자들이 세상의 종말이 올것이라 확신하여
재산을 팔고 예복을 갈아입고 단체로 광란의 집회를 벌여
국가적인 망신을 가져왔을 뿐만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조롱과 핍박의 손가락질을 받게 하였던 사건이었습니다.
시한부종말론이 잘못된 점은 여러가지가 될 수 있겠지만,
그들이 범했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성경의 진리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마가복음 13:32-33).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그 날을 알 수 없다 말씀하고 있으나
시한부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은 알 수 있다며 성경의 진리를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보다 자신들의 주장이 더 믿음직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사람의 생각을 하나님 말씀의 권위 위에 세워놓은 교만한 자세입니다.
1992년 다미선교회의 엄청난 사회적 파장 때문인지
오늘날 우리는 대놓고 언제 주님이 오신다고 주장하는 시한부종말론자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국제정세와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빈번한 재난과 환난들(전쟁, 기아, 지진, 폭염, 쓰나미 등)
빠르게 발전해가는 테크놀로지 등을 증거로 삼아
주님의 오심을 예견하려고 합니다.
유럽이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고 있다!
모든 나라들이 세계를 다스릴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인간의 몸에 들어가는 베리칩이 개발되어 곧 전세계적으로 의무화될 것이다!
대표적으로 베스트셀러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데이비드 차의 <마지막 신호> <마지막 성도>라는 책에서 주로 이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참고로 데이비드 차는 20대의 청년 실업가로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하고 손을 잡는 사람들이 졸도하여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며
방언, 치유 등 여러가지 능력을 지니고 있고
특히 그가 저술한 두권의 책들은 예수님의 직접 계시로 기록하였다고 주장하는
제 개인적인 분별로는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이자 사람들을 미혹하는 아주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구원간증을 들어보면 죄의 문제나 십자가 구속사역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없고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방언기도로 경험했다는 등
구원과 전혀 동떨어진 경험중심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특히 베리칩이라 불리우는 인간을 식별하는 특수칩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주장했던 칼 샌더스라는 사람이
자신이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위해 모두 허위로 만들어냈다고 분명하게 밝혔던 것으로
그의 박사학위부터 시작하여, 엔지니어 경력 등 모든 것이 허위이며
성경에서 말하는 짐승의 표 (666)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임이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완벽한 거짓이며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거짓을 선포하게 만들며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씀으로 굳건히 서있는 성도들을 넘어뜨리는 무서운 사상입니다.
저는 보다 근본적으로 말씀을 통하여 이러한 사상들
즉, 현재 일어나는 상황들을 살펴보고,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는 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때,
그 날과 그 때를 예견하려는 노력 자체가 왜 문제가 되는지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직접 특별히 선출하신 최초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사도행전 1:7)"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그 날과 그 때를 너희들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때"와 "기한"은 정확한 날짜와 시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 특징, 사건들을 포함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쯤 그 날이 올것인가? 이러한 사건들이 생겼으니 오시는 것인가? 등등을 따지지 말고
8절에 이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즉 제자들의 본연의 의무에 충성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8절을 시작하는 첫 단어 "BUT" "그러나"를 통해
그 날과 그 때를 아는 것이 우리가 할 바가 아니고
우리가 할바는 8절에 기록된 대로 주님의 증인으로 충성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예견하려는 자세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과 국제적인 사건들을 종합하여
마지막 때와 시기, 특징, 사건들을 예측하려는 것들은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니 너희에게 주어진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충성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는 행위이며 엄밀히 말하면 불순종입니다.
잠깐!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무화과나무가 계절을 따라 변하는 것처럼
세상의 흐름이 어떻게 변하는 지 우리도 지켜봐야하는 것 아닌가요?
자! 그럼 본문으로 돌아가봅시다. 과연 예수님께서 그런 의미로 이런 말씀을 주셨는지요.
마태복음 24장 32-33절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이라는 구절이 마치 세상의 흐름을 지켜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24장 4절에서 3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 끝의 징조들입니다.
여러가지 사건들이 (난리, 소문, 거짓 선지자, 불법, 환난, 기근, 지진) 기록되었습니다만
그 환난의 심각성에 대하여
21절에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자가 해산의 고통을 겪을때에 진통을 겪습니다.
처음에 겪는 진통은 주기가 짧지 않으며 이는 아이가 곧 나올 것이 아니라는 신호입니다.
그러나 진통의 주기가 짧아지고 양수가 터지면 아이가 곧 나올 것이라는 신호 혹은 징조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묘사하신 세상 끝의 징조들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보고 듣는 환난과 재앙의 모습이 아닌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고통이 심하고 양수가 터진 산모가 겪는 진통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세상의 종말이 실제로 임했을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 역시 이와 연결하여 해석해야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끝에 일어나는,
창세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무서운 징조들이 실제로 일어났을때가 바로
예수님이 곧 문 앞에 이른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 세대에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무서운 세상의 징조들이 실제로 임했을때 그것이 몇백년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한세대 안에 다 끝이 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22절에 예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환난 가운데 끝까지 견디는 자(13절)들을 위하여 환난의 날들을 길게 끌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흐름에 무관심하라는 것인가요?
저는 이 글을 통하여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과 여러가지 흐름들에 완전히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가지고
마지막 날과 때를 예견하려는 자세가 옳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알 바가 아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 날과 그 때, 특징과 사건들을 예측하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러한 예측 없이도 주님의 오심이 도적같이 이를 것임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신약성경 전반에서 다루고 있는 "깨어 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주님의 오심이 도적같이 이를 것이라 하면서
성도들에게 깨어 근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8)
신약성경에서 "깨어있으라"는 명령은
단 한번도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고 지켜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다.
"깨어있으라"는 것은 항상
믿는 성도답게 주님의 증인으로서 충성하며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심이 이러한 정황들과 상황들을 통해 볼때에 참으로 임박하였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여러가지 세상의 사건과 흐름을 조사하고 연구하며 얼마나 그날이 올 가능성이 높은지 말하기 바쁩니다.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은 주요 관심사에서 멀어집니다.
시한부종말론자가 저지른 가장 심각한 오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때와 기한은 너희의 알바가 아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도적같이 임하실 주님을 맞이할 거룩한 신부로서
항상 깨어있으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충성스럽게 믿음을 지키고 말씀을 사모하며 주의 증인으로 성실하게 말씀을 선포하기 보다는
세상의 흐름과 정황을 통해 주님의 오심을 추측하고 예견하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어졌다는 점에서
시한부종말론자들이 범한 오류와 흡사하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