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죽음, 믿음, 지금 (요 11장)

최종혁 · 2025.11.01 · 요한복음 1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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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오늘 죽음에 대해서 좀 말씀을 나누려고 해요. 어,이 죽음과 삶이라는 것이 사실은 반대말이잖아요. 그렇죠? 근데 여러분들 반대말이라는 걸 가만히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은 두 말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러니까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그렇게 시작을 하는 거죠.이 이 죽음하고 삶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렇습니다. 두 개가 반대말이긴 하지만 사실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이제 사람에게 있어서 더 그런데요.이 죽음이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를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달라진다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제가 방금 죽음을 이해한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은 이제 믿음이라고 표현을 하는게 조금 더 정확할 겁니다. 왜냐하면은 사람이 이제 죽는다라는 것까지는 다 알죠. 그렇죠? 사람이 언제가 죽는다라는 것까진 다 아는데 이제 그 이후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영역에 있어서 우리가 믿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조금 더 맞을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믿는 사람 저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 이제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죽음 이후에 대해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이제 그 여러 가지 믿음들이 있는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그렇게 믿는 경우들이 아마 지금은 굉장히 많을 겁니다. 그렇다면은 만약에 그것이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이라면은 이제 지금의 삶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저는 그렇다라고 생각하는데 논리적으로 각자 지금 원하는 대로 그냥 살면은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괜찮고 아니면은 눈치 보지 않고 난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나 원하는 대로 살 거야라고 한다면 이제 그렇게 해도 됩니다. 원하는 대로 살면 되는 거죠. 그렇죠? 뭐 살인을 하든 간음을 하든 뭐 결혼을 남자랑 하든 여자랑 하든 뭐 동물이랑 하든 뭐랑 하든 우리가 그런 것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이것이 옳다 그러다 그렇게 말할 만한 기준들이 사라져요.

실제적으로 동물들 사이에서 우리가 도덕이라는 것을 말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죠? 그것처럼 인간 세상도 동일하게 그렇게 논리적으로 될 것이다라고 우리가 생각을 해 볼 수 있어요. 그런데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그 이후에 어떠한 식으로라도 삶이 이어진다라고 믿으면 마찬가지로 그 믿음 때문에 지금의

삶이라는 것이 달라질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이런 내세에 대한 그러니까 죽음 이외 삶에 대한 그런 믿음이라는 것이 이제 죽음을 알지 못해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니까 이제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제 허상에 불과하다 이제 그렇게 말을 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래서 뭐 그런 믿음을 가지고 뭐 어쨌든 위로를 얻고 평안을 얻으면 괜찮은 거지 뭐 그 정도로 조금 이렇게 아량 있게 얘기를 하기도 해요. 그런데 이제 오늘은 그런 모든 이제 죽음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살펴보고 싶은 것은 아니고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보고 싶은 거예요. 기독교라는 것이 만약에 정말로 그런 것으로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종교라면은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게 아니라. 아주 악독한 사기라고 말을 하는 것이 맞아요. 성경은이 알지 못하는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이 영생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너희의 삶을 온전히 여기에 투자를 해야 된다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마태복음 13장 44절 잘 아시는 말씀인데 천국은 마치 밭 밭에 감추인 보아와 같으니 사람이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라고 말씀을 해요.이 천국이라는 보화가 있는 거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팔아야 한다. 버려야 한다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도 하셨죠. 마태복음 10장 37절부터 39절 보시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이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이 이 영혼에 속한 것을 얻기 위해서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요. 지금의 정말로 모든 것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 자체도 다 버려야 한다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성경은 지금하고

상관없는 영혼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요 일단 믿기만 하면 그냥이 땅에서 네가 마음대로 너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살고 그러고 나서 죽으면은 네가 좋은 곳에 갈 거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 않으셨다라는 거예요. 성경

성경에 말하는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것은요. 어이 영혼을 믿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지금을 온전히 투자하는 것을 의미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은 지금의 삶이라는 것도 영혼의 일부로서 봐야 되는 거죠. 그렇죠? 지금이 끝나고 나서 영혼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면에서 보면은 영원의 삶이라는 것이 이미 지금 시작되어 있다라고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만약에이 모든 얘기들이 그냥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고 해 주는 얘기다라고 하면은 이거보다 더 악독한 사기도 없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네 믿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믿느냐라고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인 것을 믿느냐 그러면 지금이 달라져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생명의 근원이라고 예수님은 스스로를 말씀하고 계세요.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이 죽음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요. 사실은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죽음이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온갖 문제를 만들어 내고 모든 것을 끝내는 거 같은 그런 강력한 것인데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렇지 않다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예수님은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라고 말씀을 하시고요. 또 실제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심으로써 증명해 주셨고요. 그리고 그

전에도요. 예수님의이 죽음을이기는 능력이 있으시다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었고요.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도 그러한 예수님의 그 죽음을이기는 능력과 권세에 대한 말씀이에요. 그런데이 나사로 사건은요. 조금 더 특별한 면이 있습니다. 어이 사건은요. 예수님이 정말로이 생명의 주인이시다라는 것을 강조를 하고 있고요.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이 죽음이 힘을 잃는다. 무력하다라는 것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우리의 삶을 바꿀 수밖에 없다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시다라는 네.

네. 감사합니다. 네. 예수님이 부활이면 생명이시다라는이 사실이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오늘이 말씀을 통해서 함께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그냥 쭉 읽어 가면서 여러분 어느 정 대부분 아시는 스토리니까요. 쭉 읽어 가면서이 말씀에서 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들을 함께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 먼저이 일은 이렇게

시작이 됐어요. 1절부터 3절을 먼저 보시면 요한복음 11장 1절부터 3절을 보시면 어떤 병자가 있으니이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어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랍이 오랍이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베다니라는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거죠. 그죠? 거기에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그렇게 뭐 그 왜 더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성경에 나오는 사람은 곧 삼남매예요.

그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이 배단이라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여기 18절 말씀에 보시면은 가깝다라고 얘기하죠. 베단이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됨에 오리면 얼마나 되죠? 바꾸면

네, 2km 정도 되죠. 2km가 살짝 넘는 그러한 거리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여기서 만약에 길을 따라가면은 우리 남사 저기네 남사 시내인가 음내인가네 하여튼 거기네 [웃음] 거기예요.네 거기 정도 거리가 됩니다. 걸어가면은 한시간이 안 걸리는 그랑 거리겠죠. 여러분 잘 걸으면 한 그 정도 거리가 됩니다. 이제 거기에 이제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 남매가 살고 있었고요. 이들이 여러분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하고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갈 일이 있으셨을 때요

집에 주로 머무셨을 거예요. 거기 머무시면서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오시고 이제 그렇게 아마 하셨을 겁니다. 여기 3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이 누이들이 보낸 사람들이 나사로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을 했냐면요. 사랑하시는 자라고 그렇게 표현을 했죠. 그죠?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그렇게 말을 할만큼 예수님하고는 가까운 관계, 각별한 관계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 지금 같으면은 누가 어디 가면 너 어디어라고 전화하면 되겠지만이 당시는 그러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근데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었던 거죠.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사람을 보낼 수 있었고 이제 그랬다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예수님이 계시던 곳은 어디였냐면요. 바로 앞에 10장 40절을 보시면은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사 거기 거하시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셨었는데 그곳에서이 유대인들의 적대심이 아주 커져 갔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이제 그러한 상황이 됐었고요.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께서 그 상황을 피해서 어여 이곳까지 요단강 저편에 이제 요한이

처음에 그 침례를 베풀었었던 그곳까지 예수님께서 가신 그런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었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처음 시작하셨던 그곳에서 예수님께서이 공생의 마지막을 거기서 준비하고 계셨다라고 그렇게 볼 수 있어요.

그런 예수님께 지금 마르다하고 마리아가 사람을 보내서이 나사로가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라는 소식을 전한 거예요. 당연히 나사로 병들었어요. 예수님 그냥 알고만 계세요. 그런 의미로 보낸 거 아니겠죠. 그렇죠? 당연히 예수님께서 오셔서 고쳐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런데 4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을 하세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이 말씀을이 처음들은 사람들 중에서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없었을 거예요.이 말씀의 의미가 이제 뒤에 가서 더 분명하게 밝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이 말씀을 들으면요.

어떻게 들리냐 하면은 나사로가 죽을 병이 아니니까 죽지 않을 거고 그 얘기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른 병자들 고쳐 주셨을 때처럼 그렇게 고쳐 주시겠구나라고 그렇게 들리는 말이에요. 그렇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리고 그 능력을 나타내신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라고 말씀하시는 거구나. 이제 그렇게 이제들을 수 있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예루살렘으로 가시겠거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5절 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네서 계시던 그 장소에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지금 바로 갈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 거예요. 근데 여기 이제 5절하고 6절 말씀이 조금요 접속사가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사랑하시더니요. 그렇죠?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6절은 뭐냐면은 서둘러 배단위로 가시더라겠죠. 그렇죠? 그게 우리가 생각할 때 자연스러워요. 그런데

6절 말씀이 이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제 우리말 번역 성경들 여들도 찾아보시면요. 5절하고 6절 사이를 그러나 번역을 했어요.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 사랑하셨다. 그러나 나사로가 병들었다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어때요? 그러나로 들으니까 좀 더 자연스럽나요? 네. 자연스럽게 들리시죠? 그렇죠. 근데 영어 번역 성경을 보면요. 대부분 그래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제 개혁 계정도 사랑하시더니라고 해서 약간은 그래서의 그런 뉘앙스를 거기다 넣었어요. 그렇죠? 그래서 번역을 했고요.

원어도 사실은 그래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두 개가 뭔가가 그 개념이 상반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게 원인이고 뒤에게 결과인 거예요. 그죠?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바로 가지 않으셨다라고 지금 성경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맥락이에요. 예수님은 베다니의 남매들을 사랑하셔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가지 않으셨다라는이 말이 우리가 듣기에 너무 어색한 표현인 겁니다. 어,요 어색함이 이제 뒤에 가면 우리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데요. 그런데 다만 여기서이 저자가 지금이 요한이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하면요. 예수님께서 하고이 이후에

하시는 모든 행동이 이들을 사랑하셔서 하신 행동이다라는 것을 지금 여기서 분명하게 하고 가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냐면은 이틀을 더 기다리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렇죠? 그 가서 뭐 마리아와 마르다와 대화를 하고 나사로를 살려 주시고 그 모든 것들이 포함되지만 이미 여기서부터이 여기서부터 예수님께서 이들을 사랑하셔서 하신 행동이다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랑의 모습하고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시는 그 모습이 지금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여기서 보이고 있는 거예요.

어쨌든 이제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계셨고요. 그리고 7절을 보시면 이제 제자들이 제자들에게 이제 유대로 다시 가자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그러니까 이제 8절에서 제자들이 그걸 이상하게 생각을 합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이제 그렇게 물어봐요. 아마도 이제 제자들의 입장에서 이제 어떻게 그 상황을 이해를 했을 거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긴 하셨는데 근데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까 그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배단이로는 가지 않으실 거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죠? 혹은 가지 못하고 계신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제자 제자들 입장에서도 그것이 상식적이었던 거죠.

그렇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근데 그러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은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셨던게 아니고요. 이틀을 기다리신 거고 그리고 때가 되니까 가겠다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뿐이에요. 그럼 예수님은 도대체 뭐를 기다리셨을까? 왜 이틀을 그곳에서 더 계셨을까? 예수님께서 기다리셨던 건 뭐냐면요.

나사로의 확실한 죽음입니다. 나사로의 확실한 죽음. 그러니까 확실한 죽음이라는게 무슨 말이냐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죽음인 거예요. 나사로라는 사람이 죽었다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기다리셨다라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요. 베단위에서 그 베단이라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계시는 그 요단 건너편 있잖아요. 거기까지의 거리가 하 이제 거리가 어느 정도냐면은 걸어서 하루 정도 되는 거리예요. 나사로의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나사로가 병들었다라는 소식을 전했죠. 그렇죠? 그러면은 배단에서 그 사람들이 하루를 걸어서 그까지 왔겠죠. 쉬지 않고 그냥 일반적으로 왔다면 그렇게 왔을 거고요.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틀을 기다리셨고 그리고 걸어서 가셨으니까 며칠 걸렸겠어요? 네. 총 4일. 그렇죠? 그러니까

처음 여기 소식을 전한 때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따지면은 4일이 걸린 거잖아요. 4일. 그렇죠? 근데 17절을 보세요. 17절을 보시면은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며칠? 나흘 나을 며칠이에요? 4일이죠? 4일.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가 요거를 계산을 해 보면은 우리가 좀 이렇게 두루뭉수하게 그렇게 계산을 한다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나사로에 대한 소식을

들으셨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었거나 아니면은 얼마 안 돼서 이미 죽었을 거란 말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이미 나사로는 그렇게 죽은 상태였어요. 근데 그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기다리신 겁니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단순히 죽을 때를 기다리신게 아니고요.이 나사로의 죽음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고 그리고 때가 됐을 때 배단위로 가자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겁니다. 제자들에게 11절에

보시면 뭐라고 말씀하셨냐면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어 가노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건데 이제 제자들이 좀 혼란스러워하죠. 주어 22절에 보시면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얘기하시죠. 14절에서 나사로가 죽었느니라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그리고 15절에 보시면 덧붙여서 요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이것이 지금이

일이이 제자들에게 더 큰 믿음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제이 베다니로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는 겁니다. 지금까지이 여정에 대해서 지금이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요. 최소한 세 가지의 이유가 있어요. 첫 번째로는 4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날 거고요.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겁니다. 그렇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하나 있고요. 그리고 5절에서 우리가 봤었던 건 뭐냐면은 나사로와 그의 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라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여기 15절을 보시면요.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이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뒤에 가서 보면 또 하나 분명해지는 것은 뭐냐면이 사건을 통해서 이제 유대인들 사이에서의 예수님에 대한이 적대심이 극게 달래서 정말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그러한 이들이 계략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로 이제 가게 되는 이제 그러한

여정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라는 거예요. 분명한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시고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을 하셨습니다. 이제 배단위로 가십니다. 자, 여기까지 이제 하나의 신이 끝났습니다. 자, 두 번째 신이에요. 예수님께서 이제 배단이에 도착을 하십니다. 17절부터 19절을 보시면 그때 상황이 이래요.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흐리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5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라고 말합니다. 자,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 두 개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거. 하나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을이 되었다라는 거였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면요. 많은 유대인들이 조문을 왔었다라는 사실이에요. 아마이 가정이 조금 부유했었던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이런 상황들을 보면 그니까 예수님을 계속해서 올 때마다 접대도 할 수 있었고 그런 상황들을 보면요. 부유했던 가정이었고 그러니까 이렇게 조문하러 왔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던 겁니다. 30 9절에서 보시면요.

마르다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이 나사로가 죽은 것처 나사로가 죽은지 나을이 돼서 냄새가 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고요.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온 많은 유대인들이이 상황을 분명하게 목격하고 있었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나사로가 정말로 죽었구나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모든 이제 그 준비가 끝난 거예요. 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마르다가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중하러 나갑니다. 20절 보시면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리아는 왜 집에 있었을까요? 원래 마리아가 조금 더이 예수님하고 가까운 느낌이 있잖아요. 그렇죠?

근데 마리아는 안 가고 마르다만 갔을까요? 네.

너무 슬퍼서. 네. 너무 슬퍼서일 수도 있는데 저는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확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못 들었습니다. 네. 마르다는 마리아는 못들은 거죠. 그렇죠? 마리 마리아는 집에 있었고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뛰어나간 거예요. 그냥 얘기해 주고 뭐 그럴 거 없이 그냥 그렇게 간 겁니다. 급하게 갔었던 거 같아요. 왜 그랬냐면은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서 그랬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뭐라고 얘기하냐면 21절을 보세요. 마르다가 예수께 여자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서에

보시면요.이 예수님의 그런 능력에 대해서 알고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렇죠? 잘 아시는 뭐 여여리고의 맹인 바디메오 같은 사람도 있었고요. 사게오도 예수님께서 오신다라고 하니까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그렇죠?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해도 내 병이 나을 거야라고 그렇게 기대어 기대했었던 그 혈루증에 걸렸었던 그런 여인 같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니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예수님만 만나기를 그렇게 막연하게 기다렸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라는 거예요. 여기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는이 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게 뭐냐면이 마르다의 기다림입니다. 기다림. 마르다는 특별히 그냥 막연한게 아니라. 예수님하고 처음에 얘기했던 것처럼 가까운 관계 있었잖아요. 그렇죠?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주 잘 알고 있었고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수많은 병고침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 얘기들을 그동안 계속해서 들어왔었겠죠. 그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이들과 함께 교재하시면서 그동안 행하셨던 여러 가지 일들을 뭐 예수님께 직접 듣기도 하고 제자들을 통해서 듣기도 하고 계속해서 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들으면서 정말로 감탄하고 놀라기도 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그렇게 했을 거예요.

나사로가 병들어서 죽어 갈 때 마르다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네. 그동안 내가 들어왔었던 그 예수님의 이적들 그런 것을 내가 지금 눈으로 봐야 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러한 상황이 됐는데 그것을 보여 주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상황이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낸 거죠. 예수님 병들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라고 그렇게 보낸 겁니다. 그리고 나서 뭐를 했겠어요? 오시기만 기다렸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만 계속해서 기다린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고요.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흘이 나을이 지나서 이제는 그 부패한 냄새가 나는 지경이 됐어요. 주께서 여기 계시기만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그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이니까 좀 원망스러운 마음도 저 같으면은 좀 있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긍휼를 나타내 보이시고 능력을 나타내셨던 그 예수님이 정작 내가 필요할 때

계시지 않았다라는 그 사실에 낙심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서 말씀드렸던 그 예수님을 막연하게 기다렸던 그 사람들하고는 또 다른 낙심이었을 거예요. 그렇죠? 분명히 예수님과 나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더 많이 뭐 어떻게 생각했는지 제가 다 이렇게 알 수 없겠지만 그러한 예수님과의 여러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더 각별하게 그렇게 사랑하신다라는 그런 느낌들을 많이 받았을 텐데 그런데 내가 예수님이 필요할 때 계시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마르다의 심령이 아마 지금

우리하고 좀 닮았다라는 생각이 좀 들었어요. 우리는이 성경을 통해서이 하나님이 얼마나 큰 긍휼를 베푸시고 능력을 나타내시는지를 계속해서 듣잖아요. 그렇죠?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듣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양을 해요. 지금도 이제 많은 성도들의 그런 간증들 듣죠. 뭐 선교사 이야기, 뭐 어느 성도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듣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지는 못하고 있는 거 같은 거죠. 다른 사람이 하는 거는 내가 듣고 있고 그래서 그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구나라고서 분명히 믿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거예요. 나한텐 그게 보여지지 않는 거 같은 겁니다. 내 삶에 정말로 하나님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었던 것처럼 5절과 6절 사이의 접속사를 이해를 못 하는 겁니다. 사랑하면 바로 와서 나사로를 낫게 해 주셨어야 한다라고 우리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사실 예수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어려운 일일까요? 나사로를 낫게 하시는게 예수님께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굳이

가셔야 됐나요? 그러지도 않아요. 그죠? 여러분 아시죠?이 백부장의 하인는 그냥 말씀만 하셔서 낫게 하셨잖아요. 그죠? 나사로도 그렇게 낫게 하실 수 있으셨어요. 근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하지 않으시고 나사로가 죽어서 이제 냄새가 나고 있는 사흘이 지난 그 시점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겁니다. 마르다에게 여러 가지 감정이 있었을 겁니다. 나사로를 잃은 그 슬픔이 계속해서 있었을 거고 예수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그 안에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은 실망스러운 마음이 그 안에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 모든 것들이 아마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게 하나 있어요. 마르다가 그 모든 감정들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버리고 있지 않다라는 겁니다.

22절을 보시면 이렇게 예수님께 말을 해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어이 번역이 저는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다라고 생각을 하는데이이 말을 그냥 보면은 마르다가 지금 예수님께 지금이라도 예수님 하나님께 구하셔서 나사로를 살려 주세요라고 그렇게 지금 요청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려요. 그렇죠? 그렇지 않나요? 근데 23절에서 예수님께서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때 마르다가 뭐라고 대답을 했냐면 24절에서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아나이다라고 그렇게 대답을 해요. 그리고 뒤에서 예수님께서이 무덤을 막아놓 돌을 옮겨 놔라고 얘기했을 때도 마르다는 죽은지 벌써 사흘이 돼서 나을이 돼서 자꾸 사흘이라 그러네요. 나을이

돼서 냄새가 난다라는 말만을 합니다. 그니까 요런 반응들을 보면은이 마르다가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 주실 수 있어. 그러니까 예수님 저 나사로 좀 살려 주세요라는 마음으로이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건 아닙니다. 22절에서 이제라도라고 한 것은요. 사실은 여전히라고 번역을 하는게 조금 더 맞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이렇게 됐지만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압니다라고 그렇게

자신의 믿음을 지금 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상황은 이렇지만 여전히 예수님은 27절에 보시면이 마르다가 이렇게 고백하죠. 예. 여전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나는 믿는다라고 그렇게 그런 의미로서 한 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맞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이 마음속에 어려움은 있는데 여전히 그 믿음을 지켜 가고 있었다라는 거예요. 이제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겁니다. 23절에 보시면은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런데 24절을

보시면요. 마르다가 이제이 말을 이제 일반적인 위로의 말로 듣죠. 그렇죠? 그래서 마지막 부활 때는 다시 살아날 줄 저도 믿고 있습니다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분명하게 다시 말씀하시는 거예요. 25절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언젠가는 다시 살 것에 대해 살 것이다라는 조금은 뭐랄까요? 막연한 그런 믿음이 아니라. 언제든지 산다라는 그런 구체적이고 분명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 지금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미래에 대한 소망을 네가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지금 너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라고 그렇게 지금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하실 능력의 예수님이 지금 마르다 앞에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지금 부활의 능력을 예수님께서 나타내실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믿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예수님께서 막 힘을 열심히 모아 가지고 때가 되면은 드디어 막 사람을 부활할 수 있게 하고 그런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여기서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하셨냐면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부활하게 하는 자요

생명을 주는 자다라고도 말씀을 안 하셨어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라는 말씀도 있지만 하나님이 사랑이다라는 말씀이 있죠. 그렇죠? 그 말을 할 때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이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에 있다라는 것을 강조를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여기서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본질이 생명이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은 마지막 날이 됐든지 첫째 날이 됐든지 중간에 무슨 날이 됐든지 예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지금 이미 죽어서 냄새가 나고 있는 나사로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마르다의 눈에는요. 나사로가 죽은 사람이었죠.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요.

최소한 자는 사람이었어요. 그렇죠? 그래서 예수님이 깨우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보였다라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눈에는 나사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렇죠? 살아 있는 사람이었고 그냥 여기에 있다가 저기에 간 사람이고 예수님이 부르면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었던 겁니다. 예수님의이 말씀을 마르다가 다 여전히는 이해를 못 합니다. 혹은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거 같아요. 그런데 어이 마르다의 말을 보면요.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믿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 이해를 못 하는데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믿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27절의 고백이 이렇습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네. 우리들에게 필요한 믿음도 이런 믿음일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우리가 다 알 수도 없고요. 어떤 것들은 안다고 해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 어떻게 그렇게 하실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 많이 남는 것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낙심할 때도 있고요. 실망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될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요. 그런 모든 의문이 다 해결돼서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겁니다. 성경의 모든 것이 다 내가 이해돼서 하나님을 믿는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더라도네 삶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게 되지는 않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은 궁극적으로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말씀도 믿는 겁니다.

자, 여기까지 이제 두 번째 시인이 끝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신이 이어지는데요. 28절에 보시면 이제 예수님과 그런 대화를 하고 이제 그제서야 마르다가 마리아를 불러옵니다.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잠에 마리아를 불러 말아 내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라고 말을 해요. 그러니까 그 말을 들으니까 이제 29절에서 마리아가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32절에 보시면은 똑같이 말하죠. 그죠?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네. 그리고 울어요. 3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라고 말씀을 합니다.

웁니다.이 마리아가 울고요. 그리고 그녀를 따라왔었던 다른 유대인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웁니다. 그리고 33절부터 38절을 보시면요. 그 상황을 지금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셨는지를 요한이 기록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중 어떤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구리라. 돌로 막았거늘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라고 말을 해요. 그리고 이제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을 합니다. 정말로 많이 사랑했었나 보다. 정말로 저 사람이 다른 건 다 할 수 있었는데이 사람은 죽게 못했다 이제 그러한 생각들을 하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그 생각이 맞는지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이 37절의 질문.이 그중에 어떤 사람이 말한 거? 맹인의 눈을 뜨게 한이 사람이 그 사람은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는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이 뭘까요?

네. 할 수 없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그러면은 그렇다 얘기는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은 지금이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서 우리가 이해를해야 할 것이 아니다라는 거예요.이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똑같이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계시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요 이방이 말씀을요 좀 제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했지만 고치실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요.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그를 사랑해서 고치지 않으셨던 겁니다. 왜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비정하게 사람을 죽게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냐. 이제 그렇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우리들한테 있죠. 그렇죠? 근데 그게 정말로 우리들의 생각일 뿐이다라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돼요. 여기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들이이 사건을 겪고 나서 그뒤로이

사건을 어떻게 회상을 했을까요? 예수님 때문에 너무 비참하고 너무 힘들어서 그랬을까요? 아니에요. 네.이 이 사건을 통해서 정말로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됐을 겁니다.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신들을 그렇게 사랑하시는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됐을 거예요. 그리고 나서 그들의 삶이 이전과는 절대로

같아지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더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만드는 것.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거고요. 그 사랑이 이들에게 나타났었던 겁니다. 33절에

기록된이 예수님의 비통함 그리고 예수님의 불쌍의 여기심 이런 것도요. 우리가 이런 측면에서 이해를 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도 마찬가지예요. 나사로가 죽어서 슬퍼서 우셨겠지가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눈에 나사로는 뭐 하고 있다고요? 자고 있다고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근데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죠?이 이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조금 있으면 다시 나사로를 살리셔서 다시 걸어가게 하실 텐데 그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비통하게 여기신 것은 뭐냐면요.이 부활이며 생명이신 그

예수님을 보고 있는이 사람들이이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있는 그 모습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나 안타까웠을 겁니다.이 이 죽음을 능히 다스리신 예수님을 알지를 못하고 그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절망하고 있고 슬퍼하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슬퍼하신 겁니다. 누구가는 정말로 소망이 없어서 정말로 소망이 없어서 그렇게 슬퍼하고 있었을 거고요. 누군가는 소망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영원한 삶에 그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이 그들 앞에 있는데 그들은 지금 죽음 때문에이 한 사람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해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요 죽음의 정복당한이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셨다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거기서 이제 예수님 더 이상 지체하지 않으시죠. 그 모습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39절에서 이제 무덤에서 돌을 옮기라라고 말씀을 하세요. 나사로가 나올 수 있게 하시는 거죠. 그죠?이 돌이 엄청 크니까. 네. 그것도 좀 웃기잖아요. 나사로에 나오라 했는데 나사로가 힘들어서 막 돌 못 밀어내고 막 안에서 문집 열어줘 그러고 있으면 좀 이상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네. 미리 그렇게 돌을 옮겨 놓으라라고 하시고 나사로가 나올 수 있게 하신 거예요. 그럼 그러니까 이제 주여 죽은지 나을이 되었음에 벌써 냄새가 난다라고 마르다가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이 상황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여전히 마르다는 알지는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11장 40절에 보시면요. 그녀에게 뭐가 진짜 현실인지 알게 하세요. 예수님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네 죽은 시체에서 냄새가 나고 있고 죽은지 사흘이 됐든 나을이 됐든

일주일이 지났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요. 지금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보게 될 겁니다. 사람들이 돌을 옮겨놨습니다. 마리아 말대로 냄새가 났겠죠. 그렇죠? 그나마이 돌로 막아 놨었는데 이걸 치워 놓으니까 냄새가 더 심해졌을 겁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냄새를 맡았을 거예요. 그 냄새를 맡았을 때 무슨 생각했겠어요? 나사로는 죽었다. 네. 정말로 죽어 있다라는 거 모두가 다 알고 있었을 겁니다. 코를 막은 사람이 있겠죠. 그러면서 눈은 어디를 보고 있었을까요? 그 무덤에 돌이 굴려간 그 무덤의 입구를

보고 있었을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를 하세요. 돌을 옮겨 놓으니 41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일부러 사람들이 소리를들을 수 있게 지금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신 겁니다. 지금부터 이들이 보게 될 그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이 사람들이 분명히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기도를 하시는 겁니다. 보고서 믿으라라고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마치시고요.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제가 큰 소리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부끄러워서 그게 잘 안 됩니다. 자, [웃음] 네.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셨습니다. 무덤에 있던 그 모습 그대로 나사론가

나왔어요. 44절 보시면 죽은 자가 수족을 배로 동인채로 나오는데이 재밌죠. 그죠? 그냥 나사로가라고 해도 되는데 죽은 자가라고 했죠. 그렇죠? 죽은 겁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배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쌓여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뒤에 45절 말씀을

보시면요.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모든 것이 다 된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이 일로 인해서 영광을 받으셨고요.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렇죠? 처음 그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도 있었을 거고요.이 마르다나 마리아처럼 혹은 나사로처럼 혹은 제자들처럼 그들의 믿음이 더 굳건해진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그 부활에 대해서 이제는 그들의 눈으로 보면서 정말로 예수님께서 부활이고 생명인 분이시구나라고 그렇게 깨닫게 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특별히이 베다니의이 삼남매 정말로 예수님의 사랑을 그들이 확인하게 됐었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서가 죽지 않고 병고침을 받았을 때 그들이

경험했을 것도 분명히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근데 그것과 비교해서 지금이 사랑은 정말로 크게 그들에게 느껴졌을 겁니다. 말씀을 정리할게요. 죽은만큼 사람을 두려워하는게 없어요. 그래서 건강한 사람도 뭐 돈이 있는 사람도

다 죽음 앞에서 좀 초연하지 못합니다. 뭐 남의 얘기일 때는 괜찮아요. 그래서 남의 장례식장에 가서는 다들 막 이렇게 덤덤하게 그렇게 얘기하는데 자기가 이런 죽음을 가까이 뒀을 때는 그렇지 못하죠. 성경은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그 죽으신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해요.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 그래도 히브리서 한 번은 합니다. 그렇죠? 14절 15절 보시면 자녀들은 혈과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그다음에 15절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평생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보고서 안타까워하셨던 모습이 바로 이건 거죠. 그렇죠? 죽기를 두려워해서 그 죽음의 종이 돼서 살아가고 있는 그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고 비통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죽음을이기는 능력이 있음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고요.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그것을 한 번 더 분명하게 증거를 나타내신 겁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이유 그렇죠. 부활이며 생명이신 그 예수님이 죽으셨다고요. 그렇게 하신 이유가요.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라는 거 오늘 말씀에서 증명을 했고요. 예수님의 부활로 또 한번 증명이 됩니다. 선포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더 이상 어떠한 권세도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그럼 안 죽나요? 우리는 다 칼로 찍어도 [웃음] 찔러도 안 죽고 나이 들어도 안 죽고 그러면 좋겠는데 육체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경험을 하긴 할 겁니다. 그런데 뭐가 달라지냐 하면요. 그 사실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죽음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라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히 정말로 살아갈 수 있다라는 그 사실 때문에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요. 고린도서 5장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의 죽음에 대한 얘기인 거죠.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생각하지 않고요. 소망을

가지고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소망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 이런 소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죽음으로 다 끝나는 것처럼 그렇게 살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어떻게 사냐하면요. 고린도서 5장 7절.이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 믿음으로 살고 보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지금을 그렇게 사는 겁니다. 그래서 다르게 살아요. 예. 부활을 경험하고 나서 나사로가 그전하고 똑같이 살았을까요? 그렇게 못 살았을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을 거고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생각해 보세요. 믿음으로 다들 행하다가 죽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도 말을 해요.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 보시면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더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부활도 없고 영원한 삶이 없으면 그냥 보이는 대로 내 눈에 지금 보이는 대로 그냥 마음대로 살 거다라고 바울도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처음에 말씀드렸었던 것처럼 이게 논리적으로 맞아요. 우리가 죽고 나서 아무것도 없으면 그냥 언제든 죽을 거니까 그냥 오늘 내가 하고 싶은 거 먹고 마시면 마시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되고 그게 싫으면 안 하면 되고 그냥 그렇게 합니다.

바울이 몰라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게 아니고요. 바울이 순진해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게 아닌 거예요. 보이는 것.이 세상이 우리 삶의 전부라면 우리는 그냥 그렇게 내일 죽을 터니 먹고 마시자.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근데 예.

그렇게 사는 것이 맞아요. 근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제 그만큼 우리가 더 불쌍한 사람이죠.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는. 밭에 보화가 감춰 있다. 그래 가지고 저기 밭에 가면 거기 보화가 감춰져 있다라는 소식을들은 거죠. 내가 발견했다고 해보죠. 거기 보아 같은게 있어서 그거를 샀습니다. 그렇죠?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밭을 샀어요. 근데 감정을 받아보니까 보화가 가짜인 거죠. 네.

그럼 어UN니까? 네. 모든 것을 다 팔아버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죠? 네. 불쌍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 영생의 삶에 있어서요. 그래서 진짜 중요한 건 뭐냐면이 밭에 보화가 진짜냐 가짜냐라는 겁니다. 부활이 정말로 있고 영원한 삶이 있느냐라는 거죠. 여러분 그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답하세요? 부활이 있다라고 답을 하실 겁니다. 영원한 삶이 있다라고 답을 하실 겁니다.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죠? 그러면 그 믿음이 지금 여러분의 삶을 바꿔 줘야 되는 겁니다. 죽어서 지옥이 아니라. 천국 가는 거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우리의 영생은 이미 시작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이 전부인 것처럼 살지 마시고요. 지금 여러분 눈앞에 보이는 것이 이게 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게 정말로 중요한 것처럼 그렇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으면 다 끝났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하고 똑같이 살지 말라는 거예요.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믿음으로 정말로 여러분들이 그 믿음으로 보고 있는 것을 따라서 행하시기 바랍니다.이 죽음의 실체를 여러분이 믿음으로 알고 계시다면

그것에 따라서 지금 그렇게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고 말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서 또 우리들에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음 우리는이 땅에 보이는 것이 참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이것이 모든 현실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이 성경을 통해서 알게 하신 것은 그것이 아니라이 죽음 이후에 우리의 삶이 있고 영원히 그 삶이 이어진다라는 그 사실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그 말씀을 받은 자들로서 또 믿는 자들로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그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또이 땅 가운데서 헛된 것을 쫓아 헛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계속해서 영원한 것을 바라며 새하지 않을 것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투자할 수 있게 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그 모든 삶 가운데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순 없지만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행해 갈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음.들은 들은 말씀을 주님께 맡기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