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2대로
본문: 갈라디아서 4장 21~31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 인생에서 선택에 따라 걸어가는 두 개의 대로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다양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개의 길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대로” 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대로”입니다. 우리 인생은 늘 이 두 길을 두고 고민합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많은 경우에 우리는 “말씀대로”를 가기보다 “생각대로”를 갑니다. 아담 때부터 그러했습니다. 인생은 “말씀대로”보다 “생각대로”를 좋아합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의 모습도 그와 같습니다. 다른 복음에 빠진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 말씀대로를 벗어났고 거짓 형제들이 안내하는 생각대로에 접어든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 유대인이 되어야 원하는 목적지, “”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를 가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 바울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교훈하기도 했고 책망하기도 했고 논증하기도 했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지금까지의 율법에 대한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1)

바울은 율법 아래라는 말을 3장에서부터 여러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율법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인데, 율법에 매여서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루려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말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데 정작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한 번 봐라’

바울의 의도가 이러합니다. ‘너희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을 제대로 안다면 그 아래에 있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정작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율법의 행위를 따르는 것이 좋아 보이고 그렇게 할 때 내가 뭔가를 성취한 것 같고 다른 사람과 달라 보이고 뭔가 더 우월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일시적으로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율법을 따르는 것은 생각대로를 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따라 내 경험에 따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따라 그렇게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실수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생각대로를 가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 후회를 하는 겁니다. 가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가기 전에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 당시의 성경해석방법을 사용해서 논증합니다. 세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단계, 비유적 단계, 개인적 단계입니다. 이 세 단계는 사실, 의미, 적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율법이 무엇을 말하는지 바울이 안내하는 말씀대로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 단계입니다.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22)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대표할 수 있는 아들이 두 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고 말씀을 따라 약속의 땅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아브라함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사라는 여전히 불임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브라함과 사라는 초조해집니다. 그들은 늙어갔고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아브라함은 85세가 되었고 사라는 75세가 되었습니다.

사라는 기다리는데 한계를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그러는 것처럼 사라는 나름의 방법을 씁니다. 그 당시 통용되는 방법으로 자신의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리모 출산이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종이 낳은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라는 생각대로를 갑니다. 자기 생각대로하는 겁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좀 달랐을까요?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아브라함도 사라와 같이 생각대로를 갑니다. 사라가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사라의 말대로 아브라함은 하갈과 동침했고 하갈은 임신을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여종에게서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아들이 태어났으니 이제 더 행복해졌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문제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 결과로 가정에 다툼이 생겼고 분열과 아픔이 찾아옵니다. 생각대로를 갈 때 우리는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 시간은 흐르고 또 흐릅니다. 14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났고 이제 두 사람은 자녀를 생각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다 되었고 사라가 90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역사하십니다. 이미 폐경이 되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던 사라가 아들을 낳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대로 태어난 아들이 이삭입니다.

이 장면을 창세기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창21:1-3)

여기서 반복되는 말이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과 ‘사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강조됩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그 말씀대로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3)

여기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한 아들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났습니다. 반면에 다른 아들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났습니다. 한 아들은 사람의 생각대로태어났고 반면에 다른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태어났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두 번째 비유적 단계입니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4-26)

바울은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와서 비유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을 풍유적인 해석 혹은 알레고리라고 하는데 바울이니까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갈과 사라를 대조하면서 두 여자를 두 언약으로 말합니다. 하갈은 옛 언약으로 시내산과 이 땅의 예루살렘으로 연결하고 사라는 새 언약으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연결합니다. 이런 대조는 종이냐 자유인이냐, 하갈과 사라에게 있었던 근본적인 차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시내산과 이 땅에서의 예루살렘과 하갈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 같은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종이라는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양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자기 노력이 될 수 있고 도덕적인 규례가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될 수 있고 종교적인 전통이나 관습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종이라는 같은 결과를 거두게 됩니다. 자기 행위에 매여서 종노릇하며 절대로 자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그것이 자기 의가 되었든지 도덕이 되었든지 율법의 행위가 되었든지 모두 같은 재료로 만들어집니다. 만약 각각을 가지고 와서 성분을 분석하면 무엇이 나올까요? 거기에는 하나님 말씀이 아닌 사람의 생각이 나옵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은 종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함으로 자기 생각대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것은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열매는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고,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이 그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을 내세워서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고 자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유가 필요한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8:33)

그들은 자신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참된 자유는 혈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따를 때 다시 말해 “말씀대로” 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이 비유는 갈라디아 교회가 더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두 아들의 이야기를 갈라디아 교회에 적용합니다.

세 번째 개인적 단계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

갈라디아 교회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에 걸쳐 “그러나”로 말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29-30)

바울이 두 아들 이야기를 적용하면서 언급하는 것,

첫째는 우리에게 박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도 그러하도다” 지금도 박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약속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며 박해를 했던 것처럼 여종의 아들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약속의 자녀들을 박해할 것입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처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거짓 가르침으로 박해하기도 하고, ‘하라, 하지 말라’라는 수많은 명령들을 열거하면서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 할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유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박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유업이 있습니다. 여종과 그 아들은 유업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유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31절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1)

바울이 교회를 향해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종의 자녀가 되려고 합니까? 왜 다시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합니까? 왜 다시 종이 되려고 합니까? 지금 여러분은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을 전한 자들은 결국 내쫓김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고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똑바로 보십시오.

세상의 종교와 철학은 구원이 선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복음은 구원이 사람의 선함이나 행함에 달려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복음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 선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나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의를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의를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은 나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의를 얻으려 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지만, 복음은 사람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든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든지 무슨 일을 해왔든지 얼마나 도덕적인 사람인지 관계없이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종교는 인내심이 많고 도덕적이고 의지가 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만, 복음은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혁명과도 같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선포합니다. 죄 값은 모두 치려졌고 내가 더 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무죄로 판결이 났고 재판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고 그 생각대로 하려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너무 멀리 있어 잡을 수 없는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절대로 그곳에 이를 수 없습니다. 가는 길을 잘못 택한 것입니다. “생각대로”는 아무리 가도 의에 이를 수 없는 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27절의 말씀으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27)

바울은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말하면서 이사야 54:1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잡혀갔습니다. 심판받은 이스라엘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로 비유됩니다. 하지만 훗날 이스라엘은 남편을 둔 어떤 여인들보다 더 많은 자녀를 둔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패배했고 포로가 되었으며 그 땅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희는 연약하지만 내가 너희를 크고 위대하게 만들겠다.’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하십니까? 그들의 수고를 통해서 하십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 사라가 어떻게 아들을 낳았는지를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잉태하지 못한 여인이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홀로 사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많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있기에 하나님이 말씀대로 하시기에 말씀을 신뢰함으로 말씀대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사라가 어떻게 이삭을 낳았습니까? 이스라엘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낳을 수 없었던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의 집안에 또 다른 여인이 ‘낳을 수 없었던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이 여인은 사라와는 달리 불임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녀는 처녀였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했으므로 임신은 생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 여인을 통해 한 아들이 태어나게 하셨고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온 인류에게 선물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천사를 통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응답합니까?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질 것임을 고백합니다. 말씀대로 됩니다. 죄인이 어떻게 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말씀대로 됩니다. 어떻게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유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말씀대로 됩니다. 내가 뭔가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신뢰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그 능력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그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생각대로는 보기에 더 쉬운 길이고 보기에 훨씬 더 매력적인 길입니다. 하지만 말씀대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만나는 계속되는 선택의 순간들 속에서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생각대로입니까? 아니면 말씀대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