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형 선고받은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 Part II
본문: 누가복음 23장 13절~25절
설교자: 조정의

 

금요일 아침, 밤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심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새벽부터 빌라도와 헤롯에게 각각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총 5번의 재판 끝에 이제 마지막으로 빌라도 앞에 다시 서서 예수님은 최종 판결을 받으실 것이었습니다. 이 재판에서 예수님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고 간 죄의 심각성 그리고 그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깊이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1. 빌라도의 판결(13~16)

13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빌라도는 최종 판결을 내리기 위해 무리를 불러 모았습니다. 무리 중에는 유대인 최고 지도자였던 대제사장들 그리고 관리들(서기관, 장로들)이 있었고, 많은 백성도 함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 각 계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의 전형적인 심문 절차에 따라 예수님을 심문했고(체포-고소-심문-판결) 그에 따른 판결이 무엇인지 차례차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뒤따르는 빌라도의 말은 마치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체포고소가 있었다고 빌라도가 말합니다. 

14절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빌라도의 말대로 그들은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 앞에 끌고 왔고,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고 고소했습니다(백성을 미혹한다는 구체적인 고소 내용: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함, 자칭 왕 그리스도라 주장함, 눅 23:2).

그리고서 빌라도는 내가 그 고소에 대해 심문했다고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다.” 빌라도는 로마법대로 고발 내용을 근거로 관정에서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무리에게 법대로 재판했음을 조목조목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체포했고, 나에게 고발했고, 내가 심문했다. 이렇게 법대로 하나하나 제대로 처리하였고, 이제 판결이 남았다. 

그리고 이것이 빌라도의 판결입니다.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14절)

이 사람은 백성을 미혹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세금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왕이 되어 황제를 반역한 일도 없다. 

모든 고발 내용에 대해 무혐의, 한 마디로 ‘무죄’라고 판결한 것입니다.

빌라도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의 판결을 지지하는 또 다른 판결이 있었습니다. 갈릴리를 다스리는 지역 통치관, 헤롯 안디바 역시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빌라도는 헤롯의 재판 결과를 무리에게 알려 자기 판결이 정당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15절)

헤롯이 그를 그냥 다시 돌려보낸 것을 보라. 나만 예수를 무죄라 생각한 게 아니고, 헤롯도 또한 그렇게 판결했다는 게 아니냐.

그리고 빌라도는 마침내 이렇게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15-16절)

로마법에 따라면 예수님은 사형죄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사형에 처할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바르게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곧바로 예수님께 태형을 선고합니다. 빌라도가 봤을 때 예수님이 매 맞을 짓을 했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죄가 없으면 풀어줘야지 왜 매를 댑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을 때려서 놓겠다고 말한 이유는 예수님을 고발한 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죽일만한 죄는 없으니 법대로 죄수를 놓아주긴 해야겠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성화니 때려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백성을 두려워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많은 나라를 정복하여 엄청난 영토를 차지했는데, 피정복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빌라도 같은 총독을 지역마다 세웠습니다. 로마 황제가 총독에게 바라는 건 아주 분명했습니다. 다스리는 지역의 치안과 평안, 그리고 정확한 세금 징수입니다. 민란이 일어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거나, 반역이 일어났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 지역에 배정된 총독은 황제 눈 밖에 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미 몇 차례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수도 사업을 하기 위해 성전 금고를 사용하려 했고, 유대인이 우상숭배로 여겨 혐오하는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행군하여 들어가 수많은 유대인이 농성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도 한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빌라도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던 자들을 그 자리에서 죽인 사건입니다(눅 13:1~2). 이 사건은 유대 전역에 퍼져 큰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이 모든 소동이 황제의 귀에 제대로 전달됐다면 빌라도는 아마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같이 전과가 많은 사람으로 한 번만 제대로 소동이 크게 일어나면 큰 낭패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죄”라는 정확한 판결과 상관없이 예수님에게 태형을 내리려 한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죄 없는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줬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마 27:18; 막 15:10). 하지만 그는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태형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이 판결에 만족했을까요? 그들의 반응을 들어보십시오.

2. 백성들의 항소(18~21)

18절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하니 19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백성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의 판결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엄청나게 흥분하여 큰 목소리로 소리 질렀을 것입니다. “일제히” 소리 질렀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반응했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이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 갑자기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말했을까요? 먼저, 바라바는 누가의 설명대로 “민란을 꾸미고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되어 옥에 갇힌 죄수였습니다(막 15:7). 그는 “유명한 죄수”였습니다(마 27:16). 성중에서 적지 않은 민란을 일으킨 널리 알려진 반역자였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총독이 백성이 요구하는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어 자비를 베푸는 전례가 있었습니다(마 27:15; 막 15:6). 우리에게 광복절 특사와 같이 특별사면 제도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백성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마 27:17). 이에 대한 대답이 “우리는 바라바를 원한다. 예수는 죽여라”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고발하여 넘긴 사람은 대제사장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시기하여 예수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마 27:18). 나머지 백성들은 이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명백한 죄가 드러난 유명한 죄수 바라바와 무죄 판결을 받은 예수님 중 누구를 놓을지 생각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당연히 누굴 놓으라고 말해야겠습니까? 무죄 판결을 받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을 없이 하고(죽이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참 충격적인 반응입니다.

바라바는 대제사장과 관리들이 고발한 내용을 실제로 범한 사람이 아닙니까? 민란을 꾸며 백성을 미혹했고 그 과정에 사람을 죽였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로마법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아닙니까? 그 바라바와 심문 결과 죄가 없다고 판결이 난 예수 중 누구를 놓을 거냐는 질문에 어떻게 바라바를 선택할 수 있을까요?

마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마 27:20)

백성들은 무지하여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말을 그대로 듣고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 제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그랬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들끓는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사람을 두려워하여 판결을 굽혔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지하여 자기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후에 사도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할 때에 이 사건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 3:13-15)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7, 19)

백성들은 얼마나 무지한지 의로운 예수님을 죽이고 살인자를 놓아주기를 일제히 소리 질러 구했습니다. 생명을 빼앗은 자를 원하고 생명의 주를 거절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죄가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시기하는 죄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빌라도처럼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매 순간 위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무엇이 선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무지함이 은연중에 우리 삶에 만연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런 죄에 넘어지고(분노, 비방, 용서하지 않음, 감사하지 않음) 그래서 이 죄를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바로 이 죄가 무죄한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죄는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의 무게를 측량해보십시오. 죄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작아 보일지라도 우리의 그 죄가 무죄한 예수님을 죽음까지 몰고 갔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으려 하여 바라바를 내세웠지만 그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도대체 백성들은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요? 때려서 놓겠다고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바라바랑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더니 오히려 바라바를 택하고, 무리는 이 예수에게 어떻게 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까요? 

빌라도는 법적으로 무죄인 예수를 놓아주고 싶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진지하게 따져 묻습니다. 그리고 무리에게서 충격적인 요청을 들었습니다. 백성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게 된 것입니다.

20절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절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십자가. 그들이 예수님에게 내리고 싶었던 판결은 바로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왜 이것이 충격적일까요? 로마에는 사형 방법으로 십자가형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목숨을 끊는 형벌이지만 고통의 순간은 짧습니다. 십자가형은 다른 방식에 비해 아주 잔인하고 고통의 시간이 매우 길며 그 방법이 정말 수치스럽고 모욕적이라 로마 시민은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십자가형은 받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노예나 국가의 가장 악독한 범죄자, 흉악범을 처형할 때만,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고 경고하려고 이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무죄’ 판결이 내려진 예수님을 그 잔혹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 질러 요청한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이 예수가 모욕적으로 비참하게 죽으면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수는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참 그리스도이십니다. 시기와 비방,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법에 무지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절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나무에 달려 그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신 21:23; 갈 3:13).

여러분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수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죄 때문에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입니까? 

빌라도에겐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만한 죄를 지은 사람으로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씁니다. 이제 마지막 그의 노력과 그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3. 예수님의 사형(22~25)

22절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빌라도는 참으로 여러 번 백성에게 자신의 판결을 확실하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 “그는 무죄다”, “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러는 것이냐?

죄 없는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어 애썼습니다. 그의 아내가 간밤에 꾼 꿈을 말하며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사람을 보내 간청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마 27:19). 법대로 다스려야 할 통치자로서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빌라도는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놓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은 이런 방법으로 백성의 마음을 돌리려고 시도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요 19:1-3)

빌라도는 예수님을 관정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을 시켜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영화에서 본 아주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채찍을 상상하시겠지만 그건 후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고 나서의 일입니다(마 27:26; 막 15:15). 여기서는 그보다 훨씬 덜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주요 목적이 예수님을 죽기까지 때리는 것이 아니라 고발한 자들을 설득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채찍질을 당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게다가 군인들이 가시로 엮은 십자가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아마도 근처에 있는 대추야자 나뭇잎을 엮어 만든 것일 텐데 크고 굵은 가시가 많이 난 가지로 직경 30cm가량의 고리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굵고 기다란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지면서 살을 찢고 파고들어가 피가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
내게 되었는데 그가 가시 면류관 쓰셨네
(조준모, 나무에 달린자)

군인들은 또한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로마 군인이 입는 망토를 예수님의 어깨 위에 걸친 것입니다. 가시관과 자색 옷은 예수님의 죄목인 “유대인의 왕”을 비웃고 희롱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 앞에서 왕에게 예의를 차리듯 꿇어앉아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소서”, “유대인의 왕 만세”를 외치며 희롱하고, 손을 들어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많은 조롱과 구타를 당하신 예수님을 끌고 빌라도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9:4). “보라 이 사람이로다”(19:5).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머리엔 가시면류관이 쓰여 피를 흘리고, 얼굴은 맞아서 벌겋게 부어올랐고 자색 옷을 걸친 꼴이 참으로 우습고 처량하게 그들 눈앞에 보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본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23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했습니다. 상처 입은 예수님을 보고도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죄가 이토록 무섭습니다.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와 고난과 수치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습니다. 무지와 교만과 시기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이천년 전 빌라도 법정 앞에서도 그랬고, 지금 구세주의 십자가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죄는 구세주의 희생과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습니다. 냉랭합니다. 자기 욕심을 더 사랑합니다.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정말 무지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그의 제자가 된 우리도 죄의 무서움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사랑하여 죄를 택할 때 우리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가 그 죄를 담당하기 위해 당하신 슬픔과 고난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됩니다. 내 눈앞에 있는 욕구를 채우는 것이 급하여 가시관 쓰고 피 흘리며 희롱당한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분노할 때, 시기할 때, 사람을 두려워할 때, 비방할 때 주가 그 죄 때문에 당하신 모욕과 수치를 기억하십시오.

백성들은 빌라도를 점점 더 압박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요 19:12), ‘이 사람은 자칭 왕이라 하니 가이사의 반역자가 분명합니다’(요 19:12).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요 19:15). 당신은 이 사람이 가이사와 같은 왕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래서 놓으려고 하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점점 빌라도를 압박했습니다.

결국 계속해서 예수를 놓으려 했다간 민란이 일어날 게 분명해지자 빌라도는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23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절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절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 전에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했습니다(마 27:24). 대제사장들이 가룟 유다에게 한 말, “네가 당하라”를 그들이 듣게 된 것입니다. 백성은 이에 다 대답하여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27:25). 그리고 예수님은 군인들의 손에 넘겨져 준비된 순서대로 십자가형이 진행됐습니다.

대제사장은 유다에게 “네가 당하라”고 말했고,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백성에게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며 “나는 죄가 없다”고 했지만, 사실 예수님이 당하신 수치과 고난에 무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히 9:28)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죄에 대한 대가를 그분이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찔리신 건 우리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이 상하신 건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분이 징계를 받으신 것은 죄 때문에 단절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함이고, 그분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가 이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을 입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사 53). 그분이 당하신 모든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여러분,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죄에게 져서 죄가 원하는 대로 살지 마십시오. 그러기엔 우리가 진 사랑의 빚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이 사랑을 몰라보고 무지한 가운데 머물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위해 모든 수치와 고난을 적극적으로 참아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받은 이 큰 사랑에 대해 무지한 자로 살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 사랑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