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누가 누구에게

본문: 디모데전서 1장 1-2절

설교자 : 이병권

 

디모데전서는 목회서신으로 분류되는 편지입니다. 성경에 목회서신으로 분류되는 세 편지가 있는데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 그리고 디도서입니다. 목회서신은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다르게 말하면 선배 목회자가 후배 목회자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래서 목회서신은 교회를 섬길 때 잊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교훈들 타협할 수 없는 기준들 그리고 목회자를 향한 격려와 도전이 담겨있습니다.

디모데전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부르심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성도님들께도 그러한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직분이 다르고 맡겨진 일은 다를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부르심 받은 자로서 내가 어떤 자세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그 기준과 원리를 배우고 열정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이고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편지의 서론입니다. 그럼 우리가 편지의 서론을 읽을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가 편지의 서론을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편지를 쓴 사람과 편지를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2)

오늘 본문은 이 편지가 누가 누구에게 쓴 것인지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그러고 나서 간단한 축복의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통해서 누가 누구에게보내는 편지인지 조금씩 관점을 달리하면서 말씀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질문,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입니까?

첫째로 이 편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두 이름이 나옵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우리가 이 편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바울과 디모데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편지를 썼는지 왜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이 편지를 쓴 목적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 번의 전도 여행을 마치고 사로잡힌 상태로 로마로 갑니다. 로마에 있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자유가 보장된 가택구금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찬양했고 빌립보 교회에게 그들의 기도와 후한 지원을 칭찬했습니다. 빌레몬에게는 그의 달아난 노예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줄 것을 설득했고 에베소 교회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연합할 것과 마귀의 공격에 당당히 맞설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은 스페인으로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사이에 마게도냐와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가 거짓 교사들이 전한 다른 복음과 거짓 교훈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페인으로 가기 전에 먼저 교회들을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소아시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에베소에는 디모데가 사역하고 있었는데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과 맞서서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어려움 가운데 있는 디모데를 돕기 위해 사역과 관련해서 실제적으로 가르침을 주려고 이 편지를 씁니다.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략 AD 64년에서 65년 정도에 1차 로마 투옥이 끝난 후,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것이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인가에 대한 첫 번째 대답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디모데가 거짓 교사들과 교회의 여러 어려움에 맞서서 힘겨운 사역을 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그를 돕기 위해 편지를 씁니다.

그러면 바울이 쓴 이 편지가 디모데에게 도움이 되었을까요? 경험 많은 선배가 젊은 후배에게 여러 조언을 하며 가르침을 전하는 것,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이 편지는 가르침으로 오는 도움이 전부는 아닙니다.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에게 붙어있는 수식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1)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이 사도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제자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을 가리켜 사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이 편지는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쓰고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지혜에 따라 필요한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 경험에서 나오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예수님의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함께 했던 제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을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특별하게 그를 직접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그를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고 다시 그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사명에 따라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1)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된 것입니다. 내가 되고 싶어서 내가 하고 싶어서 내 뜻대로 내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 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질문을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입니까?

둘째로 이 편지는 사도가 목사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가 목사에게

바울은 사도로서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 편지를 썼고 편지를 받는 디모데는 그러한 권위로 인정받아 에베소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지만 이 편지는 개인이 개인에게 보내는 사적인 편지가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디모데뿐만 아니라 디모데가 섬기는 교회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로 마지막 인사를 보면 바울은 편지를 받는 대상을 복수로 말하기도 합니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6:21)

비록 수신자는 디모데이지만 바울은 편지의 모든 내용을 여러 교회에서 공적으로 읽게 할 의도로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사도로서 목사인 디모데를 세워줍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보낸 것처럼 바울은 디모데를 보낸 것입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사도인 바울에 비해서 디모데는 아직 어리고 경험도 적고 여러 면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디모데에게 명합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4:12)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디모데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를 가지고 에베소 교회를 섬기고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도와 목사라는 직분으로 이 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디모데를 교훈하는 것은 단순히 일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일은 경력 있는 선배가 신입 사원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일이 아닙니다. 사역은 어디까지는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고 주님의 일은 새로운 관계 안에서 그 일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으면 교회에서 하는 일이나 직장에서 하는 일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활동들이 단순히 일 중심이 되어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관계’입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2)

다시 오늘 질문에서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입니까? 관계적인 측면에서 보면,

셋째로 이 편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울과 디모데는 영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참 아들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결혼 관계에서 합법적으로 태어난 자녀를 말합니다. 디모데의 가족 관계를 생각하면 이 의미를 좀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지만 아버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법은 디모데를 사생아로 취급합니다. 합법적인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어떠합니까? 디모데는 영적으로 바울의 참 아들이 되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는 바울의 가르침과 본을 성실하게 따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처럼 디모데가 바울을 따랐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다른 편지에서도 바울이 디모데를 어떻게 말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고전 4:17)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2)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 바울을 아버지와 같이 대하며 함께 수고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주 안에서 아들로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디모데를 향한 사랑을 생각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속에서, 디모데를 생각했고 에베소에서 수고하고 있는 아들을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 그 이상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의 안녕과 그의 영적인 성장과 그가 주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일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들과 같은 디모데도 주님의 역사하심을 그의 사역 가운데 늘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이 이러한 편지를 썼던 것은 바울이 디모데의 성품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 수고 할 때 교회에서는 디모데를 자격 없는 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적대적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양한 공격 속에서 나이 어린 디모데는 풀이 죽어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기질적으로 계속적인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번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 표현으로 하면 디모데는 좀 소심한 면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는 육체적으로 연약했고 반복되는 위장병으로 고생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약점들은 사람들의 공격거리가 되었고 스스로도 자격 없음을 생각하고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약함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게 합니다. 이것이 디모데에게 얼마나 도전적인 과제인지 누구보다 바울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바울은 사랑을 담아 축복의 말을 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2)

이렇게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질문,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입니까? 이 편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도가 목사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더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편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쓴 편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보내서 사역을 감당하게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한 교회로 모여서 각자 주님의 일을 감당하며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맡은 일과 분량은 다르지만 각자가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부르심에 따라서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합니다.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나를 보내신 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얼마나 사랑이 많은 분이신지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전합니다. 우리의 구주 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되시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도입니다. 우리는 아직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그분이 나의 왕이 되셨고 그 왕이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나를 이 땅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내가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맡기셨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계속해서 주님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어떤 일이 내 눈에 들어오고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는 지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시고 주님을 위해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주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세상에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죽지 마시고 주님의 이름을 당당하게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나를 보내신 주님의 아름다움을 선전하시기 바랍니다. 내 삶으로, 내 입술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새로운 관계 속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주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 삶 가운데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내일을 기대할 수 있고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자녀 삼으시고 주님의 귀한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주님을 기뻐함으로 하는 일입니다. 물론, 때때로 그 기쁨을 잃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지치기도 하고 왜 나만 이렇게 힘든가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편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일이 많은지 피곤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시선을 일에 빼앗기지 말고 일 너머에 있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왜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나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주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주님을 위해서 뭐라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일이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이라면 주님을 위해 내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가 그 일을 주님을 위해 불평 없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건강을 주셨고 섬길 수 있는 힘을 주셨고 시간을 주셨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하셨고 누군가를 찾아가 위로할 수 있게 하셨고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수고를 통해서 누군가가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작고 부족한 나를 통해 주님께서 그 선하신 일을 이루어 가신다면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누군가가 나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 삶의 기쁨이 되고 섬김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