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팩트체크] 이스라엘의 실패

본문: 로마서 10장 14~21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의 세 번째 본론, 9장에서 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그분의 주권적인 택하심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책임에 대해서도 함께 설명합니다. 9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무게를 두고 설명했다면, 1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책임에 무게를 두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균형 잡힌 관점으로 이스라엘의 실패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은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곧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놀라운 복음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거절했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해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여러 의문들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정말 이스라엘의 잘못으로만 봐야할까요? 이스라엘에게는 복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그들의 말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실패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무엇이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구약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은 8구절의 말씀인데 그중에 구약 인용이 6구절이나 나옵니다. 바울이 구약으로 이스라엘의 실패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실패에 대해서 어떤 변명도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오직 그들의 책임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 번째 팩트체크 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그들은 믿지 못했다

사실일까요? 이스라엘은 믿지 못한 걸까요? 믿지 않은 걸까요? 이스라엘이 복음을 믿지 못한 거라면 실패는 이스라엘의 잘못이 아닙니다. 팩트체크를 해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분명한 사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두 말씀의 기초가 되는 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13)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요?

바울은 네 번의 질문을 연속하면서 구원에 이르는 단계를 설명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어찌 부르리요? 어떻게 부를 수 있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려면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찌 믿으리요?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믿으려면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찌 들으리요?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들으려면 먼저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찌 전파하리요? 어떻게 전파할 수 있습니까? 전파하려면 먼저 보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끝말잇기를 하는 것처럼, 부름은 믿음으로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전파함으로 전파함은 보내심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강조점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보내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보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내심이 없다면 전파하는 자도 없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믿지 못할 것이고 결국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못합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보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자들을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그런데 이스라엘이 왜 실패했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팩트체크, 그들은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입니다.

10: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나” 하나님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이 전하는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믿지 않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부터 믿음과 순종을 함께 말했습니다. “…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1:5) 이사야를 인용함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믿지 않음을 연결합니다.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이스라엘이 복음을 믿지 않은 것은 순종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주셨지만 그들이 복음을 믿지 않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다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16절 말씀을 오해할 수 있는데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좋게 번역하면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누구 잘못입니까? 믿지 않은 사람들, 각자의 책임입니다. 다른 핑계를 댈 수 없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전하는 자를 택하셔서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고집하던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절함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두 번째 팩트체크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그들은 듣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듣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팩트체크를 위해 분명한 사실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들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9절에 언급되었던 것처럼 예수가 주가 되시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듣지 않으면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이 듣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스라엘이 듣지 못해서 믿지 않은 거라면 이스라엘의 실패를 그들의 잘못으로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압니다.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파했음을 압니다. 그런데 나는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못 들었으니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여기서 팩트체크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을 들은 겁니까? 못 들은 겁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못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듣지 못했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 변명입니다. 그들은 들었습니다. 바울은 시편 19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피조물들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처럼 복음이 그만큼 널리 전파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이방인과 달리 유대인은 민족적인 특징 때문에 복음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지 않은 것에 대한 핑계를 듣지 못한 것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도 아니고 유대인을 제외했던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에 찾았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복음을 듣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팩트체크, 그들은 듣지 못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쳐다볼 것이고 마스크 써야한다는 경고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적을 받으면서 ‘난 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말도 안 되는 핑계일 뿐입니다.

세 번째 팩트체크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몰랐다고 하면 어떨까요? 지금까지 믿고 따랐던 말씀과 너무도 다른 복음이었기에 이해할 수 없었고 듣기는 했었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어떨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복음은 그만큼 파격적인 내용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 바울은 모세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합니다. 먼저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바울이 질문합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습니까? 이스라엘이 정말 몰랐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다른 어떤 민족도 아닌 자기 민족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세상에게 유익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래서 복음을 거절합니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었기에 그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절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실패합니다. 알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던 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몰랐던 미련한 백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루십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이 시기하고 분노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던 대로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은 이방인들과 공유할 수 없는, 이방인들에게 나누어줄 수 없는 그들만의 특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사야가 기록한 말씀입니다.

10: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복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부정적인 반응을 미리 기록한 것은 모세의 율법만이 아닙니다. 선지자들도 이와 같은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바울은 구약을 인용함에 있어서 시편과 율법과 선지서의 말씀을 사용합니다. 구약을 구성하는 세 부분, 성문서와 율법서, 선지서를 인용하면서 구약 전체가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사야 65장1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알리신다는 말씀을 이방인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자들이 하나님께 찾은 바가 됩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은 것입니다(9:30). 이렇게 바울은 구약의 인용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실패가 누구의 책임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 책임은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잘못된 지식을 따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복음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집 때문입니다. 그들의 완악함이 그리스도라는 반석에 걸려 넘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사야가 예언했던 것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팩트는 이러합니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알았지만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중요한 것은 설계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설계도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건물을 지으면 건물을 잘 지었다 해도 위험할 뿐만 아니라 허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준공검사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에 따른 설계도를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이 오셨고 설계도에 따른 모든 계획을 성취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설계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계도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건물을 세웁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인의 뜻에 맞지 않는 쓸모없는 건물은 철거될 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스라엘은 그들의 실패로 끝나는 걸까요? 이스라엘에게 소망은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오늘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모든 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나”로 시작하는 세 가지, 팩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16).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18).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알았지만, 따르지 않았습니다(19).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그러나가 남아있습니다. 마지막 21절 말씀은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10:21 ‘그러나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스라엘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이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에 대해서 종일 손을 벌려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쩌다 이방인인 우리가 이러한 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초대 받은 사람들은 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잔치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지 못했던 자들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이 잔치에 와서 즐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초대받지 못한 자들이고 잔치에 합당치 않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아니었던 우리가, 미련한 백성이었던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인도하심 가운데 예수님이 이루신 그 복된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한 누군가의 수고로 인해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방법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하시려고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거나 엄청난 기적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정말 무서운 지옥을 보게 하시고 갑자기 벼락을 내리시며 하나님 말씀을 하늘에 기록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고 누군가를 사용하셔서 그의 수고를 통해 말씀을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그 방법으로 믿는 자가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은혜를 누리는 자가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방법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이 하셨다는 사실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은 그 방법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거절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부정적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기에 그 은혜에 합당하게 행하며 삶으로 그리고 입술로 그 은혜를 전할 뿐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되어서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