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라

본문 : 출애굽기 20장 7절

설교자 : 최종혁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을 통해 우리 삶의 중심, 마음 중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다. 외부의 상황은 크게 작게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중심은 변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을 하나로 합하면 “하나님 한 분 만을 사랑하라”다. 조금 풀어쓰면 “하나님의 전부가 나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고, 그 하나님은 내가 만들어 낸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셔야 한다. 우리의 창조주로서, 우리의 구원자로서 하나님은 그렇게 되셔야 마땅하다.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공감할 수 있는 계명이지만, 이 계명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다.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과 동시에 그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도 생겨난다. 그만큼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을 망라하여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주제이며 그만큼 무거운 명령이다.

이에 비해 십계명의 세번째 계명은 어떤 면에서 보면 갑자기 무게감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계명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만 않으면 된다고 그 범위를 좁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의도한 바를 좀 더 생각해보면 이 계명 역시 우리 삶의 중심에 대한 중요한 명령임을 알 수 있다.

I. 명령

의미

먼저 이 명령의 의미를 살펴보자.

1, 2 계명에서 하나님은 1인칭으로 자신을 지칭하셨던데 비해 3계명에서는 3인칭으로 자신을 지칭하신다. 즉, 너는 “나의 이름을 …”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는 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이라고 말씀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 명령에서 핵심이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강조하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여러 이름 중 여기서는 “여호와”를 언급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려주셨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즉 자존하시고 따라서 자족하시며 주권적인 분이심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시면서 자신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이 이름이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라고 강조하셨다. 그래서 이 이름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언약의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성경을 보면 여기 말하는 “여호와” 외에도 많은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이름이 우리를 나타내고 때로는 우리 자신과 동일시 되기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도 그렇다. 하나님은 그 이름에 자신을 담으셔서 때로 이름과 하나님이 동일시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편에는 이런 말씀들을 찾아볼 수 있다.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29: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106:8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111:9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따라서 제 3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냐냐의 문제를 말하려고 하시는 것은 아니다.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성,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서 드러나는지와 관련된 문제다.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영광이 모두 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된 직접적인 명령은 이것이다.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우리말의 “망령되다”는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히브리어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비어있는 상태”다. 그래서 실체가 없는 것, 허울만 있는 것, 가치가 없는 것 등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는 ‘우상’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우상은 그 실체가 있는 듯하지만 실재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지 말라”는 문자적으로는 들어 올리지 말라는 의미다. 이름을 들어 올리는 것이니까 부른다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이름을 사용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텅 빈 것처럼, 실체가 없는 것처럼, 가치 없는 것처럼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가 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명령은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중요하지 않은 분처럼 가볍게 만들 지 말라는 좀 더 확대된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다르게 드러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계명을 어기는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언급은 없지만 반대로 어떤 모습으로든지 이 계명을 범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냥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강한 경고의 말씀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실례

구약에서 실제로 이런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크게 세 부류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욕한 경우, 하나님을 이용한 경우, 하나님을 경시한 경우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경우다. 실제 사용하는 언어와 관련된 부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 3계명과 관련하여 가장 주의했던 것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를 부르지 않으려고 했었다.

레위기에는 이와 관련된 실례가 기록되어 있다(레 24:10-23). 아버지가 애굽인인 한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한 사건이 있었다. 아주 직접적으로 제 3계명을 어긴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세에게 이 사건을 가져왔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돌로 칠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을 입으로 모욕하는 것에 대한 형벌은 살인죄와 동일했고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든, 그 중에 머물고 있던 사람이든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다음으로 가장 흔하게 제 3계명을 범한 사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이용한 경우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 나타났는데, 주로 거짓 맹세와 거짓 예언의 형태로 드러났다.

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경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자신이 한 말 혹은 약속이 사실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증한다는 식이었다. 실제로는 거짓을 말하면서, 지키지도 않을 약속이면서 상대방을 확실히 속이기 위해 그렇게 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보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말하지만, 그 입에 들린 하나님의 이름은 ‘거짓’의 이름이 된다.

거짓 예언도 마찬가지다.

23:25-27 [25]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26]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27]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렘 23:29-32 [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0]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거짓 맹세나 예언을 하는 이유는 같다. 그것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이익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명예, 평판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더 인정받기 위해, 자기 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기 쾌락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결국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는 당연한 결과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위한 말을 했으니 사람들은 참된 하나님이 아닌 그 사람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백성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을 위해 거짓 예언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처럼 치실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다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경시하는 경우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에서 드러났다.

제사장들은 부정한 상태로 성물을 가까이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면 안됐다(레 22:2).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자들로서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었고, 그들이 그렇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부주의함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와 이어져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욱 신중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예배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의식적인 부분은 의외로 소홀할 수 있다. 우리도 쉽게 마음과 모습, 태도와 의식을 분리해서 생각해서 “마음과 태도만 바르면 됐지”라고 말한다. 마음과 태도가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마음과 몸이 분리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은 겉으로 드러 나기 마련이다. 예배도 마찬가지여서, 실제로 표현된 결과는 다를 수 있지만, 마 음은 어떤 식으로든 표현이 된다.

실제로 말라기에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긴 예배의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다고 책망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공경,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익히 본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과 동일시 되고 있다. 문제는 이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했던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이들은 ‘말’로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로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진짜 속내를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모습을 통해 드러내신다.

1:7-8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1:12-13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져왔던 것은 눈 먼 것, 병든 것, 훔친 것, 저는 것, 병든 것, 흠 있는 것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다. 이들이 이것을 가져온 이유는 ‘번거로웠기’ 때문이었다. 좋은 것을 골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불편하고 귀찮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에 “코웃음”을 쳤다. 무시했다는 말이다.

이들은 말로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멸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모습에 하나님을 존중하는 모습은 없었다. 하나님을 경시하는 마음이 그들의 예배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런 예배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들의 예배는 헛된, 아무 의미없는 예배였다. 9절 말씀에서는 그런 그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기도도 듣지 않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온 민족이 두려워하고 높여야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그들의 죄를 그냥 용납하지 않으신 것이다.

십계명의 세번째 계명은 일견 그 범위가 좁아 보이고 그래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 모든 일 중에 하나님을 본래의 모습과 다르게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 세번째 계명의 의미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거나 이용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된다.

II. 적용

그렇다면, 이 계명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까?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린다. 우리를 부르는 말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이렇게 명령한다.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구약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예배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앞서 구약의 성도들이 세가지 측면(언어, 일상, 의식)에서 이 계명을 어겼던 예들을 살펴봤는데, 비슷하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위험을 생각해 보자.

 1. 언어 : 하나님을 모욕하지 말라

아마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말로서 모욕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관련해 몇 가지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영어에 신기한 것 중 하나가 욕 섞인 감탄사에 하나님, 예수님, 거룩 등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거의 의미는 생각하지도 않고 관용적으로 단순 감탄사로만 인식되기도 하지만 참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표현들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 의미없이 혹은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는 문화 교류가 많아지면서 이런 영어식 표현을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직접적인 의도가 없더라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런 표현들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의 이름, 혹은 기독교적인 표현을 재미를 위해 농담의 소재로 삼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언젠가부터 TV와 인터넷 등을 통해 ‘신’ 혹은 ‘갓’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할렐루야’도 꽤 자주 보인다. ‘신앙심’, ‘믿음’과 같은 단어도 자주 사용된다. 본래의 의미로 사용된다면 좋은 현상일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을 신, 갓이라 부르며 그 사람들을 향해 할렐루야를 외치고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심이 있다는 식으로 상황을 묘사한다. 참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의 모습이 그렇게 재미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일은 그 무게감 때문에 절대 농담의 소재로는 삼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부모님을 포함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모두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사건들도 그렇다. 특히 그런 사건의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런 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조심한다.

하나님은 어떠신가? 높으신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분을 끌어내릴 수는 없다. 하나님을 제자리에 두지 않고, 우리와 같게 만들거나 우리보다 오히려 낮추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모독이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사례들이 하나님을 향한 의도적이고 직접적인 모욕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유일한 참된 예배를 그저 수많은 예배들 중의 하나로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그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로서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내가 아버지를 모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모욕을 받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고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셨던 것처럼,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2. 일상 :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라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이다. 앞서 말했던 거짓 맹세나 거짓 예언은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의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우리도 종종 그렇게 하려는 유혹을 받고 실제로 그렇게 할 때도 있음을 알게 된다. 몇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단순히 자기 생각이나 견해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했던 예는 역사를 통해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도 그러했고 노예 무역을 하던 사람들도 그랬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이용되었다.

예배당 건축을 준비하면서 에스라, 느헤미야에 나오는 성전, 성벽 건축에 대한 설교를 하고 지금 예배당 건축을 하는 것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이니 더 많이 헌금을 해야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교회 목회자들도 많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처럼 죄책감을 갖게 만들어 헌금을 강요한다.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고, 더 많은 헌신을 격려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 대한 교회 인도자들의 분별과 판단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처럼 권위를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위 이단들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 권위를 높이는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원하는 돈, 명예, 쾌락 등을 얻는다. 그렇게 사람들에 의해 이용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그런 탐욕스러운 분으로 만들고 우리가 그렇게 나의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분처럼 만든다.

이와 비슷하게 개인의 결정에 대해서 “주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하라고 이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셨어요. 제가 뭐라고 주님께 반대하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의도가 나쁘지는 않을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결정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

예로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던 중 말씀을 보다가 어느 구절을 보고 그동안 마음에 두었던 자매를 찾아가 “주님께서 자매님과 결혼하라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뭐라고 주님께 반대하겠습니까.”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 청혼을 거절하는 자매는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인가? 형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신다. 형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죄를 범했을 뿐이다. 혹, 어쨌든 형제가 마음에 들어 결혼을 결정하더라도 그것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애초에 주님은 그런 명령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서 내가 원하는 이익을 취하려는 경우들도 있다. 부부 간에 다툼이 있을 때, 남편은 아내에게 “하나님께서 남편에서 순종하라고 하시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고 싶고 아내는 남편에게 “하나님께서 아내를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순수하게 남편이 혹은 아내가 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모습을 닮기 원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의도로 사랑 가운데 서로 권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내가 원하는 말을 들으려고,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드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제 3계명을 통해 금지하신 일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마치 사탄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할 때 했던 말들을 생각나게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자기 목적을 이루기위해 이용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도 하고 하나님을 믿고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도 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셨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하나님을 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삼으면 안된다.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 이익을 위해 아버지를 이용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그렇게 이 땅에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3. 의식 : 하나님을 경시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드리는 의식으로서의 예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사람들이 예배하는 나의 모습을 본다면 하나님이 정말 귀한 분으로, 중요하신 분으로 생각하게 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말라기에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를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봤다고 가정해보자. 눈 멀고, 병들고, 저는 것을 가져와서 자신의 신에게 제사드리는 모습을 보며 ‘아, 저들이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구나. 저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참 귀하구나’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마저도 아까워하며 번거롭다고 생각하면서 가져오는 백성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은 정말로 별것 아닌 분, 공허한 분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예배드릴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만들 수 있다. 찬양을 고르니 찬양을 하고 기도 하자고 하니 기도를 하고 말씀이 전해지니 그냥 듣는다.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하면서 높으신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음이 왜 이렇게 높은지만 신경 쓰인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기도를 하면서 정작 마음은 콩밭에 가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은 곧 살아있던 말씀으로 바뀌고 내 삶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결국 찬양은 하는 중 마는 중 한다. 기도 시간은 자기 좋은 타이밍이다. 말씀 시간은 딴거 다 필요없고 빨리 끝나기만 하면 좋다. 주일에 피곤한데 그래도 교회 나와서 이정도 했으면 내 할 도리는 다한 것처럼 생각하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우리는 참된 예배 의식은 헛된 외식으로 바뀐다.

예수님은 그런 외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15:8-9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우리의 예배를 보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이신지, 얼마나 중요하신 분이신지는 바르게 드러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담긴 기도와 찬양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기는 말씀을 통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주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우리의 예배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달라질 것이다.

도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을 때 그들을 지면에 흩으셨다. 그리고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려 그들을 다시 모으셨다. 이것을 그들에게 알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6:20-23 [20]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으시고 빼앗기지도 않으신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에게 그 이름으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욕하지 말고 이용하지 말고 경시하지 말라. 하나님은 절대 우리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실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