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2
본문: 시편 46편
설교자: 최종혁

 

세상 사는 것이 쉽지 않고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무리 신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 아무리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라도 나는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날씨가 더운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태풍이 올라오고 지진이 나고 하는 자연 현상을 내가 바꿀 수는 없다. 우리 나라 주변 정세가 변하는 것에 개인이 끼칠 수 있는 영향에는 한계가 있다. 가까운 자녀나 남편, 아내 조차도 내가 줄 수 있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흘러가는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져 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세상 사는 것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하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안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런 불안함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의지할 만한 것을 찾으려고 한다. 마음의 불안함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괜찮겠지. 열심히 돈을 벌고 모아두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한다. 보험을 들기도 한다. 오히려 반대로 오늘날에는 다 잊고 그냥 지금 열심히 즐기며 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풍조이기도 하다.

시편 46편은 확신의 시다. 믿음의 시라고도 할 수 있고 평안의 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는 가장 불안한 상황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그런 상황이다. 그럴 때 어떻게 여전히 평안할 수 있을까? 어떤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이 시편을 통해 배울 수 있다.

 

I. 확신의 전제가 되는 사실(1, 7, 11절)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시의 가장 근간이 되는 구절은 1, 7, 11절이다. 이 구절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함께 했던 노래이며 그들의 고백이다. 이들은 다함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고백한다.

이 말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할 사실이 있다. 바로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다.

 

“하나님”

이 시편은 먼저 하나님을 “엘로힘”이라는 표현으로 지칭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또한 “만군의 여호와”라고도 표현한다. 모든 군대, 모든 힘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능력과 모든 권위를 지니신 왕이시다.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능력과 절대적인 권력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초월적인 분이시며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이 하나님은 “지존하신 이”(4절)시다.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최소한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것만 믿고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은 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향할 때는 사실 교만이다.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가 내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우리와 다른 그분을 인정하는 겸손이 바로 믿음의 시작인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함께 하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 범죄한 후에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났지만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 땅에서 특정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함께 하시며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셨다. 그분께서 인간의 몸으로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셨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은 모든 구원의 일을 마치고 지금은 하늘로 돌아가셨지만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게 하셨고 언젠가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 범죄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일의 바탕에는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그분의 계획과 뜻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뻐하신다.

모든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이 시편의 가장 기초가 되는 사실이고 이 사실에 기초한 당연한 결론이 1-3절에서 확신으로 표현된다.

 

II. 사실에 기초한 확신(1-3절) –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절)

하나님이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환난 중에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고 도움이 되신다. 어떤 환난이든, 그 종류가 무엇이든 그 강도가 어떻든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강한 피난처, 도움이 되신다. 언제는 도움이 되고 언제는 도움이 안되고 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피난처, 힘, 도움이 되신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2-3절)

여기서 시편 기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안전한 것,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을 언급한다. 바로 땅과 산이다. 지금은 땅을 뚫고 산을 깎기도 하지만 여전히 땅과 산은 우리들에게 잘 변하지 않는 것이란 이미지가 남아있다. 고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유나 상징으로 땅, 산, 바위와 같은 것들이 자주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묘사되는 모습을 보면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그 일부가 바다에 빠지고 바닷물은 솟아나 뛰놀고 그 여파로 산이 흔들린다. 지진과 지진 해일(쓰나미)의 모습에 가깝다. 실제로 지진과 지진 해일을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이 상황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흔들리는, 삶의 기반 뿐 아니라 우리 존재, 생명의 기반까지 흔들리는 그런 상황이다.

그런 상황은 여기서 묘사하는 자연 재해를 통해서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강한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을 안전한 집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맨몸으로 마주한다면 어떻겠는가? 혹은 배를 타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강력한 지진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약간의 흔들림에도 불안해 떤다.

때로는 전쟁이 우리 삶의 모든 기반을 흔드는 상황으로 우리를 내몬다. 아마 이 시편의 직접적인 배경은 이런 전쟁이었을 것이다. 5절은 성이 포위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안전하고 말한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6절)

여기 “떠들며”는 3절에서 “바닷물이 솟아나고”에서 “솟아나고”와 같은 단어이고, 흔들렸더니는 2절의 “산이 흔들려 … 빠지든지”와 같은 단어다. 뭇 나라들이 떠드는 것은 단순히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닷물이 솟아나는 것이 산을 흔드는 파괴적인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여기서도 나라들이 그렇게 일어나 공격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우리나라도 전쟁을 겪었고 여전히 그 전쟁을 경험한 분들이 살아계신다. 전쟁은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것들을 순식간에 아무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 받는 나라들이 있고 수많은 실향민들,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망명을 하고 있다. 망망대해에 작은 배를 타고 뛰어들기도 한다. 그만큼 그들의 땅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불가항력적인 일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가정의 모든 경제를 책임지던 가장이 어느날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 남겨긴 가족들은 땅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은 평생을 감정의 깊은 골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번창해가던 사업이 어느날 갑자기 무너질 수도 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준비한 시험에서 낙방할 수도 있다. 절대적으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생각도 못한 질병이 우리를 찾아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을 뒤엎어놓을 수도 있다.

크든 작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런 모든 일들, 변화들은 우리의 삶의 기반을 흔들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두렵게 한다. 때로는 절망하게 하게 분노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고 도움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확신 가운데 고백한 것이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명령 중 하나는 “두려워 말라”다. 그런데 사실 두려워 말라는 명령은 좀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감정은 상황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나를 두렵게 하는 상황을 피해야하는데 그런 상황은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가 없으니 그런 명령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그런 상황들을 만날 때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 않다.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감정적 상태를 선택할 수 있다. 그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정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그저 두 눈 꼭 감고 어떻게든 두려움을 이겨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 말씀에서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확신 앞에 “그러므로”라고 하여 그 근거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모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 힘, 도움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우리로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게 하시는 것이다.

복잡한 얘기는 아니다. 아무리 강한 비바람이 불고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해도 절대적으로 안전한 집 안에 있으면 불안해 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혹 그런 집 안에서도 불안한 것이 있다면 이 집이 정말 이 상황을 견뎌낼만큼 튼튼하냐에 대해서 내가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정말 그렇게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능력의 하나님이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확신을 할 수 있는가? 4-7절은 확신에 확신을 더하는 경험에 대해서 언급한다.

 

III. 확신에 확신을 더하는 경험(4-7절) –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먼저 4절 말씀은 아름답게 시작된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4절)

에덴 동산에는 그곳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네 개의 강이 있었고 그것인 풍요롭고 넘치는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이곳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도 마찬가지다. 한 시내가 하나님의 성에 여러 줄기로 흐른다. 이것은 실로아 혹은 실로암이라 불리는 시내로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생명을 물을 공급하여 그들로 기쁘게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에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5절)

이 구절에서 시인은 단순히 평화로운 때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 성이 다른 나라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에 계시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이 안전할 수 있는 이유는 물이 많고 성이 튼튼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며 도우시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새벽”일까?

새벽은 밤이 끝나고 빛이 비추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바로 이 새벽 전에 밤은 가장 어둡다. 어두움에 빛이 비추이는 것을 성경은 구원과 연결시킬 때가 많은데 여기서도 그런 이미지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밤새 혹은 새벽에 구원을 베푸신 예들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오던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빠져 심판을 당했던 사건이다. 그 때가 새벽이었다. 히스기야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께서 유다를 구하신 것도 밤새 일어난 일이었고 사람들은 아침이 되어서야 그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는 문자적으로 새벽에만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가장 깊은 어둠에 있을 때 즉 가장 큰 위험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의미다. 어떻게 도우실까?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6절)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셔서 그들을 심판하셨다. 그들은 소란스럽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여 일어났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능력의 소리를 내시자 그들은 멸망했다. 마치 산이 바다 가운데 빠지는 것처럼 왕국들이 그렇게 멸망했다.

우리는 성경에서 실제의 이런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 유다도 멸망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온 전쟁이다. 어쩌면 이 전쟁이 시편 46편의 실제 배경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유사한 면이 많다. 이 사건은 열왕기하 18-20장, 역대하 29-32장, 그리고 이사야 36-37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였고 히스가야는 하나님을 의지했던 왕이었다. 그런 그의 믿음과 확신이 전쟁이라는 시험대 위에 섰다. 당시 앗수르는 당대에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그들은 이미 수많은 나라를 점령했고 북 이스라엘도 함락시켰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점령하러 왔다. 사실 전면전을 펼치면 전혀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다. 그때 히스기야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성 밖에 있는 물의 근원을 막아 적군이 물이 부족하게 만들고 성을 보수하고 망대도 높이 쌓았다. 무기도 충분히 준비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대하 32:7-8 [7]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8]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

이것이 히스기야가 가지고 있었던 확신이었다. 그런 그의 확신에 랍사게라는 앗수르의 술 관원장이 도전했다. 네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히스기야의 확신을 부인하며 앗수르 왕의 말을 전했다.

왕하 18:32-35 [32] …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33]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34] … [35]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지만 히스기야는 자신의 확신을 굽히지 않았고 최후통첩을 편지로 받게 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히스기야는 이렇게 했다.

왕하 19:14-19 [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6]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17] 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18]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이것이 히스기야가 끝가지 가지고 있었던 확신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의 확신은 결국 경험으로 증명되었다. 하나님은 밤새 앗수르 진영의 군사 18만 5천명을 멸하셨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라고 도전했었던 앗수르 왕 산헤립은 수도인 니느웨로 돌아갔다가 그곳에서 암살 당했다. 앗수르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해서 일어났지만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셨을 때, 그들은 흔들렸고 녹아내렸다.

시편 46편이 정확이 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그와 유사한 일을 경험했다.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셨을 때 땅이 녹은 것을 그들은 경험했고, 그 경험은 그들의 확신에 확신을 더했다. 그래서 그들은 변함없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7절)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망상이나 그저 자기 위로를 위한 것이 아님을 경험한 자들에게 시편 기자는 중요한 명령을 준다. 이 명령은 사실 두 대상을 향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다.

 

IV. 확신을 경험한 자에게 주는 명령(8-11절) –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됨을 알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8-9절)

먼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히스기야의 경우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끝내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실제 경험으로 더욱 확실하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던 자들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을 자신의 믿음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볼 수는 있었다. 이것은 전시대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볼 수 있다. 보려고 한다면 충분히 볼 수 있다.

그리고 10절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명령이다. 여기도 대상은 둘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10절)

무언가 하던 것을 멈추라고 하신다. 믿음이 있는 자든 믿음이 없는 자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하던 것을 멈춰야 한다. 우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질 때 우리는 멈추고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인정해야 한다. 바로 처음의 전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합당하게 반응해야 한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바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멈추고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멈추고 예배해야 한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온 세상 가운데 높이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해야할 일이다.

8-10절은 사실 좀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전쟁이 끝나게되는 그날을 바라보고 있다. 그 날이 올 것이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전쟁을 끝내실 때가 온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심판 중에 누군가는 영광 중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높이게 될 것이다. 영광 중에 있는 자들은 모두 함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 11절

 

도전

먼저 아직 진심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라고 고백할 수 없는 분들은 이 시편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이 누군가와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심판을 행하신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은 자들에게 전능의 하나님이 임하신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빠르든 늦든 심판하실 것이다. 그전에 이 시편의 강력한 경고를 듣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라. 그리고 지금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라. 그리고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라. 그것이 내 삶을 가장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라. 정말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 건강상의 어려움, 관계적 어려움, 감정적 어려움을 만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믿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다 가운데 빠져도, 그것들은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피조물들일 뿐이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상황, 어려움들이 나에게는 너무나 크고 버거워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보다 크시고 강하시다. 누군가 “약한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기독교를 조롱했던 적이 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약하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그 어떤 무엇보다 강하시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심을 잊지 말고 안심하라. 그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라.

 

그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특권이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의무이기도 하다. 앞서 히스기야 왕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가 만약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불안해 떨다가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하고 결국 백기 투항을 했다면,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 가운데 드러났겠는가? 하나님은 결국 앗수르보다는 약한 하나님으로 세상 가운데 드러났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그 실체를 드러낼때는 우리에게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일 때, 우리의 모든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을 때다. 그리고 그 때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낸다. 그 때도 우리가 평안할 때처럼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분을 높이며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세계 중에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그만한 예배가 없고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영광스럽게 드러날 때가 없다.

이것이 쉽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이 커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보험을 자꾸 들어 놓으려고 한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작게 만들고 세상 가운데 높임을 받으시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것들을 우리는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멈춰야할 것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염려를 멈추고 내 생각을 멈춰야 한다. 하나님보다 내가 잘 안다는 교만을 멈춰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드러내고 높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끝으로 우리 모두가 이 시편을 진심으로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길 원한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확신 속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