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본문: 누가복음 20장 19~26절
설교자: 조정의

19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과 논쟁에서 대패한 유대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20:1), 그들은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 비유를 통해 강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려는 자기들의 사악한 모습이, 비유 속에 나오는 은혜를 거부하는 농부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려고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했지만, 옳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크게 분노하고 즉시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싶었습니다. 계속 주인의 자비를 거절하면 주인이 악한 농부들을 진멸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그들은 그래도 예수님의 비유 속 농부들처럼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19절). 그래서 그들은 일단 물러나 다음 계획을 세우기로 합니다. 그리고 20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무너뜨릴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1. 간계(19~22)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유대 종교지도자들(특별히 ‘바리새인들’, 마 22:15, 막 12:13)은 논의 끝에 예수님을 무너뜨릴 좋은 묘안을 생각해냅니다. 그리고 이번엔 그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대신 “정탐들”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20절).

20절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이 ‘정탐들’은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당으로 구성된 무리입니다(마 22:16; 막 12:13). 이 두 구성원은 사실상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바리새인은 정통 유대인으로 로마 정부를 싫어했습니다(반정부). 유대 국가를 사랑하고 특히 종교적으로 로마가 유대교에 간섭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반면 헤롯당은 로마 주둔군을 환영했습니다(친정부). 헤롯 왕가를 통해 로마가 이스라엘 땅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해결 방법을 선호했습니다.

일제시대로 치면 독립운동가(바리새인)와 친일파(헤롯당)로 구성된 ‘정탐들’이었습니다. 서로 한 팀을 구성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바리새인의 제자와 헤롯당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겠다는 한 목표를 두고 한 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만 죽으면 바리새인이 유대인 가운데 누렸던 인기와 명예를 되찾을 수 있고,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기대하는 예수님이 죽어야 헤롯 왕가가 장기 집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의인인척 합니다(20절). 예수님의 가르침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잘 듣는 척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선하고 아름다운 말로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21절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광장에서 날마다 가르치고 계셨고 많은 백성이 그 가르침을 기뻐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예수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을 이렇게 높여 칭송합니다. “당신은 바로, 정확하게, 올바르게 가르치시고 말씀하십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참된 것만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꺼리지 않습니다(마 22:16; 막 12:14)”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생각때문에 하나님의 도를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칭송합니다.

그들 입에서 나온 유일한 ‘참된 말’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들이 묘사한대로 예수님은 그 입에 거짓이 없으신(벧전 2:22) 분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롬 2:11; 골 3:25). 아버지 하나님의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요 1:14).

문제는 그들이 정말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아첨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이유없이 찬양한다면, 방심하지 마십시오. 그 뒤에 날아오는 회심의 일격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날아온 한 방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22절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을 칭찬한 후 바로 “그러면…”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진정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분이라면…” 우리의 질문에 답해보시오. 라고 말한 것입니다(마 22:17). 

그리고 그들은 재촉해서 거듭 묻습니다. 마가는 그들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이렇게 집요하게 물었다고 말합니다(막 12:14-15). “빨리 둘 중 하나를 택하여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논쟁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 세울 때 “그래 안 그래? 맞아 안맞아? 빨리 말해봐”라고 하듯이 이들은 예수님에게 둘 중 하나의 대답을 빨리 하도록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 앞에 그들이 한 껏 예수님을 찬양하여 높이 띄워 놓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라고 얼버무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간계를 아셨습니다(고후 11:3; 23절). 그들이 겉으로 순진하고 의로운척 질문 하지만 속으론 예수님의 말을 책잡으려는 겉과 속이 다른 외식쟁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막 12:15).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이 말 실수를 하여 넘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난감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이 질문이 난감하게 느껴지십니까? “대한민국에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이 어렵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로마의 강제 점령을 당하고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에게는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마치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천황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물은 것과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로마의 지배 아래 수많은 세금을 냈는데, 한 사람의 소득의 약 30%~40%정도를 국가에 바쳐야 했습니다. 토지 소산물 가운데 곡식 10%, 과일은 20%, 성문을 통과하거나 항구를 사용하여 물건을 이동할 때 상품가치의 2~5%를 내야했습니다. 

유대인들을 가장 분노하게 한 세금은 “인두세”인데 14세 이상, 65세 이하 모든 사람에게 부과한 세금입니다. 인구조사 할 때마다 하루치 임금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세금의 특징은 황제에게 직접 바치는 세금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왕이 없다고 믿는 유대인들은 수천년 동안 오직 하나님에게만 제물을 바쳤던 민족입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이 무엇인지 아시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가운데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사람에게 결코 세금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황제 가이사에게 직접 바치는 세금이라니 가당치 않은 일이 아닙니까?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건 그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그것을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세금에 반대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AD 6~7) 갈릴리 사람 유다가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그가 외친 것은 “하나님 외에 우리에게 왕은 없다”였습니다. 유다로 인해 열심당원 운동이 유대사회에서 일어났고 결국 국가에 대항하는 그 반역은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당시에 가장 뜨거운 이슈를 건드린 것입니다. 이 문제로 사람이 목숨을 걸었던 문제, 유대인 사회에서 이것의 찬반으로 의견이 분분했던 문제의 핵심을 지금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사람들 신경 안쓰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가르치는 선생님, 당신의 생각엔 어떻습니까? 당신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메시아, 유대인의 왕이 하나님만 섬기라는 계명을 무시하고 가이사 황제와 그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겁쟁이 같은 대답을 한다고 책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 조국을 회복시킬 것이라 기대한 많은 백성이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돌아설 것이 분명합니다.

또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거야 말로 예수님을 즉시 잡아 가둘 수 있는 좋은 빌미가 됩니다.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의 그 말을 책잡아 로마 군대에 보고하고 유다 같이 정부에 반란을 꾀하는 범죄자라고 고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나오는 것처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 넘길 수 있게 됩니다.

자, 둘 중 하나, 당신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서 대답해 보시오! 그들은 점점 예수님을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2. 현답(23~25)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23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여기서 “간계”는 신약성경에서 사탄이 하와를 넘어뜨리기 위해 사용한 악한 꾀를 가리킬 때 사용된 강력한 표현입니다(고후 11:3). 이처럼 그들의 의도는 악하고 교묘했습니다. 겉으론 예수님을 위하는 척 하지만 속에는 예수님을 파괴하려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외식,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함, 그 더러운 간계를 예수님은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18; 막 12:15). ‘너희가 하려고 하는 바를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시커먼 그들의 속내를 다 들여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24절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한 데나리온, 즉 “세금 낼 돈”을 자기 앞으로 가져와 보여달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22:19). 질문을 한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에서 한 데나리온을 꺼내 예수님 앞에 가져왔을 것입니다(마 22:19; 막 12:16).

이 행위 자체가 그들이 참 외식쟁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그들이 가져온 동전 앞에는 가이사 티베리우스 얼굴이 새겨져 있고 “티베리우스 가이사,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신의 아들). 동전 뒷면에는 “대제사장”이라는 문구와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가 평화의 여신이 성육신한 모습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여신의 아들).

예수님의 주머니가 아니라 그들의 주머니에서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우상숭배의 문구와 형상으로 앞뒤가 도배된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늘상 그 동전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예수님께 황제 숭배의 문제점을 가지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단번에 드러내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24절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의 간교한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25절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두 가지 대답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이사가 요구하는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사도들이 예수님께 전수 받아 서신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 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하였습니다(롬 13:7).

베드로 역시 “인간의 모든 제도에…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벧전 2:13).

가이사가 두려워서 그렇게 하라는 것인가요? 인간의 제도나 국가의 처벌이 무서워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고 말하였고(벧전 2:13), 바울 역시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내야 할 “조세를 바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권세를 세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롬 13:6).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악한 왕이나 선한 왕을 세우셔서 당신의 주권적인 뜻과 계획을 이 땅에 이루십니다(단 2:21, 37-38; 잠 8:15-16). 그들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이 땅의 평안을 가져오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임금들,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딤전 2:1-2).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디도에게 쓴 편지에서도 바울은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라”(딛 3:1). 국가에게 기본적으로 순종하고 국가가 선한 일을 행하는 것, 즉 통치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인 평안과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일, 악생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는 일(롬 13:3; 벧전 2:14)을 할 수 있도록 순종함으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과 지지를 강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 모두 부패하고 타락한 지도자를 책망하셨습니다(눅 3:19; 마 12:34). 

이 말씀이 정부에 대한 모든 비판과 반대를 옹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모든 세금의 요구에 순종하셨고(마 17:27), 부당했지만 재판과 심문을 당하셨으며, 심지어 “죄를 찾지 못하겠다”는 판결문과 함께 내린 사형 집행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진지하게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 통치자를 세우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난하고 욕하고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행위는 그 권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을 기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인 통치자와 정부가 하나님 뜻에 거슬러 국정을 운영할 때 담대하게 그것에 반대하고 겸손히 그것을 비판하며, 때로는 순종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롬 12:21).

예수님의 대답 그 두번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입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대상 29:11-12; 계 4:11).

가이사의 형상이 그려진 동전을 가이사에게 바쳐야 했다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이 새겨진 만물, 특히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은 누구에게 바쳐야겠습니까?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내 모든 삶이 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롬 12:1). 우리의 시간, 재물, 재능,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바치는 삶입니다(고전 10:31).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말만 들으면 예수님은 로마 정부에 굴복하는 비겁한 사람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황제가 요구하는 세금도 바치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가이사에게 바치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바치면 가이사를 거역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가이사의 명에 순종하여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 역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는 것으로,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3. 침묵(26)

예수님의 대답은 듣고 있던 모든 사람을 침묵하게 하였습니다. 

26절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정탐들’은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에서 그들을 보낸 자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책잡을 만한 우둔하고 미련한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놀랐고, 아무런 소득 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마 22:22).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완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은 그들이 아첨하기 위해 말한 것이었지만 “진실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바르고 참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이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누가가 이 사건을 기록한 주 목적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놀라운 지혜와 위엄을 찬양합시다. 지혜가 부족할 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는 주님께 구합시다(약 1:5).

둘째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위에 세우신 권세, 모든 제도에 순종합시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이 땅에 평안과 안정을 지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자들을 마땅히 존경하고 그들의 악에 대항하더라도 항상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벧전 3:9).

셋째,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첫째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다시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된 우리가 우리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 이 우선순위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