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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불렀던 찬양들이 제가 학생 때 많이 불렀던 찬양이어서 그때 당시의 감정을 조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 오늘은 사도행전 6장 8절부터 그 7장 60절 말씀을 통해서 세상과 마주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을 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이 돼서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 이야기는 베드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왔고 이제 사도행전 이야기는 베드로에이어서 스데반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오늘 보게 될 스데반의 등장은 그 성경의 분량으로는 약 2장에 걸쳐서 나오기 때문에 베드로와 나중에 나오길 사도 바울의 비해서는 그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하지만이 작은 분량에도 사도행전을 기록한 그 누가의 의도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오늘 함께 보게 될 그 스데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마주하였을 때 어떠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입니다. 스데반이 마주하였던 당시 배경은 베드로와는 또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그 유대 지도자들과의 충돌은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고 그 충돌은 그게 달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유대 지도자들이 베드로에게 행했던 모습을 좀 떠올려 보면은 첫 번째 행동은 예수님을 관해서 전하지 말라는 금년과 위협으로
끝이 났었고 두 번째 행동은 예수님에 관해 말하지 말라는 그 금과 그리고 물리적인 방법인 채찍질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나오는 세 번째 행동은 앞서 베드로에게 행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스데반을 죽음으로 모르는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첫 번째로 순교한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세상의 핍박이 점점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스데반이 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배경을 고래해봤을 때 스데반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그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예측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스데반은 세상에 대해서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에게 오늘 총 세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스데반이 하나님의 사역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습니다.이 세 가지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떠한 적용이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본문 말씀이 좀 길어 가지고 일부 구절만 함께
보시고 이외 9절은 말씀 중간중간에 필요한 부분만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 8절입니다. 8절 보시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 알렉산드라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성과 장로와 관들을 충시켜서 잡아가지고 공에 이르러 거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이 사람이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도다. 그의 말에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주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 스트데반을 주먹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7장 1절입니다. 대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영들이 들으소서. 이후의 말씀은 스데반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설교를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좀 띄어서 51절을 보시겠습니다.
51절에 목이 곱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의 중에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그들이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을 갈거늘 스데만인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먹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진 것을 보노라. 한데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세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리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세 주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마옵소서이 말을 하고 자니라. 말씀이 좀 길었지만 사도행전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같이 함께 살펴보도록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총 세 가지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첫 번째 사건은 스데반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정확히 그들과 어떤
것을 논쟁하고 말하였는지는 묘사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의 회당에서 벌어진 그들과 스데반의 논쟁의 모습이 나옵니다.이 이 논쟁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하나님이 주신 성령과 지혜로 말하였고 그들은 더 이상 스데반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논박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거짓증들을 매수하여서 거짓 누명을
스데반에게 씌웁니다. 그 거짓 누명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과 하나님이 세우신 그 율법을 부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사네들린 앞에서 행해진 스데반의 설교의 장면입니다.이 설교는 스데반이 사내들인 무리 앞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 베드로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서 신문을 받았습니다. 신문을 진행한 사람은 대제사장인 가야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야바는 신문간 세대반에게 논쟁의 기회를 줍니다. 스데반의 지금 상태는 거짓 증인들에 의해서 거짓 유명이 씌워진 상태이기 때문에 스데반의 스데반이 앞으로 하게 될이 변증에 따라서 스데반이 죽을 수도 있고 풀려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어떻게 변증하였을까요? 세대반의 변증은 급하게 자신을 변호하면서 수동적인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거짓된 변명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공격적이고 능동적인 설교였습니다. 즉 그들에게 풀려나는 것을 원했던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하나님의 설교였습니다. 마지막 사건은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이 이 사건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첫 번째로 순교당하는 예수님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총 세 가지 사건으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흐름은 스데만의 증거, 스데만의 설교, 스데만의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그 상황과 현재 세상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의이 가운데 스데반이이 가운데에서 취했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로 스데반이 하나님의 사역에 힘쓴 모습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사람은 12제자와 같이 사도라는 직분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그들을 돌보기 위해서 세워진 사도들과 형제들이 함께 세운 일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말씀에서 언급된이 일은 예루살렘이 아닌 타지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동료 유대인들을 돌보는 일이었고 이런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 위해서 스데반을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도들을 돌보는 역할로서 스데반이 처음 세워졌지만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그 스데반이 성도들을 돌보는 그러한 모습은 나타나고 있지 않 않습니다. 단지 스데반의 모습은 8절과 9절에 나오듯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이 이 말씀을 고로해 봤을 때 아마도 성도들을 돌보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 가운데 참이신 예수님을
전 나타내기 위해서 큰 기사와 표적을 베풀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마치 예수님이이 땅에서 자신의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을 나타나면서 사람들에게 기사와 기적을 베푸신 것처럼 스데반도 하나님이 주신 기사와 표적의 능력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선포하는 일과 최초 스데반이 세워진 이유에 따라서 성도들을 돌보는 일 모두 하나님의 사역이자 하나님의 섬김입니다. 우리는 세대반에 대한이 표현을 통해서 세대반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사역에 힘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에 힘들 수 있었던 비결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서 가장 먼저 구했던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먼저 구했습니다. 그 이후로 누가가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스데반을 표현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표현하기를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 그리고 지혜와 성령이 스데반에게 충만하였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 6장 3절에서도 스데반을 최초로 일꾼으로 세울 때 성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라고
표현되 있고 이어지는 8절에서도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고 되어 있으며 10절에서도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고 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실이네 가지의 속성은 스데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속성들입니다. 하나님이 스데반에게 주셔야 가능한 것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잘 알고 계시는 말씀인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은혜와 권능
지혜와 성령이 스데반에게 있었다는 것은 스데반이 단지 예수님의 제자로서 은사가 탁 탁월했다는 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이 모든 것을 스데반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약 유대 지도자들처럼 자신을 위해 이것들을 구했다면 절대로 허락되지 않을 속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목적이 가끔은이 땅에서의 나의 잘됨을 위해서
구하기도 합니다. 저와 같은 경우에도 이런 말씀을 오해해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면 나에게 복과 편안함을 주시겠지라는 오해를 했던 적이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창조 하나님을 나만의 한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물론이 땅에서의 복도 주시기 원하시고 실제로 주시지만 더 이보다 더 큰 우리의 영혼에 그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힘쓴이 스데반에게 허락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스데반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 15절을 함께 보시면
공해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말씀에서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이이는 문자적으로 정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보였다거나 또는 비유로
말씀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스데반과 함께하시고 함께하고 계시다는 표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려울 때나 힘들 때나 모두 함께 하셨습니다. 특히 당시 상황은 스데반이 정말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어려움은 누명이라는 인간으로선 가장 답답한 상황이었습니다. 10절부터 보시면 스데반이 처한 상황을 좀 알 수가 있습니다. 10절에 보시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드러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들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해에 이르러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패배한 그들은 스데반을 공해로 끌고 갑니다. 과거 예수님과 베드로와 베드로처럼 당시 세력이 강한 사내들인이라는 무리가 스데반을 공해 가운 공해 가운데 세우게 됩니다. 그들이 스데반을 세우게 된 이유는 스데반에게 거짓 유명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보시면 그의 말에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러노라. 하거늘 그들의 주장으로는 세대반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율법을 지금까지 부정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말했던 의미와 정 반대로 그들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도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은 그 일로 자신이 벌을 받을 때에 엄청 분해하고 또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스데반도 이와 같이 억울해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스데반은 스데만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스데만의 성품이 뛰어나거나 스데만의 용모가 뛰어나서 그러한 표현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 하나님은 스데범과 함께 하셨고 누가는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 버리고 노력을 합니다. 자신이 노력하면 하나님의 사역, 어떠한 것이든 수행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데반는 항상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해냈습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모습이 곧 이슬 유대인의 공해에서 스데반의 설교와 그리고 스데반의 죽음에도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왜냐면 죽는 순간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스데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선 부분을 정리하자면 스데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역에 힘썼고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스데반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마음과 스데반과 하나님과 함께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세상에 나아갈 때 먼저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사역에 힘써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는 비결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고 끝까지 그순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 하여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스데반이 세상이대 세상을 대하는 모습을 보겠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입니다.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그대로 지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거짓 증인들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하고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것을 말씀에서 간단히 살펴보면 11절에서는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겠다는 주장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스데반이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서 말한다고 얘기합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곳은 하나님의 성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말하며 새 차례나 반복된 거짓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이 세 부분을 유약한 것이 하나님의 성전과 모세 율법을 부정한다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고발은 예수님이이 땅에서 공생의 사역 기간에도 똑같이 예수님에게 적용이 되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의 기간에 하나님의 성전을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29절에서는 표적을 구하던 유대인들을 향해이 성전을 하면 4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지만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할 자신의 몸을 가르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고수해서 예수님이 그들의 성전을 허문다는 누명을 씌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율법을 부정하였다고 동일하게 주정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 율법 중에 음식에 관한 율법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한 음식을 먹게 되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에 대한 율법을 말씀하실 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말은 그의 마음의 표본이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외에 여러 가지 율법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문자적으로만 고소하는 것은 그 유대인들의 정체성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제사에 관한 율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데반은 그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를 정확히 알고 고소하였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스 스데반의 발언이 굉장히 불쾌하고 거슬렸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지금까지 전하면서 율법에서 말하는 구약의 제사를 통한 구약의 제사를 통한 죄의 대속에 대해서 말하였고 그 제사에 대해서 영원한 유효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 영광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죄의 대속의 대속에 대해서 가르쳤을 거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유대 지도자들이 뭐 하나님의 성전, 모세의 율법 이러한 이유를 들었지만 가장 크게 스데반을 공격한 이유는 사실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인 당사자였기 때문에 스데반이 가르치는 것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고이를 통이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을 충동시켜서 충동시키기 위해서 스데반에게 그들이 중요시 여기는 성전과 율법을 어율법의
부정이라는 누명을 덮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들의 누명에도 불구하고 산내들인 그 무리 앞에서 스테드반의 설교를 통해서 성전과 율법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그들에게 설교로 전달합니다. 그 설교의 결과가 54절에 나와 있습니다. 54절에
보시면 그들이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일을 갈거늘 그들의 마음이 찔렸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스데반이 어떤 설교를 했기에 그들의 마음이 찔렸을까요? 이제 간단하게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볼 텐데요.이 긴 설교를 잘 설명하기는 좀 시간이 부족할 것 같고 중간중간 우리가 기억했을 만한 그 설교의 장면만 간단히 살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은이 설교를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그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존경하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과 이삭, 아브라함과 모세, 야곱을 통해서 그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맨 처음 아브라함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7장 5절을 보시면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이 땅을
아직도 자식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주신 것은 땅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들어가 살도록 해 주신 땅을 한 번도 직접 소유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말씀에서와 같이 발 붙일 만한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 자손에게 그 땅을 미대의 소유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지금 설교에서 의도적으로 창세기 17장 8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이제 땅 그 자체를 영원히 소유한다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이 땅을
약속을 주신 아브라함도 발붙이도록 소유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 살아야 된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꼭 가나안 땅에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성전에 거야 한다고 하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자는 어느 곳에 어느 땅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이를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주장이 설교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향하신 첫 번째 계시도 거룩한 땅인 가나안 약속의 가나안 땅 밖에 장소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은 모세에 대한이 설교의 부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7장 30절과 31절을 보시면 40년이 참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물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이 장면은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와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급하는 기간에 모세에게 나타나셨는데이 사건은 시내산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구약 성경은이 산을 호렙산이라 불렀지만 여기에서는 시내산이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을 다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직 그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라는 장소에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이는 약속의 땅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33절에 보시면 주께서 이르시되 내 발에 신을 벗으라. 네가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모세가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세가서 있는 곳은 약속한 그 땅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의 밖이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고수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만이 거룩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말씀하신 곳이 진정 거룩한
곳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교 뒷부분에서 구약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그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말씀 48절 50 48절부터 50절을 보시면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초서가 어디냐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성전 또한 사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인간들 손으로 지은 성전에 하나님을 모실 수도 없는 것이고 인간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좌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심각한 교만의 생각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우상화하였습니다.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스데반은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그들이 고수하고 있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도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말씀을 쭉 묵상해 보았을 때 유대지도 지도자들이 스데반을
죽이기로 작정하였던 그 이유는 율법에 대한 설교가 가장 컸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왜냐면 그들이 고수하는 율법과 예수님은 절대 연관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고소하던 율법 중 하나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죄의
대속에 대한 율법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죄의 대속함의 유효성에 대해서 앞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이제는 예수님을 통한 죄 대속만이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는게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그들이 죽였다고 지적합니다.
스데반이 그들을 지적하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미워서 또는 그들이 나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들을 지적했던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마지막에 순교를 할 때 그들을 생각했듯이 그들이 죄에서 회개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스데반을 향해서 일을 갈았습니다. 그리고 스데마은 그래야하여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했던 것을 보입니다. 그들의 죄를 일깨워 주기 위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음 요셉의 이야기를 먼저 보시면 7장 9절과 10절입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여기 말씀에서 여러 조상들은 요셉의 형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의 형들은 형들인 그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격적인 문제와 하나는 심각한 범죄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어이 성격적인
성격적인 문제는 요셉을 시기하였던 것이고 심각한 범죄는 동생 요셉을 외국인들에게 노예로 팔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데반이 언급한 이유는 요셉의 형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향해 음모를 꾸몄던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이 같은 모형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진 모습이 요셉의 형들이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 사람들에게 팔아넘긴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혼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복을 주셔서 형들을 기근해서 구해낸 것처럼 세상이 예수님을 버렸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계육을 이루신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들의 죄를 율깨워 줍니다. 7장 25절을 보시면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으로를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에서 그는 모세를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그 특징이 묘사되는 반면 그의 형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로 표현이 됩니다. 또한 26절과 27절을 보시면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그 동물을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강제 노역을 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모세가 자기 형제들을 화해시키는 장면을 다들 알고 계실 27절에서는 모세가이를 화시키려고 할 때 그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형제가 모세를 밀었어렸다라는이 설명은 구약 성경에는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누가는 다시 한번 이스라 이스라엘의 사람의 특징을 말하기 위해서이 표현을 넣었고 이스라엘이 모세를 거부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도 과거 모세가 거부하였던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은 모형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여러 측면에서 예수님의 모형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땅에서 고통받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이 설교에서는 모세의 구원자 역할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 22절은 모세를 표현한
어설교 구절입니다. 2절에 보시면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 집에서 석달 동안 길리더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름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그의
말과 하는 말이 하는 일이 능하더라.이 이 구조를 통해서 우리는 모세가 예수님의 모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모세는 그때 그 정확한 시간에 태어났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에 따라 정확한 그 때에이 땅에 오셨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모세는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 즉 훗날 하나님이 그에게 이스라엘을 구해낼 사명의 필요한 지혜를 풍성히 주셨고 그 지혜를 배웠습니다. 예수님도이 땅에서 많은 지혜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세는 그의 말과 하는 일이 능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이는 예수님도이 땅에서 큰 권능으로 기적과 표적을 베셨습니다.
이와 같이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선택하신 자이며 예수님의 모형으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모 모형인 모세를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자신들을 구원해낼 자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모세를 밀어들어 버린 것처럼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너희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밀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한 출애굽 기간에 범죄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유대 지도자들과 연관을 시킵니다. 40절에 보시면 출애굽 기간에음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인도할 또 다른 우상 신들을 만들어 달라고 외치고 있고 3 43절에 보시면 그들이 이방 우상 신들에게 절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 끝에서 앞서 얘기한 과거 이스라엘 모 과거의 이스라엘이 잘못된 모형이 너희와 같다고 명확히 이야기합니다. 57절을 보시면
51절을 보시면 먹이 곱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선지자들의 중에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리니 되다니 너희 유대 지도자들은 모세를 부인하고 광야에서 우상신을 섬겼던 이스라엘과 똑같은 사람이고 이제는
하나님이 택하신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지금 듣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은 과거이 애굽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무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들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진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4절에 보시 54절에 그들의 마음이 찔렸다고 표현되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일을 갈았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록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예수님을 죽인 죄에 두려웠지만
회개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분노가 차 올랐습니다. 가른 유다가 하나님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자녀임을 앎에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거절했던 것처럼 그 사람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렇게 바르게 분별한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의 눈치를 보거나
자신의 안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실천적인 부분에서 두 가지 적용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이 세상에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려고 많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창조론 그리고 삼일체론 구원론 다양한 것들에 대해서 틈만
생기면 변형시켜서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오늘날 유튜브라는 매개차를 통해서 잘못된 찌리를 쉽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가령 7일 창조를 부정하거나 3일 일체 논리를 나름대로 해석을 통해서 해석을 하는 등 너무 많은 잘못된 진리가 퍼져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스데반이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정확히 전했던 것처럼 바른 진리만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인지하고 생각하고 노력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참된 진리에 거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데반에게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이 지혜를 주셨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처럼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 각각 분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오로지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권력과 힘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였습니다. 두 번째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듣기 좋은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찔리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듣기 좋은 설교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설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돌리는
설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들은 그 유대인들이 오히려 일을 갈았듯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 않던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스데반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그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스데반이 앞선 설교를 마친 후에 그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로 마음에 찔림이 있었고 두 번째로 일을 갈면서 분노에 사로잡혔었습니다. 스데반은 설교 이후에 그들이 그들이스데반에게 분노하고 위협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어도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서 영광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의 환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이 이 스데반의 마지막 발언은 자신의 죽음 끝까지 예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 55절과 56절에 보시면 세대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르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데
유대 지도자들이 죽인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이 이 표현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이며 그들 앞에서 그 예수님을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고
스데반을 죽이게 됩니다. 누가는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스데반을 죽인 장면을 통해서 그들의 악함을 최대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악함을 이처럼 최대한 부 부각한 이유는 마지막에 나타나 스데반의 그 마음을 더욱더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의 악한 모습은 57절과 5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57절 7절을 보시면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세 말씀에서 표현된 유대 지도자들의 특징은 스데반의 설명을 더 이상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에서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은 사람들의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아이보다 더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그들은 다시 소란 분노 폭력에 호소하고 있으며 그들의 무기는 빛이 아니라. 열기였습니다. 귀를 막고 있다는 그들의 모습은 스데반이 설교 앞에서 언급하였던 언급하였었는데 그들의 귀가 할례받지
못하는 것을할례받지 못하는 주장을 확인하는 것이고 회개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는이 표현은 당시 상황이 통제할 수 없었던 폭도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약하자면 사네들인이 무리가 행한 스데반에 대한이 소송은 중단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적법하다는 착각하에 변칙적인 성격의 살인을 행하는 것이고 당시 현존하던 권력 기구가 폭력적으로 스데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이 성전에서 세대반을 쫓아내고 돌로 세대반을 죽입니다. 돌로 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당시 이방신을 섬기거나 이방신을 통해서 예언을 하거나 접신 신성모독 죄 손
신신성모독죄 간음등 간음 등 매우 중한 죄에 적용하는 사용법이었습니다. 그리고이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단 시간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법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58절에 보시면 증인들이 옷을 벗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돌을 던짐으로써 피가 터지고 그 피가 튀겨서 내 옷에 묻기 때문에 옷을
던진 것입니다. 그마만큼이 죽임은 매우 고통스러운 방법이었습니다. 이처럼 스데반은 신성 모독이라는 거짓 유명이 씌워지고 돌로 쳐서 사람을 죽이는 모욕적이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순교의 장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 지도자들의이 악한 모습이 표현된 이유는 스데반의 그 마지막 모습을 더욱더 빛나게 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이 쓰여졌습니다.
세대반의 순교의 순간이 더욱더 빛난 것은 마지막까지 오히려 그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60절을 보시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스데반이 고백을 하고 죽게 됩니다. 스데반이 죽는 순간까지도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데반이 크게 부르짖었다라는 의미는 그냥 단순히 고통 중에 소리를 질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불러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이
악 악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서 스데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진 모욕과 고통을 당하심에도 자기 자신을 생각하시는 것이 아닌 자신을 죽이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과 세대방과이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고 완전히 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바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유대 지도자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지난 주일에서 강단에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전전하면서
유대 지도자들과 우리와는 우리와의 다른 점은 단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유대 지도자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죄사을 받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이를 마음에 깊이 새긴다면 우리를 부정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스데반이 인상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것이 우리에게도 같은 도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무리로 이야기했습니다. 스데반은 성경 전체에서 오늘 봤던 6장과 7장에서만 등장합니다.
이후에 사도행전 뒷부분 뒷부분에서는 잠시 스데반이 언급되지만 스데반의 사역은 오늘 본장과 7절에서만 7장에서만 나타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스데반의 스데반은 사도행전의 극심한 핍박에 들어가는 그 시작점에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 스데반이 세상에서 가졌던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스데반을 묵상하면서 스데반은 가장
귀한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늘의 영한 삶이었고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였습니다. 그게 만약 없었더라면 절대로 자신의 목숨을내어 주면서까지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진리를 고소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대방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자부할 순 없더라도 하늘에 하나님이 간직하신 약속을 소망하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다면 스데반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일생은 사실 귀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귀한 나그네 인생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꼭 귀하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기도하시고 말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세대반을 통해서 나그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 덕분임을 고백드립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사역에 힘쓰게 해 주시고 진리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이 모든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