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죽음을 바라는 삶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10절
설교자: 최종혁

 

 

무언가가 간절히 끝나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 지루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고 힘든 일들은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하고 있는 것도 고역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대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 어떻게든 지속되기를 바라고 가능하면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기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런 것처럼 산다. 우리의 삶에 대한 사람들의 자세는 대부분 그렇다.

죽음은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다.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죽음이다. 다른 사람의 죽음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정작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알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 가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지만 정작 자신도 언젠가 그런 모습으로 장례식장에 누워있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죽음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땅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장례식을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음 자체는 우리 입장에서 무언가를 준비해서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한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더 두려워한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런 죽음에 대해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6, 8절). 그는 죽음을 생각할 때 ‘담대하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감이 있다. 확신이 있다’는 의미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래서 ‘기운이 난다. 행복하다’는 의미다. 이 의미는 8절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원한다고 말할 정도다. 바울은 같은 고백을 빌립보서에서도 했다.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이것은 단순히 바울이 현실의 고통이 너무 커서 삶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분명한 죽음에 대한 관점 때문이다. 지난 학기 우리가 주일오후성경 공부 시간에 배웠던 개인의 종말론에 대한 지식에 바탕을 둔 반응인데, 그 지식은 다른 철학자들처럼 자신이 많은 고민과 사색을 통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이다(5절). 그래서 그의 고백은 단순한 바람이나 희망 사항,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굳건한 기초 위에 세워져 있는 확실한 소망이다. 단순히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망이라고 말하는 것 뿐이다.

그럼 말씀을 통해서 죽음과 관련된 이 ‘소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우리의 삶에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6절에 나오는 ‘그러므로’를 기준으로 해서 5절까지는 바울의 개인의 종말론에 대한 강의라고 할 수 있고, 6절에서 10절은 강의의 적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강의(1-5절)

4장에서 바울은 고난 중에 그가 어떻게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성했는지를 기록했다. 그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에 감사하며 주어진 길을 걸었다. 고난도 계속해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보이는 잠깐의 것을 주목하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주목했다. 그러면서 그가 주목한 이 영원한 것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5장 1절부터 이어진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1절)

“아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그들도 이미 지금 바울이 하는 말을 충분히 알고 있다. 새로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언급하면서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들은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하늘에서 살게 될 집을 말하고 있지 않음은 이어지는 문맥에서 분명해 진다. 바울은 지금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집’은 우리의 ‘몸’을 의미한다. 그래서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땅에 있는 우리 몸이 무너지면 즉 우리가 죽으면 하늘에 있는 다른 몸을 우리가 입게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우리의 몸과 나중에 우리가 가지게 될 부활의 몸, 영화의 몸을 말하고 있다. 그 둘의 특징을 ‘집’이라는 비유를 통해 극명하게 대조한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

성경에서 땅은 하늘과 대조된다. 하늘에 비교해서 땅에 속한 것은 항상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장막 집’ 즉 텐트라고 비유한다. 지금 우리의 몸이 그렇다는 것이다.

텐트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잠시 있을 곳에 건물을 짓고 살지 않는다. 필요하면 그런 곳을 빌리거나 혹은 텐트를 친다. 그것이 임시로 어느 곳에 머물 때는 합당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몸도 그렇다.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적합한 일시적인 몸을 우리는 입고 살고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텐트를 걷고 집으로 가듯이 우리의 이 일시적은 몸에서 우리가 벗어날 때가 온다. 곧 죽음이다.

바울은 ‘만일’이라는 말로 시작했는데 이것은 논리적인 전개를 위한 가정이지 실제로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누구나 장막 집이 무너질 날이 온다. 늦느냐 빠르냐의 문제이지 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사람은 죽는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과학자들은 사람이 왜 죽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혹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은 죽는다’는 이 명제에서 벗어났던 사람을 그들이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연역적인 명제를 제시해준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꾸지 않으시는 한,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적용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죽는다. 로마서 말씀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그냥 죽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은 죄에 대한 대가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장막 집에 살고 있다. 우리 모두가 임시적인 거처에 살고 있는 것이고 때가 되면 영원한 거처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인가? 이 장막 집이 무너지고 난 이후다. 죽음 이후인 것이다. 그 후에는 우리가 다른 집에 살게 된다. 즉 새로운 몸을 입게 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새로운 몸, 부활의 몸에 대해 바울은 몇 가지 그 특징을 언급한다.

첫째로 이 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다. 우리가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주시는 몸이라는 말이다. 둘째로 이 몸은 하늘에 있는 하늘에 속한 몸이다. 텐트가 일시적으로 이 땅에서 지내기에 적합한 것이었다면 새로운 몸은 하늘에서 살기에 적합한 몸이 될 것이다. 셋째로 이 몸은 영원한 몸이다. 이 몸은 다시 무너지지 않는다. 낡아가지도 않는다. 단순히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할 것이다.

이 몸은 믿는 자가 입게 될 부활의 몸, 영광의 몸이다. 이 부분을 고린도교회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이유는 바울이 앞서 보낸 편지에서도 이런 몸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고전 15:42-44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 몸이 바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우리가 거하게 될 집이다. 그래서 죽음이란 바울에게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있어 내 존재의 끝이거나 더 이상 내가 내가 아닌 상태로서 존재하게 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임시 거처에서 영원한 거처로 이사하는 것이다.

무엇이 더 좋은가? 아무리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예 집 없이 텐트에서만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바울 자신도 텐트 만드는 일을 했지만 그것은 임시 거처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이런 사실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 2절에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2절)

무엇이 더 나은가?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처소가 당연히 더 낫다. 그러니 그것을 간절히 사모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지금의 삶은 탄식이 가득한 삶이다. 4절에서도 바울은 동일하게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삶은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삶이었다.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수도 없이 당했다. 정말 죽음이 항상 그의 앞에 있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그는 이 장막 집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만 그런 것은 아니다.

롬 8:22-23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 모두가 탄식하고 있다. 괴로워하고 있다. 어떻게든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본능적으로 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소원은 단순히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기다린다. 그것을 간절히 바란다.

3절 말씀은 굉장히 흥미로운 말씀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자신이 무엇을 간절하게 바라는지를 말한다.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절)

바울은 집과 옷을 입는 비유를 혼용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렇게 한다. 앞에서는 하나를 벗고 하나를 입는 것을 말했는데 여기서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상태를 언급한다. 앞에서 ‘입는 것’이 육체를 가진 상태인 것을 생각해보면 여기서 ‘벗은 자’라는 것은 육체를 가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죽음 이후에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중간 상태에 대한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상태로 오래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4절에서 말한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4절)

탄식하며 이 장막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 짐을, 이 탄식을 벗어 버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염세주의자나 허무주의자들 혹은 바울 당시의 철학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지금의 몸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온전히 영적인 존재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몸으로는 무슨 일을 하든 죽음 이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지금의 육체와 분리되는 것이고 그 후에 하나님의 때에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육체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고 그런 우리는 통해 ‘물질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다. 때문에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도 그러한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 있는 것이 맞다. 그래서 바울은 단순히 죽음을 통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 이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부활의 영광에 이르러 더 이상은 죽을 것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본래 창조 목적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 그것을 원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약속이라고 말한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5절)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준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 땅에서의 삶, 죽음 이후의 삶을 모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우리를 그렇게 준비하신다. 하나님은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지만 천사처럼 온전히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육을 가진 존재로서 창조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습으로 영원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과 동일한 몸은 아니지만 영원의 삶에 합당한 몸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정말 주님과 같은 몸을 입고 주님을 닮은 자들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궁극적인 소망이다.

그 확실한 보증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시다. 앞으로 약속을 시행할 것에 대한 보증으로서 우리가 계약금을 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확신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이런 바람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확고한 소망이다.

존 맥아더, “감옥에 있는 자가 석방을 바라고, 아픈 사람이 건강을 바라고,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바라고,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기를 바라고, 돈 없는 사람이 월급날을 바라고, 군인이 평화를 바라는 것처럼, 믿는 자가 탄식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몸과 우리가 입게 될 몸의 극명한 대조를 이해한다면 이 말이 이해될 것이다. 우리가 정말 그렇지 않은가? 더 주님을 사랑하고 싶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싶은데 나에게 있는 죄로 주님을 아프게 하고 성도들을 아프게 한다. 그것이 나에게도 괴로움이 된다. 주님을 배우고 알면 알수록 정말로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주님처럼 살고 싶다. 그런데 그게 안된다. 그런데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가능하다. 이 몸에 있는 동안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입을 때 가능하다. 그 때에야 우리는 창조의 목적을 영원히 이루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이다.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 맞겠는가? 이 몸에 최대한 오래 머무는 것인가, 아니면 주님과 같은 영광을 몸을 입는 것인가? 그래서 믿는 우리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바랄 수 있는 대상이고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다. 죽음으로 무언가가 끝난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무언가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바랄 수 있다.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럼 그냥 다같이 빨리 죽자가 결론은 아니다. 죽음은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기쁘게 바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은 그런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는다. 바울의 개인 종말론 강의의 결론이 되는 적용을 보자.

 

적용(6-10절)

좋은 교사들이 그렇듯, 바울은 끝에 와서 그동안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두 개의 적용점을 알려준다.

6절과 8절이 요약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6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8절)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담대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바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몸으로 있을 때는 단지 주와 따로 있는 것일 뿐이고 이 몸을 떠난다는 것은 주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의미가 이렇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죽음 이후에 주님과 함께 할 것을 바라고 기다리고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바울을 ‘죽음’으로써 위협하려고 했었던 사람들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죽음은 누군가를 위협할 때 매우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죽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여기까지가 요약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바라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1.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행한다(7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7절)

주님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삶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도 보이지 않는다. 약속하신 하나님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뭐가 보이는가? 이 땅에 탄식할 만한 고난이 보인다. 우리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실제적인 대적들이 보인다. 죽음이 보인다. 죽음의 고통이 보인다. 두려움이 보인다. 또한 세상의 성공도 보인다. 힘들게 살지 않아도 편안하고 즐겁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보인다.

주님은 없는 것 같은 이 상황이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행하겠는가? 주님이 없는 것 같으니까 없는 것처럼 행하겠는가?

그럴 수 없다. 우리가 몸으로 있을 때에는 단순히 주와 따로 있는 것뿐이다(6절).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다. 주님이 우리와 분리되어 있거나,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시거나, 전혀 관여하고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실 주님의 약속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다(마 28:20). 지금의 상황은 단순히 우리가 영원한 몸을 입고 주님과 함께하고 있지 않은 상황일 뿐이다. 그래서 주님이 안계신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겠는가? 보이는대로 살겠는가, 아니면 믿음대로 살겠는가? 무엇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가? 보이는 것이 속이고 있는가 믿음이 속이고 있는가? 우리는 바르게 보고 있는가 아니면 바르게 믿고 있는가? 보는 것이 실체인가 믿는 것이 실체인가?

죽음을 바라는 삶은, 죽음을 바랄 수 있는 삶은 믿음으로 산다. 우리가 믿는 것이 실체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우리를 현혹하는 것들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무엇을 봐야 하는지를 성경을 통해 이미 보여주셨다. 확신 가운데 서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1.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9절)

믿음으로 행하는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10절)

바울은 예외 없이 우리가 ‘다’ 그리스도 앞에 설 것이고 ‘함께’가 아니라 ‘각각’ 우리가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서 사는 삶인데, 그 전에 이 장막 같은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해서 우리의 주님은 보상하실 것이다.

이 심판대가 그리스도의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누가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에게 심판받을 것처럼 살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것이니 그분의 기준에 따라 살면 된다. 이 심판은 공정하다. 사람을 속이는 것처럼 속일 수 없다. 우리 마음의 숨은 동기도 모두 드러나게 된다. 이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서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행위를 생각하면 안된다. 우리야 그것만 보이지만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동기를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그 일만이 끝까지 남는다.

어떤 면에서 믿는 자에게 죽음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 하나의 궁극적인 소원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

 

도전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삶인가, 아니면 죽음을 바라는 삶인가? 시작에서 우리는 죽음을 준비할 수 없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삶으로 죽음을 준비할 수는 없다. 죽음을 바라는 삶이 사실은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다.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것이 죽음을 바라는 우리 믿는 자들의 참된 모습이고 그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다.

여전히 죽음이 두렵기만 하다면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이미 그리스도께 나아온 믿는 자들은 이 말씀을 꼭 기억하라. 지금 우리는 텐트에 살고 있다. 텐트에 모든 것을 걸지 말라. 이 땅에 내 집인 것처럼 살지 말라. 이 땅이 전부인 듯이 살지 말라. 더 나은 것을 간절히 사모하라. 우리가 온전히 주님과 함께할 그 날을 바라라. 바울이 이 영원의 실체를 믿음으로 보며 살았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믿음으로’ 더 나은 것을 바라보며 살았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