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죄인이 회개할 때

본문 : 시편 51편

설교자 : 최 종 혁

 

죄인이 죄를 지을 때 – 언제든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죄를 범하고 죄를 숨기려 한다. 어떻게든 감추려고 하고 그것을 위해 또 다른 죄를 범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의 근본에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임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다. 죄를 내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죄가 죄가 아닌게 된다. 그냥 한순간의 실수이거나 어떤 상황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다. 죄를 이렇게 보면 우리는 핑계 대기 쉽다. 죄에 대한 책임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상황으로 돌릴 수 있다. 혹은 죄를 인정하더라도 나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다. 내 입장에서 죄와 그 결과를 보면 별 것 아닌 것, 그럴 수도 있는 것, 어쩔 수 없었던 것들이 된다.

폴 트립은 이것을 “자신의 왕국에 사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다윗이 죄를 지을 때 그는 자신의 왕국에 살았다. 그 왕국은 다윗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해도 괜찮은 왕국이고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도 괜찮은 그런 왕국이었다. 최소한 그 순간에는 그러했던 것이다. 간음이나 탐욕, 살인을 다윗이 평소에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나단 선지자가 비유로 그 부분을 지적했을 때 다윗은 그런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반응했었다. 하나님의 왕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법에 따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죄의 유혹을 마주했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왕국이 아닌 자신의 왕국에 사는 사람처럼 자신의 입장과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했다. 그의 왕국에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죄인이 죄를 지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그 순간 우리 자신의 왕국에 들어간다. 그 왕국은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곳이다. 그래도 괜찮은 곳이다. 불평할 수 있고 짜증낼 수 있다. 화를 낼 수도 있고 욕심을 부릴 수도 있다. 책임을 미루고 게으를 수 있는 곳이다. 거짓과 속임수도 어느 정도 허용되는 빡빡하지 않은 곳이다. 다른 사람 얘기를 재미로 할 수 있는 곳이다. 나에게 정말 편한 곳이다. 내가 왕이어서 그렇다.

죄는 어떤 모습이든 왕이신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가 왕이 되는 것이다. 반역이고 쿠데타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원 받은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마찬가지다. 구원 받지 않은 자는 그런 삶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고 구원 받은 자는 그런 삶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구원 받지 않는 자는 왕이신 하나님께 계속해서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고 구원 받은 자는 이미 백기를 들었지만 때로 그것을 잊고 행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죄는 그냥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다. 내가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이고 그 해결이 바로 회개다.

물론 구원을 얻는 회개와 삶에서의 반복된 회개는 구분된다. 하지만 회개의 본질은 같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을 향해 지속적인 반기를 들고 있든 이미 백기를 들었든지 모두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회개가 필요하다.

그 회개의 모습을 시편 51편에서 다윗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다윗이 죄를 범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오늘 그의 회개하는 모습은 낯설다. 낯선 이유가 있다. 죄인이 가장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 그래서 가장 하지 않는 일을 다윗이 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드러낸다. 사무엘하 11장에서 우리아의 아내와 범죄한 다윗이 가장 원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죄를 감추기위해 우리아를 속이고 죽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윗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 죄는 그의 왕국에서 벌어진 일 같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와 대면하셨을 때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자신의 죄를 드러낸 것이고 이것이 회개의 시작으로서 성경은 그것을 ‘자백’이라고 말한다. 자백은 일반적으로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지만 성경적인 의미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자기 입장에서 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고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백의 좋은 대체어는 ‘인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정도 구체적인 인정이 필요하다. 먼저는 죄를 죄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 죄의 문제를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자백이고 회개의 시작이다. 오늘은 시편 51편에서 이 자백 부분을 좀 살펴보기 원한다.

시편 51편은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 용서의 은혜를 구하는 내용이 반복된다. 이 시는 논리적으로 잘 정돈된 시는 아니다. 차례차레 논리를 따라가며 주제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으로 눈물로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슷한 주제와 내용이 반복된다. 이 반복되는 내용의 전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초한 회복의 간구가 있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온 죄의 인정이 있다. 오늘 살펴볼 것이 바로 이 내면에 있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온 죄의 인정이다. 우리는 요한일서 1:9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죄의 인정, 자백이 참 빛에 거하는 자의 특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그 모습이 어떠한지를 다윗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자.

자백이라고 하면 흔히 자신이 잘못한 것을 나열하는 것을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 제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서 엄마한테 짜증을 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오늘 아이가 커피를 엎질러서 화를 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이런 식의 자백을 생각한다. 하지만 죄를 나열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자백에 있어 핵심은 아니다.시편 51편을 보면 어디에서도 다윗은 자신이 범했던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열하지 않는다. 물론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떤 죄를 범했는지 아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고 그것이 회개의 이유다. 때로는 구체적으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 죄를 인식하는데 있어 때로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체적으로 죄를 나열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는 않다. 필수적인 것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다. – 죄를 인정, 책임을 인정, 무능력을 인정

 

I. 죄를 인정

이 시편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다윗이 죄에 대해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세 개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우리말 번역에서도 이 차이를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 1절: 죄악; 2절: 죄악, 죄, 3절: 죄과, 죄; 이후에도 5, 7, 9절 등에서 등장

이 단어들의 차이를 강조하려면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죄악은 반역(정해진 선을 의도적으로 넘는 반항적 행동)으로, 죄과는 탈선(주어진 길에서 벗어남)으로, 그리고 죄는 실패(목표에 이르지 못함, 미달됨)로 번역할 수 있다.

물론 다윗이 이 단어들의 차이를 강조하려고 다른 단어들을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단어들을 통해 자신이 범한 죄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 심각성을 여러 측면에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께 반기를 드는 것이다. 왕을 폐위시키고 내가 왕이 되어 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또한 죄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것을 틀렸다고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완벽한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죄는 왕이신 하나님을 폐위하고, 아버지 하나님을 떠난 것이며 궁극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다윗이 이 표현들을 최대한 사용하여 자신의 행한 일의 심각성을 인정한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라고 할 때 우리는 ‘악’을 떠올린다. 그래서 얼마나 해를 끼쳤는냐를 가지고 죄를 판단한다. 거짓말을 해서 남의 돈을 빼앗으면 사기죄가 되지만 거짓말을 해서 위기를 모면하는 것은 지혜(융통성)라고 말한다. 우리 기준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성경은 죄에 그렇게 접근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선이시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것이 죄이고 악이다. 죄의 기준, 악의 기준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상황이나 결과를 보고 비교하면서 이건 그렇게 큰 죄가 아니고 나는 그렇게 나쁜 죄인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시며 아버지시며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내가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4절의 말씀이 그런 의미다.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한다. 앞에서 말한 그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이 아무 잘못도 한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우리아의 아내나 우리아, 더 나아가서 요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무슨 죄를 범했는가? 간음을 한 것은 우리아의 아내가 대상이었고 살인은 우리아가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의 결과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책망할 때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했다”(삼하 12:9)고 하셨고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삼하 12:10)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그의 죄악을 통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하나님 앞에 두었고 하나님을 망령되게 일컬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하지 말라고 하신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다. 이웃의 아내를 탐했다.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우리는 그래서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신 하나님,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 관계 속에서 죄를 짓는 것이고 당연히 관계의 문제를 가져온다. 죄를 지은 우리는 왕의 은총에서 아버지의 사랑에서 재판관의 자비에서 멀어진다. 이것이 죄가 가져오는 가장 비참한 결과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런 댓글을 본적이 있다. ‘이 땅의 괴로움에서 구해주지 않고 죽고나서 지옥에서나 구해주는 신은 필요없다.’ 이 말은 지옥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왕의 은총과 아버지의 사랑과 재판관의 자비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영원한 죽음이 어떠한지 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옥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땅에서 죽을만큼 괴로운 삶을 살라해도 감사하다.’

선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분리된다는 것은 정말로 비참한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우리의 죄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범한 죄는 어떤 죄든 절대로 가볍지 않다. 하나님께 범한 죄고 하나님과 관계의 문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II. 책임을 인정

이렇게 죄를 죄로서 인정한 다음에 필요한 것은 그에 대한 나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잘못을 하고 나서 부모가 잘못을 지적할 때 공통적으로 하는 말들이 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명백한 잘못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댄다.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때로는 자기 형제에게 그렇게 한다. 때로는 부모에게 그렇게 한다. 혹은 어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디서 배웠겠는가? 부모에게 배웠다. 아담에게서 배웠다.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사람이 먹은 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먼저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 하나님의 질문은 단순했다. 예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담의 대답은 길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 하나님은 아담에게 “왜” 먹었냐고 묻지 않으셨는데 아담은 장황하게 “왜”를 설명한다. 자신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자기가 먹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이유가 하나님이 주셔서 자신과 함께 있게 한 여자가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는 인정하지만 책임은 자신이 다 질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도 책임이 있고 아내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죄인인 우리들이 하는 일이 이런 일들이다. 처음에는 죄를 숨기려고 하지만 그것이 드러나면 다음은 책임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라고 말한다. 때로 우리 입장에서는 충분히 타당한 설명도 있다. 억울할 때도 있다. 아마 아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만 따먹은 것도 아니었고 자기가 먼저 따먹은 것도 아니었으니 이 죄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기 싫었을 것이다.

그것이 죄인이 죄를 지을 때 하는 일이다. 하지만 회개하는 죄인은 죄에 대해 인정할 뿐 아니라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는다.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1-4절)

다윗은 계속해서 이 죄가 자신의 죄임을 강조한다. 내 죄인 것이다. 우리아의 아내가 하필 그 때 자기 눈에 잘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고 핑계대지 않는다. 우리아가 자기 말을 안듣고 집으로 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결국 과부가 된 우리아의 아내를 자신이 거둬주는 은총을 베풀지 않았냐고 반박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의 죄라고 말한다. 자기 죄과를 자신이 알고 그 죄가 자기 앞에 있어서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이어지는 말씀도 보면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판단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의로우시다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4절)

쉽게 말해 이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그것이 의로운 일이고 순전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알고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자의 자세다. 이것이 다윗이 뒤에서 말하는 상한 심령이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다(17절).

재판에는 항상 항소라는 것이 있다. 판결에 불복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죄가 명확한 경우에도 형량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도 많다. 쉽게 말해 내가 죄를 지은 것은 인정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죄인이 죄를 지을 때는 그렇게 한다. 죄를 짓고 죄가 아니라고 한다. 죄인 것을 알아도 그렇게 심한 죄는 아니라고 한다. 죄에 대한 책임도 일부는 자신에게 있을 수 있지만 전적으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죄인이 회개할 때는 다르다. 자신의 죄를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해서 어떤지에 관계없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보는 것이 회개하는 자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남에게 겸손히 보여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고백하는 자가 회개하는 자다. 하나님과 자신, 둘 만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의 자백에 있어 두번째 필수 조건이다.

III. 무능력을 인정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다음 필요한 것은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6절)

지금 이 상황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것은 제사, 특히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다. 번제는 다른 제사와는 다르게 제물을 전부 태워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당시 다윗은 가장 번성하던 때였기 때문에 원한다면 가장 좋은 짐승을 잡아 최고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미가서에 나오는 것처럼 천천의 숫양,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을 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렇게 한다면 의미가 있지만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윗은 많은 것을 가졌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가 범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무능력했다. 그리고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능력함에 대해 다윗은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

애가 원래는 착했는데 실수로 이렇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죄인임을 고백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특징을 말할 때 ‘천생’이라는 표현을 쓴다. 아무리 말해도 방 정리를 안하는 애들에 대해 “넌 천생 지저분하구나”라고 말한다. 쉽게 화내지 않고 온유한 사람은 “천생이 착하다”는 표현을 쓴다. 다윗은 자신에 대해 “천생 죄인”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린 이런 표현을 TV에 나오는 흉악범들에게 쓴다. 저런 천생 죄인들은 어떻게 해야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다윗이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다 그렇게 천생 죄인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다 죄인들이다. 개중 괜찮은 사람들이 있다. 괜찮은 죄인일 뿐이다. 우리 중에 괜찮아바야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다. 지금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넘어간다고 해도 죄인인 나는 다시 이 심각한 죄의 문제로 돌아올 것이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만 한다. 모든 사람이 죄의 해결에 있어서는 무능력하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의 자백에 있어 세번째 필수요소다.

도전

정리하면 이렇다. 시편 51편은 진정 회개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전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초한 회복의 간구가 있고 그 내면에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온 죄의 인정이 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온 죄의 인정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죄를 죄로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죄를 범한 나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더하여서 이 죄의 문제를 내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자백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 그저 후회다. 회개는 죄인이 돌이켜야하고 회복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눈을 감고 나와 죄의 문제를 바라봤다면 이제는 눈을 들어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바라봐야 한다. 구원의 은혜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구원의 은혜로 그냥 나갈 수 없다. 뭐 맡겨놓은 사람처럼 달라고 할 수 없다. 나와 죄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신이 어둠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빛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나와 죄의 문제를 직시하여 내가 어둠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래서 죄인은 일단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다윗이 죄를 범할 때의 장면을 다시 생각해 보라. 다윗은 당시 소위 뭐에 씌운 사람 같았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죄의 길을 달려갔다. 마치 좌우를 가린 경주마와 같이 자신이 원하는 것 하나만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갔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 멈춰 세우셨다. 그리고 제대로 보게 하셨다. 그가 그동안 무슨 일을 벌였는지, 어떤 죄를 범했는지를 알게 하셨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 손에 반기를 들고 있든 백기를 들고 있든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다면, 일단 멈춰야 한다. 바쁜 업무를 내려놓고 멈추라.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멈추라. 사람들을 떠나 멈추라. 심지어 교회 일이라도 멈춰야 한다. 주께서 제사 자체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죄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죄의 책임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우리의 무능력함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봐야 한다. 멈추면 볼 수 있다. 그 때 생각할 수 있다. 그 때 하나님께 동의하여 우리가 어떤 자인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