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 다윗(3)
본문: 사무엘하 11,12장
설교자: 최종혁

 

모든 사람은 완전하지 않고 실수를 하게 된다. 나만 알고 싶은 일들 혹은 나조차도 잊고 싶은 기억,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다. 자서전을 쓴다면 절대 쓰고 싶지 않은 그런 내용이 누구에게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의 인물들도 그렇다. 그들의 믿음의 행위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위대하고 아름답지만, 그들의 삶 전체가 그렇지는 않았다. 모두들 각자의 연약함을 가지고 살았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다. 시편 19편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그 맛이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뜻에 살기 원하는 그에게 말씀은 정말 귀한 것이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할 때,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골리앗에 맞서 싸웠다. 그는 사울을 죽임으로써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유익들을, 단순히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세움을 받은 자신의 주였다는 사실 때문에 포기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하고 하나님을 따랐던 사람이 다윗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다.

하지만 그 역시 연약함을 가진 인간이었다. 좀 더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그는 모태에서부터 죄악 중에 잉태되어 태어난 죄인이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들처럼 죄로 치우치는 성향이 그 안에도 있었다. 다윗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했다는 말은 사실 그가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했었다는 말도 된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마음만 추구‘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지금 구원 받아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신 자들도 여전히 그러한 싸움을 싸운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 있는 동안 이런 싸움을 싸운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 얼마나 이기고 지느냐 자체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싸움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죄를 죄라고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자백하며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모습이다(요일 1장).

다윗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볼 때는 ‘어떻게 이런 죄까지…’라고 생각할 만한 죄를 범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다윗의 실패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다(사무엘하 11-12장, 시편 51편)

다윗이 살던 시대에 이 말씀이 기록되었다면 그는 성경에서 이 부분을 지워버리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말씀을 남겨주셨고,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교훈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과 관련된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우선시한다. 내 생명보다.’라는 점을 생각해봤다. 또한 사울과 관계된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선시한다. 내 생각보다.’ 이제 세 번째로 밧세바와 관련된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 한다. 그 누구보다’를 살펴보겠다.

 

III. 밧세바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한다. 그 누구보다

사건의 시작

보통 겨울에는 전쟁을 쉬고 봄이 되면 전쟁을 시작했다(1절). 다윗은 10장에 이어서 암몬과의 전쟁을 계속하는데, 다윗 자신은 전쟁에 나가지 않고 요압과 그의 부하들을 주축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전의 전투에도 다윗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었다. 딱히 다윗이 나태해졌다고 단정내릴 근거는 없다. 왕으로서 다윗은 필요한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본격적인 사건은 이제 시작이다. 다윗은 왕궁 옥상을 거닐고 있었다(2절). 바람도 쏘일 겸 옥상으로 올라갔고 그곳은 높은 곳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른 집들을 내려다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눈에 한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성경은 다윗이 의도적으로 옥상에 올라가서 목욕하는 장면을 보려고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밧세바가 의도적으로 다윗을 유혹하려고 눈에 띄는 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당시 상황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다윗이 그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윗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바로 사람을 보내서 그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게 한다.

유혹이 될 만한 상황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맞지만, 때로는 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런 상황에 노출될 때도 있다. 밧세바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다윗의 입장에서 핑계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야고보는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다윗은 자신의 욕심에 미혹되었고 신속하게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움직인다.

다윗은 먼저 사람을 보내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본다(3절). 엘리암의 딸, 우리아의 아내였다. 엘리암은 다윗의 삼십 용사라 불린 사람 중 하나로 다윗의 모사인 아히도벨의 아들이기도 했다(삼하 23:34). 우리아 역시 삼십 용사 중 한 사람이다(삼하 23:39). 이 사실을 들었을 때 다윗은 더 이상의 행동을 멈춰야했다. 그의 마음의 죄가 행동으로 이어지면 더 큰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히 보였다. 하지만 다윗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갔다. 사무엘하의 저자는 다윗의 다급함을 표현하려는 듯 상황을 빠르게 묘사한다(4-5절). 다윗은 다시 사람을 보내서 밧세바를 불렀고 동침했고 밧세바를 돌려보냈다.

아마 여기까지가 다윗이 생각했던 그림 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1달 정도)이 지났다. 다윗으로서는 불안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아담이 그랬듯, 죄를 지은 자는 언제나 죄가 드러나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들도 다들 그런다. 죄는 은밀하게 짓고 숨긴다. 다윗도 그랬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안심하고 있었을 그에게 비보가 들려온다. 밧세바가 임신을 한 것이다.

밧세바의 입장에서 누구의 아이인지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남편인 우리아는 집을 떠나 있었고, 밧세바는 월경을 한 후에 다윗과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다윗의 아이였다. 그래서 밧세바는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말씀은 단순히 밧세바가 그렇게 했다는 것만 말하고 있지만, 그도 지금 큰 위기의 순간에서 다윗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떠나 있는 상태에서 밧세바가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면 죽음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레 20:10).

 

사건의 전개

사건은 더욱 긴박하게 전개된다. 밧세바의 임신으로 다윗이 은밀하게 행한 죄는 더 이상 은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윗은 그 죄가 은밀하기를 원했다. 숨기기를 원했다. 자신이 간음한 사실이 드러나면 문제가 커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어떻게든 숨겨서 이 순간을 모면하려고 했다. 다윗은 좋은 계획을 세웠다. 그대로만 되면 누구하나 다치지 않고 이전처럼 살 수 있다.

일단 전장에 있던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렀다(6-10절). 그리고 전쟁에 대한 얘기를 나눈 후에 집에 들어가서 쉬게 하며 먹을 것도 보냈다. 우리아가 아내인 밧세바와 잠자리를 하게 되면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는 우리아의 아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 다윗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다윗의 간음은 그와 밧세바 사이의 비밀로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아가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다윗이 묻는다.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10절). 우리아의 대답은 이렇다.

삼하 11:11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다른 경우였다면 이런 충성스러운 말에 감동이라도 해야 할 상황인데, 다윗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12-13절).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같은 시도를 한다. 이번에는 술에 취하게 해서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우리아는 정말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다.

이에 다윗은 계획을 변경한다(14절). 우리아가 죽으면 미망인이 된 밧세바를 자신이 아내로 맞이하면 간음의 죄는 덮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양새도 나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과부와 고아는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였다. 더구나 우리아는 ‘헷’ 사람으로,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아가 죽으면 밧세바는 더욱 힘든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그런 충성스러운 부하의 아내를 거둬들여 돌보는 선한 왕으로서 자신을 포장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우리아를 어떻게 죽게 만드냐이다. 한 나라의 왕이었던 다윗에게 있어서는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우리아를 죽게 만들 방법은 많았다. 다윗이 선택한 방법은 참으로 잔인하다. 그는 우리아의 손에 편지를 들려 요압에게로 보낸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삼하 11: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충성스러운 우리아는 편지를 잘 전달했고 충성스러운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따른다(16-27절). 그리고 나머지는 다윗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 우리아는 전쟁에서 죽고 밧세바는 미망인이 되었고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한다.

이 사람이 다윗이 맞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떻게 그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약 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자기 욕심을 따라 그것을 얻으려고 했을 때 그는 간음이라는 죄를 범했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살인이라는 죄를 범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사람이고,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원수도 죽이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죄악 된 마음을 따르기 시작하자 자기 명예를 지키려고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시면 우리의 죄성은 그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누구도 ‘난 이런 죄는 절대 범하지 않을거야’라고 자신할 수 없다. 다윗은 자신의 권력, 결단력, 지혜 등 모든 것을 동원해서 죄를 범하고 죄를 감추는데 사용했다.

여튼, 다윗은 그 계획대로 두 가지 죄를 잘 덮었다. 간음은 남편을 죽이는 것으로 덮었고, 살인은 전쟁에서 흔한 전사로 둔갑시켰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을 것이다. 마음의 찜찜함과 죄책감은 있었겠지만 어쨌든 외양상 큰 무리 없이 잘 수습된 것 같았을 것이다.

다윗의 마음에 좀 걸렸던 사람은 편지를 받아서 우리아를 죽게 한 일에 동참한 요압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에게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25절)는 말을 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 일을 악한 일로 보지 말라”다. 그런 다윗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 일을 악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셨기 때문이다(27절). 하나님이 이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셨지만 모르고 계셨던 것은 아니다.

다윗은 11장이 사건의 결말이 되기를 바랐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건은 이제야 절정으로 향한다.

 

사건의 절정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서 말씀하신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다시 은혜를 베푸시려고 하신다. 사랑하는 아이를 훈계하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다윗이 잘 알아듣고 깨닫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다윗이 죄 가운데 평안히 거하기를 원하지 않으셨고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하신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오셔서 그의 죄를 드러내신다. 그래야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골자는 간단하다(12:1-4).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하나 밖에 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을 들은 다윗은 대번에 이렇게 말한다.

삼하 12:5-6 [5]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사실 남의 것을 단순히 빼앗은 것이면 죽을 죄는 아니다(출 22:1). 다윗이 6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양 네 마리로 갚으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 도둑질이 아니다. 나단이 강조한 것도 단지 부자가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았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상황을 강조했다. 다윗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죄에 대한 판결로서 사형을 언급한 것이다. 그가 몰랐던 것은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7).

나단은 왜 이 악한 일을 한 부자가 다윗인지를 설명한다(7-9절). 하나님은 다윗이 숨어서 은밀하게 한 모든 일들을 정확히 드러내신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했었던 모든 일은 단지 사람들 앞에서나 의미가 있었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시편 139편에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어느 곳에 가든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놀라운 찬양을 기록했다. 이 진리가 너무 놀라워서 자신이 다 이해할 수도 없다고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어느 곳에나 계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 힘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두려움이 된다. 지금 다윗에게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이 한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9, 10).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엇보다 먼저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그 둘을 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죄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이다. 다윗으로서는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웃의 가정을 파괴함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겼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일은 하나님과 관계 없다고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마치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대접을 받으실 분이 아니시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선택할 때 하나님은 그런 대접을 받으신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살해할 때 그는 단지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것 같았고 그것만 어떻게 잘 정리하면 될 것 같았지만 사실 동시에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었다. 특히 그는 범죄한 후로도 성전에서 제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가르치는 일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당하셨다.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 죄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누구보다 이 문제를 분명하게 지적한 사람이 바로 사도 요한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형제를 미워한다면 하나님도 미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책망에 대해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반응한다(13절).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게 끝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성경은 다윗이 단순히 그렇게 말만 한 것이 아님을 기록하고 있다.

 

시편 51편

다윗의 회개에서 보이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낮아진 자세로 은혜를 구한다(1).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자, 은혜, 긍휼을 따라 되는 것임을 다윗은 인정한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도 당연히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는 없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실 때 가능하다.

  1. 죄에 대해서 변명하려고 하지 않는다(3-4).

정당화하거나 합리화시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밧세바의 핑계를 대지 않는다. 왕으로서 체면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다윗은 자신이 죄를 지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인정한다(4절).

  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초점이 있다(10-12).

다윗이 원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그분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드리기를 원했지만, 그 형식에 앞서 자신이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필요함을 알고 그렇게 한다(17).

다윗의 이런 회개는 사울이 보였던 모습과 크게 대조가 된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은 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한 것이었다(삼상 15:19). 하지만 사울은 그것이 선한 의도로 한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뒤에는 백성들을 두려워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변명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것은 인정했지만 그것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백성들과의 관계를 걱정한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이제 잘못을 인정했으니 빨리 용서하고 같이 백성들 앞에 나아가자고 말한다. 마치 뭐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역정을 내느냐는 듯이 말한다.

사실 사울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가 했던 일은 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적장을 살려준 자비로운 행동이었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예물을 마련한 지혜로운 결정이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언급하는 사무엘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울의 입장에서 걱정되는 것은 백성들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 했다(삼상 15:24). 사람과의 관계가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그랬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낮아진 마음으로 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윗은 다르게 반응했다. 다윗은 죄가 단순히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께 범죄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보고 그것이 회복되기를 낮아진 마음으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구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실패했을 때 보여준 특징이다. 변명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은혜를 주셨다.

 

사건의 결말

다윗의 죄는 용서 받았다(13절). 하지만 그 죄의 결과는 그가 당해야 했다(14-23절). 하지만 결국 회개한 자와 하나님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다(24-25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는 죄의 결과로 죽게 되었지만, 다윗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에게 위로를 얻고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도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이키는 자다. 하나님이 내 뜻을 이뤄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때로 실패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놓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회개한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다.

지금까지 성경의 여러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우리가 따를만한 좋은 본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로 돌이켰던 요시야, 하나님을 의지했던 히스기야,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갈렙, 가장 온유한 자 모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 사실 표현은 다르고, 그 삶에서 강조된 모습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었다.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따라 삶을 살았다.

하나님이 옳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요시야는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로 돌이켰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구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히스기야는 힘들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하나님을 의지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임을 믿고 갈렙은 그 평생 하나님을 따랐다. 모세가 온유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믿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했던 것도 그가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은 단순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주변 사람 모두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한다. 내 생각을 온전히 내려 놓아야 하기도 한다. 세상의 상식을 거스려야 할 때도 있다. 내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할 때 그것을 막아야 한다.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도 이들은 믿음을 따라 살았고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선진들이라고 부른다. 믿음의 영웅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영웅 같은 사람들이지만 사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우리처럼 보이지 않는 분을 믿으며 보이지 않는 분을 사랑하며 보이지 않는 분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별명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불리울까? 우리는 어떤 사람들로 하나님께서 평가하실까? 우리는 어떤 사람들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기억될까?

좋은 OO으로 기억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간 사람들로 우리 모두가 기억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