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형제의 죄를 어찌할꼬

본문 : 갈라디아서 6장 1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볼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과 그 명령을 순종하는 방법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1)

바울은 구체적인 권면을 시작하면서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하려고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지금 형제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형제 된 자들에게,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어 주님을 따르고 있는 교회에게 이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어떤 형제의 죄에 대해서 교회가 다루도록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개인적인 일인데 왜 그걸 교회가 간섭 하냐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죄는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지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이 형제라면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가 한 몸이기 때문에 죄는 전체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는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고전 12:26)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이며 가족이기 때문에 지체의 죄는 교회의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책임 있게 죄를 다루어야 합니다. 교회가 죄를 잘못 다루거나 죄를 방치하거나 죄를 그냥 내버려두면 죄는 전체에게 영향을 주고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모두에게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했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명령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바로잡고”입니다. 좀 더 명령처럼 들리도록 말하면 ‘바로 잡으라’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죄를 범했을 때,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5:19-21)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것들이 누군가의 삶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바로 잡으라는 명령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바로 잡으라는 명령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 말씀에서 바로 잡으라는 단어의 의미는 고장 난 부분을 고쳐서 원래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수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서는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잡으라는 말은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에 뼈가 어긋나거나 빠졌을 때 다시 뼈를 맞추어서 원래 자리에 두는 것을 말할 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뼈가 빠졌을 때 그냥 두면 어떻게 될까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요? 빠진 뼈를 그냥 두면 계속해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뼈는 절대로 원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계속 고통 가운데 있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빠진 뼈를 다시 원래 자리로 옮기는 것이 바로 잡는 것입니다. 다시 원래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로 잡아야합니다. 죄에 빠진 형제를, 죄에 빠진 자매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죄에 대해서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없으면 괜히 참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냥 방관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정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 사람을 멸시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혼자알고 있기에는 아까우니까 다른 누군가를 끌어들여서 함께 그 사람을 비난하며 욕할 수 있습니다. 원망과 비방으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방관하거나 정죄하고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잡는 일입니다. 죄에 빠진 지체를 회복시켜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우리가 바로 잡는 일을 할 때 어려움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뼈를 맞출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고통이 있습니다. 어긋난 뼈를 다시 맞추고 빠진 뼈를 원래 자리에 옮기려면 잠깐의 고통을 참아야합니다. 우리가 범죄한 형제를 바로 잡는 일도 그러합니다. 잠깐의 아픔이 있을 수 있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바로 잡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냥 두면 정상적으로 올바르게 생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두면 계속해서 고통 가운데 지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을 실제로 순종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질문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세 질문은 언제 바로 잡아야 하는지, 누가 바로 잡아야 하는지,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로 언제 바로 잡아야 합니까?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언제 바로 잡아야 합니까?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때입니다.

여기 드러난다는 말은 수동태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다른 형제의 범죄한 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때를 말합니다. 내가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죄에 넘어질 수 있고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죄가 없을 때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연약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감시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뭐라도 하나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서 눈을 부릅뜨고 있다면 어떨까요? 마치 먹잇감을 노려보고 있는 맹수처럼 마치 청문회를 하는 것처럼 어떻게든 죄를 찾아내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그렇게 애를 쓴다면 어떨까요?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서로의 죄를 들추어내고 서로의 죄를 폭로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로 한 몸이 되었고 한 주님을 섬기는 한 가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죄에 대해서 그 죄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때로는 죄를 지적하고 잘못을 알려주는 일보다 죄를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죄가 드러났을 때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그 사람을 범죄자로 보는 일입니다. ‘저 사람은 범죄한 사람이야’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도 죄로 인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단순히 범죄한 사람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도 유혹에 넘어가 죄라는 덫에 붙잡힌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죄는 어디까지나 죄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죄를 범한 형제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와 한 몸을 이룬 교회라는 사실을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죄에 대해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없고 누구든 죄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자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회복케 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잡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둘째 질문입니다. 누가 바로 잡아야 합니까?“신령한 너희는

누가 합니까? 신령한 사람이 바로 잡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또 질문이 생깁니다. 누가 신령한 사람입니까? 그동안 말씀의 문맥에서 생각할 때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5장에서 살펴본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으로 사는 사람 그렇게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신령한 사람이 형제의 죄를 바로 잡는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하면 안 되는 일이구나!’ ‘교회의 일꾼이나 성숙한 어른들이 하는 일이구나!’ 바울이 이런 의도로 ‘신령한 너희라고 말씀을 기록했을까요? 아닙니다. 죄를 다루는 일은 분명 조심스러운 일이기에 신령한 사람, 다시 말하면 영적이고 성숙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교회 모든 지체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성령님이 모든 지체 안에서 역사하고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 모든 지체가 성령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서 함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더 가까이 지내고 더 편하게 생각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모두 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친밀한 관계이면 좋겠지만, 연령이나 성별이나 성향이나 사는 곳이나 하는 일이나 다양한 조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더 많이 교제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지체마다 서로 친밀함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지체에 대해서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형제나 어떤 자매의 죄에 대해서 내가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마다 교회 리더들에게 와서 ‘저 자매, 이런 죄가 있는데, 좀 바로 잡아주세요. 저 형제, 저번에 저런 일을 했대요.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때마다 이렇게 고자질 아닌 고자질을 해야 할까요? 물론, 어떤 죄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죄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내가 지체의 죄를 바로 잡아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로 잡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어려움이 되지만, 어떤 경우는 반대로 너무 많이 해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가장 흔한 경우는 부부 사이입니다. 부부끼리 그런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보다 이러한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사이인데 때로는 너무 많이 해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신령한 너희” 신령한 자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 성령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누가 바로 잡아야 합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사람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더 성숙한 사람을 말할 수 있지만 특정한 사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신령한 사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의 죄를 바로 잡는 일을 내가 피하기 위한 핑계로 ‘난 신령하지 않으니까 안 해도 돼‘ 이렇게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신령한 사람은 모든 죄를 끊어버리고 흠 없이 순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누구도 난 신령한 사람이야! 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바로 잡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하지만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바로 잡아야 합니까? 내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의 죄를 드러나게 하셔서 나에게 보여주셨다면 내가 그 죄를 바로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해야 되는가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비유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맞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 강도를 구해주었습니까? 누가 그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까? 제사장도 아니었고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의 죄에 대해서 보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강도만난 자를 보고 그냥 지나갔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할까요? 강도만난 자를 도와준 사마리아인이 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

그래서 세 번째 질문입니다.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합니까?“온유한 심령으로

이 일을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유한 심령입니다.

형제의 죄를 바로 잡는 것은 나의 어떠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도 언제든 그 형제처럼 죄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자임을 알고 겸손한 태도로 그를 도와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가족이기 때문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한 몸된 지체이기 때문에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형제를 보고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며 도와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함은 바로 잡는 일을 할 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서 역사하실 때 이 온유함이 드러납니다. 성령님의 내 안에 계셔서 온유함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을 때 그럴 때 우리는 신령한 자로서 죄를 바로 잡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온유한 사람인지 간단하게 점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이나 고쳐야 할 부분을 지적받았을 때, 누군가로부터 그러한 충고를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누군가가 예의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이야기 한다하더라도 그 자체는 유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안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충고를 한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냥 무시합니까? 아니면 좋은 충고로 듣고 자신을 돌아봅니까? 상대방의 안 좋은 말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나에게 그러한 온유함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그러한 태도로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나에게 온유함이 부족하다면 주안에서 더 갖추어야 할 성품으로 알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더 주님 닮을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하나가 더 있습니다.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살펴보아라는 말인데, 쉽게 말하면 ‘주의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 성경은 “두려워하라”가 명령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래는 이 말이 없습니다. 번역하면서 추가된 말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이 이 부분은 더 잘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런 시험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회복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은 자신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다룰 때마다 눈을 크게 뜨고 나 자신을 더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우리도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얼마든지 죄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주의해야 합니다. 시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시험은 언제든 어디서든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도 죄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범죄한 형제와 동일한 죄의 유혹을 받을 수도 있고, 뿐만 아니라 범죄한 형제를 보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범죄한 형제와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며 자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며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성령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이며 주님이 함께 하신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죄에 넘어진 형제를 보면서 우월감에 빠져 형제를 멸시한다면 나 또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죄에 빠진 형제를 도우려고 하다가 오히려 내가 죄에 빠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욱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잡으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언제 바로 잡아야 합니까?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누가 바로 잡아야 합니까? “신령한 너희는어떻게 바로 잡아야 합니까? “온유한 심령으로그리고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주의하라”입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교회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한 주님을 섬기며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 가족으로 서로를 돌보며 함께 합니다. 그렇게 함께 살아가면서 때로는 누군가의 죄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죄가 우리 가운데 들어와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가인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자신은 모른다며 거짓말하면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9)

자신의 아우를 죽인 가인의 이 무책임한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형제의 죄에 대해서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내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까?’

맞습니다. 나는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나는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는 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고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죄로 고통 받고 있는 지체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서로를 사랑으로 돌아보고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누군가 죄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그를 붙잡아서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그러한 책임이 있는 관계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죄를 바로 잡는 일을 할 때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막상 어떤 말로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막막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다가갔을 때 상대방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습니다. 더 안 좋아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 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러한 일을 하고자 한다면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나의 능력이나, 나의 지혜나, 나의 어떠함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그 뜻 안에서 일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범죄한 형제를 죄로 인해 병든 자로 보고 불쌍히 여기고 함께 아파하며 그가 다시 건강하게 찾을 수 있도록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우리는 교회에서 검사가 될 수 있습니다. 죄를 들추어내고 그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의사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치료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누군가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검사가 되고 싶다 하더라도 의사가 되십시오. 힘들더라도 아픔이 있더라도 죄에 빠진 형제를 회복시키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