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오실 때까지 전하는 복음, 만찬

본문 : 고린도전서 11장 17절~34절

설교자 : 조정의

오늘은 [은혜의 방편] 마지막 시간으로 주의 만찬(성찬)에 관해서 나누기 원한다. 오늘 설교를 통해 주의 만찬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중요한 방편임을 보기 원하고, 그 반면교사가 될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통해 살펴보기 원한다.

1. 문제(17-22)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했고 말씀으로 교회를 세웠다(행 18:1-7). 그 후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 교회 소식을 듣게 된다(1:11). 교회를 떠난 지 몇 년 만에 들은 소식은 너무도 참담했다. 바울은 이 편지의 시작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칭찬과 격려로 시작했지만, 그 이후로 계속해서 마치 급한 문제를 하나하나 해치우듯,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본문 17절은 새로운 문제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바울이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는 “이 일”은 18절에 나오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가 “교회에(로서, 다 함께) 모일 때에” 발생하는 일이었고, 특히 20절에 나오는 “주의 만찬”에서 그 문제가 부각되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겪는 이 문제를 누군가에게 들었다(18절, “듣고”). 출처를 뚜렷이 알 수는 없지만 글로에 집 사람들이나(1:11), 편지 마지막에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을 만나러 왔다고 알렸는데, 그들을 통해서 들었을지도 모른다(고전 16:17). 바울은 들은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가서 확인하길 원했지만, 18절 말씀처럼 “어느 정도 믿”었다.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확신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한 마디로 18절에 나오는 것처럼 “분쟁”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 문제를 편지 초반에 길게 다루었는데(1-4장), 성도가 각각 아볼로 편, 바울 편, 게바 편, 그리스도 편으로 갈라진 문제였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지적한 “분쟁”은 또 다른 종류의 분쟁으로, 20절부터 나오는 주의 만찬에서 그 분쟁의 양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바울은 아주 흥미롭게도 어떤 면에서 그런 “파당”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9절,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파당”은 ‘같은 이해를 가진 사람의 모임’을 말하는데, 여기에선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잘못된 생각으로 파를 나누는 어떤 무리의 행위가 교회에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는 그들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생각에 동조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 경건하고 신실한 성도가 누구인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가 함께 모일 때, 끼리끼리 모여 당을 나누려 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무슨 생각으로 그들은 하나가 되었을까? 그들이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 보자. 바울은 그 일에 대해 결코 칭찬할 수 없다고 시작부터 말했고(17절), 마지막에도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라고 못 박았다(22절). 고린도 교회의 “주의 만찬”은 유익보다는 해로움이 더 컸다.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했다는 것이다.

21절을 보면 고린도 교회가 행했던 주의 만찬에서 일어난 상황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했다. 우리가 현재 행하고 있는 만찬 예배를 생각하면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성도들이 모두 달려들어 서로 떡을 떼어 먹으려 한 것인지,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배부르고 취하게 된 건지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초대 교회 초창기에는 주의 만찬과 애찬을(유 1:12) 구분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애찬 전후에 혹은 애찬 중에 주의 만찬을 기념했다는 것이다. 당시 “주의 만찬”은 주로 저녁에 이루어졌고, 오늘날처럼 모든 성도가 먹을 음식을 요리할 주방이 없기 때문에, 음식은 주로 부유한 성도들이 준비해온 것으로(가난한 성도도 가져올 수 있었겠지만) 모두가 함께 나눠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마도 먼저 도착한 성도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성도들이었을 것이고, 자유롭게 시간을 사용하기 힘든 성도들, 그래서 저녁 식사에 늦게 도착한 성도들은 노예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고린도 인구는 약 70만 명인데, 그중 2/3가 노예였다. 그들은 22절에 나오는 것처럼 “빈궁한 자들”이었다.

고린도 교회 주의 만찬 시간에 벌어진 현상은 이와 같았다. 부유한 성도가 음식을 가지고 들어와서 식탁에 두고 자리에 앉는다. 교회 건물이 부유한 성도의 넓은 집이었다면, 식탁과 그 식탁을 둘러싼 누울 수 있는 의자로 구성된 특별한 방(트라클리니움)에 들어갔을 것이다. 먼저 도착한 부유한 성도가 “형제, 이리로 와서 앉아서 좀 들게”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가져온 음식을 실컷 먹고 배불렀고 마신 포도주로 기분 좋게 취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하루 종일 노예로 밭에서 땀 흘리며 일한 형제들이 교회로 들어온다. 트라클리니움엔 앉을 자리가 없어 건물의 남은 공간 중 아무 데나 자리를 찾아 앉는다. 만찬 식사를 하려는데 그들을 위해 남겨진 음식은 하나도 없다.

이 당시 큰 흉년이 예루살렘과 중근동 지방에 있었는데, 그런 상황을 감안하면, 가난한 성도들은 계속해서 굶주린 상태로 교회 안에서도 홀대를 받았던 것이다. 이런 일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면서,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라고 영접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라고 말하는 형제들을 무섭게 꾸짖었다. “너희는…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약 2:1-6).

사도 바울 역시 고린도 성도들을 무섭게 꾸짖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 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22절). 교회에 먹고 마시러 왔냐고 꾸짖었다. 그들의 행위는 빈궁한 성도들에게 수치심을 주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책망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나서 몇 년 동안 그들은 식사와 더불어 주의 만찬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시행했을 것이다. 예식은 반복하면 그 의미를 잃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주의 만찬은 하나의 식사 시간이 되어 버렸다. 많은 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애찬과 주의 만찬 예식이 분리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쨌든 바울은 그들에게 주의 만찬의 의미를 다시금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원이 무엇인지 되새길 필요가 있었다. 바울의 ‘기원’에 관한 설명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2. 기원(23-26)

첫째로, 바울은 주의 만찬이 자신이 만들어낸 예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이 표현은 전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출처가 “주께 받은 것”, 즉 주님께 있다. 이것은 역사적인 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바로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있었던 일이다.

누가복음 강해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제정하신 만찬 예식이 그 형식에 있어서 아주 새로운 것이 아니란 것을 확인했다.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월절 예식, 애굽에서 어린양이 흘린 피로 인해 온 이스라엘 가족이 구원을 받았던 사건을 기억하는 예식에 의미를 더하신 것이었다.

죄인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으실 예수님, 그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떡과 잔을 사용하셨다. 이 예식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먹는 등 오감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기억하는 예식이었다. 예수님께서 한 떡(덩어리)을 떼어 나눠주시는 것을 눈으로 본다. 잔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건네주심을 본다. 그들은 건네주신 떡과 잔을 손으로 받는다. 그리고 입으로 먹고 마신다(향기). 그리고 귀로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시는 의미를 전해 듣는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메시지가 그들이 오감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의 목적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24절).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25절). 떡과 잔을 나눌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메시지는 모두 그분의 “죽으심”(26절)과 관련된 메시지였다. 한 떡이 여러 조각으로 찢겨나가는 것처럼,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찢겨 죽임을 당하셔야 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의 확증으로 어린양이 피를 흘려 죽어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흘리신 보혈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언약(겔 37:26; 히 13:20), 평화의 언약(민 25:12)을 맺으셨다.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눌 때 각각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4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25절). 무엇을 기념하라는 것인가? 예수님을 기념하라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 사이에 영원한 화목을 가져오기 위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며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유월절 저녁 식사이자 최초의 “주의 만찬”이 바로 이런 배경에서 행해졌다. 주님이 잡히시던 밤, 자기 몸으로 친히 제자들을 위해 행하실 일을 떡과 잔을 통해 설명하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고 피를 흘려 돌아가셨다. 한 가지 감동적인 부분은 주님께서 24절에 말하듯, “축사하시고” 만찬을 제정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정말로 기뻐하고 감사하셨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몸 내어주기를 기뻐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교회의 영원한 연합(수직적) 그리고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로 거듭난 모든 성도의 연합을(수평적) 가져오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였다. 주의 만찬은 바로 이런 아름다운 연합과 그 연합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행하는 주의 만찬엔 연합이 없었다. 대신 분쟁이 있었다. 주의 만찬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심지어 주의 죽으심에 대한 감사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이 행하는 예식이 원래 주의 만찬이 강조한 연합의 원리에서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는 것에 있다. 

26절에 사도 바울이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하는 것처럼,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 주의 만찬이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 예식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 주의 죽으심과 그 죽으심이 가져온 아름다운 연합의 메시지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급별로, 귀천에 따라 성도를 차별하고, 끼리끼리 모여 누구는 배부르고, 누구는 굶주리는 방식으로 주의 만찬을 행하는 것은 단지 기분 나쁘고 감정 상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의 만찬이 기념하는 핵심을 어긋나는 것이었고, 하나님과 교회를 업신여기는 무서운 죄였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는데, 30절을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 가운데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았다. 비유적인 표현으로 허약해지고 병든 성도, 심지어 죽은 성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교훈을 얻는다. 만찬을 업신여기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만찬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심판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3. 해결(27-34)

왜 하나님은 만찬 예식을 이토록 중요하게 여기셨는가? 그 정신에서 벗어난 이들을 무섭게 심판하셨는가? 바울은 27절과 29절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27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9절).

많은 사람이 이 두 구절의 말씀 때문에 떡과 잔에 참여할 때 어느 정도 두려움을 느낀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신다’,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신다’라는 말의 의미가 조금은 모호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뒤따르는 말씀은 이해하기 쉽다.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 이것은 주의 몸과 피의 의미를 훼손하고 업신여기는 죄를 짓는 것이라는 의미, 떡과 잔에 참여하면서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면 무엇이 ‘합당하지 않은 것’, ‘분별하지 못한 것’일까? 어떻게 먹고 마시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업신여기는 죄를 범하는 것일까? 만일 이것이 개인의 경건과 거룩함에 관련된 것이라면 실천하기 매우 어렵다. 바울은 28절에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명령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고 느껴진 사람만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떡과 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찬 앞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어느 정도 유익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맥 안에서 볼 때 바울은 분명히 다른 측면에서 “자기를 살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성도의 연합이다. 한 떡과 한 잔에 참여하는 형제자매가 서로 분쟁하여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 이루어낸 연합을 역행하는 그런 죄를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 오실 때까지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시며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에 역행하는 일을 공동체가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여기에 매우 합당한 명령을 주셨는데,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명령이다(마 5:23-24). 성도의 연합을 망치는 일은 새 언약을 기념하는 제사뿐만 아니라 옛 언약의 제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제사 전에 살펴보고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이 원리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하나님은 직접 손을 들어 고린도 교회를 판단하고 징계하셨다.

바울은 31절에 만일 그들이 “살폈으면 판단(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32절에서는 그들이 받은 “판단”이 주님의 “징계”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징계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 중 몇 사람을 병들게 하고 죽이심으로 교회를 세상과 다른 거룩한 공동체로 깨끗하게 하셨다. 교회가 세상과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분리시켜 그들의 거룩함을 지켜내기 원하셨다. 

이것은 은혜다. 하나님은 주의 만찬을 업신여기는 교회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세상과 똑같이 변질되어 괴사하도록 놔두지않으셨다. 교회를 징계하셔서 바로 잡기 원하셨다. 사도를 통해 주의 만찬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하셨다. 그 목적은 다시금 주의 만찬을 통해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에 합당한 은혜를 만찬을 통해 풍성히 누리게 하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만찬에 대해 할 말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34절을 보면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고린도를 방문하기 전에 급히 처방을 내렸는데, 그것은 33절에 나오는 것처럼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기다리고, 모두에게 음식이 적절히 돌아갈 수 있도록 챙기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기다리면서 너무 배고프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혹시 누가 그렇게 물을  줄 알았는지 바울은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라(34절). 주의 만찬은 단지 식사 시간이 아니니, 정 배고프면 집에서 먹고 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계속 그런 식으로 주의 만찬을 행한다면 세상 사람은 그들 모임을 통해 절대로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손가락질할 것이다. “세상이나 여기나 부자는 잘 먹고 가난한 사람은 소외당하고, 똑같구나.” 또한 하나님은 만찬을 통해 어그러지고 뒤틀린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를 그냥 놔두지 않으실 것이다. 고린도 교회를 이미 판단하고 심판하신 주님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그들을 바로잡기 위해 징계하실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하나님은 교회가 주의 만찬을 통해 복음을 오감으로 경험하기 원하신다. 주의 만찬에서 우리가 보고 만지고 먹고 맡고 선포하는 것을 통해 실제로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원하신다. 그것이 만찬을 통해 교회가 누리는 은혜다. 우리는 만찬을 통해 복음을 오감으로 경험하고 우리의 행위와 말로 복음을 전파한다. 서로서로에게 전파하고 만찬을 밖에서 구경하는 이들에게(외인) 전파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

만찬을 업신여기는 교회, 다시 말해 만찬이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뤄낸 아름다운 일을 역행하는 죄를 범하면서 만찬을 행하는 교회는 만찬이 은혜의 방편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의 방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교회를 징계하고 바로 잡아 다시금 만찬을 통해 복음의 은혜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적용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찬에 참여하고 있는가? 세 가지 정도의 실천 사항이 있다. 

첫째,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모든 성도는 실제 자신의 삶과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행위로 증언하는 복음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특별히 다른 성도와 등을 지고 있거나 불편한 관계, 심지어 원수로 지내면서 매주 떡과 잔을 먹고 마시며 복음을 선포하는 가식적이고 역겨운 일을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역겨운”이란 말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불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설교자가 “아내를 진심으로 내 몸 처럼 사랑하자”고 외치는 행위가 역겹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가? 떡을 떼고 잔을 마시고 입술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교회를 중징계하신 것이다. “자기를 살피고” 참여하라. 다시 말해서 바로 잡고, 모든 성도와 복음에 합당한 연합, 화목을 만들고 참여하라.

둘째, 우리 교회의 만찬 예배 형식은 형제가 회중을 대표로 말씀을 낭독하고 기도하는 것, 합당한 찬송을 선택하여 함께 부르는 것으로 진행된다. 대표로 인도하는 자리에 선 사람은 만찬이 담고 있는 복음에 합당한 내용으로 성도를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만찬에 참여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복음을 역행하는 삶을 청산해야 하고, 만찬에 참여하는 태도 역시 자랑하거나 나를 내세우거나 빠짐없이 참석하여 열심을 보여주려는 태도여서는 안 된다.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교회의 연합과 복음의 선포,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순순한 동기로 무장해야 한다. 또한 평가에 흔들리지 마라. 덕이 되는 말에 감사하되,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쭐대거나 낙심하지 마라.

셋째, 회중을 대표하여 만찬을 인도하는 형제들을 판단하지 말라. 물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떡에 소금을 쏟으면 너무 짜서 먹을 때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포도주 먹을 때). 조언이 되는 말, 세워주는 말로서 우리는 겸손하고 온유하게 격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찬 시간을 그런 시간으로 만들지 말라. 만찬 시간을 품평회 시간으로 삼지 말라. 당신의 손으로 한 떡을 찢고 한 피를 마시면서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된 복음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는 것과 한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입법자와 재판자 되신 하나님께 그 자리를 돌려드리고 예배자의 자리에 앉아라. 그리고 다른 성도와 함께 주의 만찬에 신령과 진정으로 참여하여 복음을 전파하라.

유평교회 매주 드리는 만찬이 복음을 선포하고 은혜를 누리는 귀한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축복하는 일에 사용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