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본문: 누가복음 18장 1~8절
설교자: 조정의

 

군대에서 쓰는 말 중에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가 한 달같이 길게 느껴지는 병사들을 위로하는 말입니다. 모든 고생과 수고가 끝나는 전역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다녀오신 분들은 아마 공감하실 것입니다. 흐르지 않는 것처럼 지겹고 고달팠던 세월이 마침내 그날이 오고 나서 되돌아보니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이가 언제 커서 어른이 될까? 많은 수고와 노력을 다하면서 그 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지만, 지금 장성한 자녀를 두신 분들, 어떠십니까? 지나온 날들이 참 빠르게 지나간 것 같지 않으십니까? 아이가 언제 커서 이렇게 어른이 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사는지 참 신기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이 이루어진 날에는 모든 보상과 기쁨이 따르지만, 기다리는 동안에는 지치고 낙심할 때가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특히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인생 가운데 낙심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시간에 우리가 기다리는 날인 “인자의 날”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모든 불의를 심판하시고 자기 사람들과 승리를 누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날을 기다리는 지금, 승리한 것 같지 않은 삶이 펼쳐질 때가 참 많습니다. 많은 이유로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자의 날을 기다리며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 비유의 목적(1):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누가는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목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1절)

가르치는 분은 예수님이고, 가르침의 대상은 “그들”, 바로 22절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제자들”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해주실 것인데, 그 목적은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항상 기도한다”는 말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말씀에 나오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의 의미와 유사합니다. 기도를 쉼 없이 길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아뢰고 나아가고 의지하고 붙들고 신뢰하라는 말입니다.

기도를 떠받치는 두 기둥은 ‘겸손’과 ‘믿음’입니다. 기도는 ‘겸손’에서 시작합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로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시 10:17). 기도는 또한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전능하고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히 11:6).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구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분께 구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이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신 두 번째 목적은 그들이 낙심하지 말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낙심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과 함께 승천하실 기약이 차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셨습니다(눅 9:51). 그분은 몇 차례나 제자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9:22). 인자의 날을 설명하실 때도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7:25). 자신이 곧 죽고 버림 받을 것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왕이라고 생각했고(눅 24:21), 그래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마 20:21).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막 10:28). 그런데 정작 그 주께서 자기들 눈 앞에서 사람들의 손에 심문 당하고, 매 맞고, 죽임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참 낙심될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죽음에서 부활하셨지만 40일 후에는 승천하셔서 제자들을 떠나실 것입니다(행 1). 예수님은 고아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지만(요 14:18) 그 약속을 붙들고 사는 삶은 참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며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서 세상에서 오는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견디는 것은, 절대 만만한 삶이 아닙니다. 낙심하기 쉬운 삶입니다.

바울은 여러 번 낙심하지 말 것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예수님은 아버지께 올라가시면서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낙심하지 않게 지키십니다. “낙심하다”의 또 다른 의미는 “연약해지다”입니다. 바울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합니다(롬 8:26).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셨을 때 제자들은 겉사람이 낡아지고(고후 4:16),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고후 4:8),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싸워 이긴 엘리야가 다음날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낙심하여 죽기를 구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세 낙심하고 맙니다(왕상 18-19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 그것을 보게 하는 힘이 ‘믿음’입니다(히 11:1).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힘을 얻게 하는 강력한 도구가 바로 ‘기도’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이 거기에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기도를 통해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격적으로 비유를 설명하기 앞서 질문을 드리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을 따르는 길이 많은 수고와 고통과 핍박이 있는 길이라 할지라도, 세상이 바라보는 기준이나 평가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보상하실 것이라 믿으십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흘린 모든 눈물, 억울한 일들, 원수에 대한 원한들, 주께서 모두 풀어주실 것이라 믿으십니까?

가끔 우리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때 주를 위한 열정을 품었던 사람들이 그 열정이 식어서 많이 방황하는 모습을 봅니다. 교회를 그냥 다니기만 하고, 주변에서 맴돌고, 주의 말씀을 사모하며 열정적으로 섬기기보다는 나그네처럼 떠돌며 적당히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사람을 문제 있는 성도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들이 낙심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에 불어 닥친 큰 위기로 하나님께 실망했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힘을 잃어버렸거나, 그분이 오시는 날까지 기다리기 지친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8절). 그분이 오시는 날 온전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인데, 그 때까지 그것을 믿고 기다리며 낙심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처럼 연약한 사람인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이 비유를 통해 권면하십니다. 얼마나 강력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말씀하시는지 비유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2. 비유의 내용(2-5): 과부와 재판장

비유는 “어떤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도시”에는 사는 두 인물이 비유의 주인공입니다. 2절에 “한 재판장”이 나옵니다. 그가 유대인인지 이방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2절)입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묘사할 때 가장 최악의 표현이 있다면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특히 그가 하는 일 때문에 이는 더 심각한 평가입니다. 재판장의 생명은 공정함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재판장은 마땅히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공의를 베푸는 자입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 왕이 재판관을 세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대하 19:6-7). 그런데 이 재판장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불의함, 치우침, 뇌물을 받는 것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 재판장이 쉽게 범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재판장은 사람도 무시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판결의 대상이 어떤 피해를 입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정말 악한 재판장입니다. 자기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판결을 내려줄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재판장을 당시에 강도 재판관이라고 불렀습니다(바클레이, 305). 재판을 통해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는 도둑 같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6절에 그를 한 마디로 “불의한 재판장”이라고 부르십니다.

또 다른 인물은 3절에 등장합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과부는 사회적인 약자로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보호자가 없다는 것이고,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공급자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나서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기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많았고 특히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주님의 책망을 받았던 것을 보면(눅 20:47),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포함하여 불특정 다수로부터 많은 원한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과부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원한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 갔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악한 재판장이 그 요구를 들어줄리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과부를 보호할 것을 요구하시지만(신 24:21; 딤전 5:3),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아닙니까? 딱한 과부의 사정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야 정상이지만 그는 사람을 무시하는 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그는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얼마 동안”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귀에 들리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들었지만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과부는 자기 청원이 날마다 무시되는 것을 보며 지치고 낙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지친 것은 과부 쪽이 아니었습니다.

재판장이 하루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보통 악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악한지 잘 모르는데,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도 무시하고 사람도 무시하는 불한당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도 이 과부는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5절)

재판장은 과부 때문에 자기 명성에 금이 갈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한을 풀어주지 않아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번거롭고 귀찮았습니다. 자꾸 찾아오는 과부 때문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할 것이 뻔했습니다.

마지막 표현 “나를 괴롭게 하리라”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내 눈 밑을 때리리라”입니다. 눈을 멍들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과부는 정말이지 불의한 재판장이 눈을 얻어맞는 것 같은 괴로움을 느낄 정도로 집요하게 찾아와서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6절에서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한 말을 잘 생각하고 여기서 교훈을 얻으라는 말입니다(6절)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3. 비유의 교훈(7-8): 하나님을 믿으라

“하물며”라는 이 단어는 오늘 본문의 핵심 부사(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두고 앞뒤의 인물을 비교 합니다. 앞에 있는 불의한 재판장과 뒤에 나올 인물을 비교하면서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장과 비교되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완전히 다른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신명기 10장 17-18절에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하나님은 ‘전능하신 재판장’입니다.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 심판을 받고, 마귀도 그 앞에서 영원히 멸망 받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판결을 굽히지 않으시며 뇌물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자하신 재판장’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비유 속 그 악한 재판장도 과부의 끈질긴 요구를 들어주는데, 하물며 그 재판장과 차원이 다른 하나님께서 자기가 택한 자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겠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다시 한 번 물으십니다. 우리말 성경에 따르면 “오랫동안 모른 체하며 내버려 두시겠느냐?”입니다. 악한 재판장이 과부의 요청을 얼마 동안 듣지 않은 것처럼 너희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고 오래 지체하겠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하나님은 자기의 택하신 자들, 그리스도 앞에 있는 제자들과 그들을 통해 주를 믿게 된 우리 모두의 부르짖는 소리를 무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당한 억울한 일들, 우리가 흘리는 눈물, 우리가 견디고 있는 핍박과 고난을 모른 체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속히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에(인자의 날) 모든 것을 보상하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으라고 예수님은 강력하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믿고 밤낮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구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이 불의한 재판장인 것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마치 자기 백성이 당하는 고통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 무감각한 것처럼, 우리를 받는 핍박에 관심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매정하고 사랑 없고 불의하고 능력 없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악하고 불한당 같은 재판장도 과부의 끈질긴 요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너희의 반복적인 기도를 기쁨으로 들으시겠느냐? 믿음을 가지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잊지 말라.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때론 의심스럽습니다. 믿었다가도 믿음이 휘청거릴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심한 질병에 걸립니다. 주를 위한 선택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되돌아옵니다. 빛과 소금처럼 살면서 오히려 고통스러운 핍박이 찾아옵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악한 이들이 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주를 믿는 우리에게 온갖 억울하고 눈물 나는 일들이 생깁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신 말씀을 붙들고 있지만(롬 8:28), 믿음이 흔들립니다. 이래도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걸까요?

어느 날 여러분의 집에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인데 갑자기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배가 고플 때마다 밥을 줄 때까지 소리 지르고, 울고, 짜증내고, 맘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신경질을 부립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니 이 사람이 자기는 돈을 하나도 벌어오지 않으면서 내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힘들게 번 돈을 그냥 달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사고, 입고, 즐기기 위해 돈을 계속 달라고 합니다. 심지어 그게 당연한 것처럼 요구합니다.

학교에 들어갈 때도, 직장에 취업해도, 심지어 결혼을 하여 독립된 가정을 꾸려도 언제나 이 사람은 나에게 의존적입니다. 시험 때 먹는 것을 챙겨달라고 요구하고, 시간에 맞춰 깨워달라고 요구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기 빨래를 다 맡아서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아기를 낳아도 내가 봐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맡깁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자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묘사하니 참 악한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자녀는 항상 불효자처럼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집에 태어난 순간부터 자식은 부모의 기쁨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식에게 흘러내려 갑니다. 해준 것이 특별히 없어도 부모는 항상 자식에게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더 해주고 싶어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울어도 좋아. 얼마든지 짜증내고 신경질 부려도 좋아.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고, 위로가 필요하면 위로해 줄게. 만일 눈이 필요하면 눈도 주고 심장이 필요하면 심장도 줄 수 있다. 네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살면서 이것 하나만 기억하렴. 네가 어디에 있는 무엇을 하든, 무슨 일을 저질렀든 아빠와 엄마는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거야. 네 편이 되어 줄 거야. 네가 진정으로 잘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러니 무슨 일이 있든지 나를 믿어라.’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지금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제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시려는 예수님이 직접 묻고 계십니다. 나를 봐라. 내 아버지가 너희를 위해 어떠한 사랑을 보여주셨는지 보라(요일 3:1). 이래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느냐? 자기 하나 뿐인 독자를 내주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것을 믿을 수 없겠느냐?

여러분 우리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 가운데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방황하고 맴도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보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믿으십니까? 그 아버지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항상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마지막 질문이 제 마음에 크게 울려 퍼집니다. 마치 우리에게 대답을 듣기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절)

여러분 이렇게 대답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네,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제가 어떠한 상황에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오소서. 내 사랑하는 주님이여”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