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죄인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긍휼
본문 : 디모데전서 1:12-17
설교자 :  최 종 혁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 교회는 얼마 전 침례식을 했고 YP메시지를 통해 그분들의 간증문을 읽고 있습니다. 구원이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경계’입니다. 당시에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율법’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것, 즉 율법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죄를 깨닫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율법과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어떻게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들어 말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적인 질문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이고, 그에 대한 대답은 ‘그리스도의 긍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긍휼에 대해 4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에 대한 감사’, ‘긍휼의 이유’, ‘긍휼의 목적’, ‘긍휼에 대한 찬양’입니다.

긍휼에 대한 감사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12절). 사도 바울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기억한 것이 ‘감사’입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부분이 많이 등장하는데, 서신서의 처음 부분에 특히 두드러집니다. 그런 경우는 사도 바울이 당시 편지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편지 중간에 이와 같이 나타나는 경우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감사의 표현입니다.

감사의 대상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해주신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바울을 능하게 하셨고(12절), 충성스럽게 여겨 직분을 맡기셨으며(12절), 긍휼을 보여주셨고(13, 14, 16절), 그를 구원하셨고(15절), 그에게 오래참음을 보이셨습니다(16절). 이것은 사도 바울의 구원과 연관된 것들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이며 사도 바울의 행위나 그의 어떠함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절).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언제 어떻게 직분을 맡기셨나요? 우리가 잘 알듯이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5-18). 바로 이 때 그리스도는 바울을 구원하심과 동시에 그에게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바울이 어떤 자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13절).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상태를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라고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를 향해서 이와 같이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행 26:9-11). 사도 바울 자신도 ‘비방자’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강제로 하나님을 모독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박해자’, 교회와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행 9:1). 사울의 모든 일들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 사도 바울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폭행자’는 교만해서 다른 사람을 깔보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폭행자’라는 말에는 잔인함을 전제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악인이라도 더 잔인한 사람이 있는데 필요이상의 폭력을 가해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입니다. 어떤 번역자는 이 단어를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라고까지 번역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를 향해 이런 자였던 것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3-14). 사도 바울은 당시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이 일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빌립보서 3:6에서 그는 이런 자신에 대해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바라볼 때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후에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율법으로 흠이 없었지만 그것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충성된 자였고, 자신의 의를 좇는데 관심을 집중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지만 자신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을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구도자(求道者)’라고 하는데, 사실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 놀라운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갈 1:15-16). 사도 바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런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긍휼입니다.

그리스도를 비방하던 자가 그를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박해하던 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찾아내시고 그에게 긍휼을 보여주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고통스러운 상황, 불행, 비참한 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서 베푸는 것이 긍휼, 자비입니다. 그의 어떠함이나 행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주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긍휼의 이유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긍휼하심을 입은 이유에 대해 2가지를 말합니다.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3절). “알지 못하고 행한 것”에 대해 예수님과 사도 베드로도 같은 말씀을 한 바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행 3:14-17). 이 말씀들이, 알지 못하고 행한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긍휼을 입어 마땅하다는 말일까요? 그렇게 본다면 사도 바울의 말은 마치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말씀을 잘 읽어보면 사도 바울의 태도에서는 자신의 죄에 대해 변명하려는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알지 못하고 행한 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알고도 거부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예수님께서 이적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이 일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 때 하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6:4-6에서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회복될 수 없는 사람이 나오는데, 모든 지식을 알고 경험하고, 그러고 나서 타락한 자들입니다. 성령을 모독했던 바리새인들과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배교자들은, 지식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계시를 충분히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의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가르침을 받았고 이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힘으로 그렇게 했다고 결론내립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그 사실을 숨겨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어서 믿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믿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가룟 유다는 어떠했나요? 그 역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많은 이적들을 보았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는 일들도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거절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도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간증할 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행 26:19). 주님께서 그를 깨닫게 해주셨을 때 그는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용서받을 수 있는 죄인이었습니다. 이는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와 같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기준에서 스스로를 의롭다 여겨,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그것을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사도 바울은 스스로 ‘흠 없는 자’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닫게 해주셨을 때 그것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절). 이것이 우리가 긍휼을 입은 두 번째 이유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용서받을 만했다고 한들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주기로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베풀어 줄 은혜가 없었다면 그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겨우 간신히 구원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은혜를 주다가 “이제 더 이상 힘들어서 안 되겠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는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고 해도 언제나 그것 위에 있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그 은혜가 “믿음과 사랑과 함께”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죄인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은혜의 능력인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그 은혜가 믿음과 사랑을 함께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목적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15절). 이 말은 성경에서 5번 정도 나오는데, 뭔가 중요하고 신뢰할 만한 진리를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의 깊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15절). 이 단순한 몇 개의 단어가 그리스도의 긍휼을 놀랍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보이신 긍휼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절망적인 상황으로 친히 들어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해서 말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절).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합니다. 가장 나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구원받기 전의 사람은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 즉 긍휼을 받은 자들은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사도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을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만났던 많은 죄인들, 세리, 창기, 강도들에게는 험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외식하는 자’, ‘눈먼 인도자’, ‘어리석은 맹인’,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시며 강력하게 비난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런 바리새인 중 으뜸가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6절). 주님께서 바울에게 긍휼을 베푸신 목적은, 죄인 중에 괴수인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오래참으심을 보이심으로서 이후에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래참으심은 하나님의 특성 중 하나이고(출 34:6; 민 14:18; 욘 4:2),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즉각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길이 참으심을 나타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2-23). 하나님께서 오래참으시는 것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 우리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구원을 이루심으로 인해 내가 얻는 유익에만 집중합니다. 그것도 사실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오래참으심을 보이셔서 그분의 의로우심, 권능,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바울이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통해 구원받은 것은, 모든 영생 얻는 자들의 본이 됩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이 그리스도의 긍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모두가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로’가 아니라, 우리의 그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긍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의 어떠함이나 의로움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또한 그는 믿지 않을 때 알지 못하고 죄를 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는 죄인 중에 괴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에게 일체 오래참음을 보이셔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어떠한지에 대한 본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구원에 대해 오해하곤 합니다. 자신이 뭐라도 되어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과거의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은 이후에 신분적으로 의인이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할 수 있는 자가 되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고 긍휼을 입은 자의 태도입니다.

긍휼에 대한 찬양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17절). 이것이 그리스도의 긍휼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이 보여야할 당연한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맺습니다. 감사는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했고 찬양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긍휼의 시작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계획하셨고 시작하셨습니다. 이 찬양은 다른 누구를 향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향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향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긍휼로 구원받은 자만이 이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죄인은 스스로도, 다른 누구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 이 긍휼을 맛보지 못했다면, 낮아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합니다. 낮은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이 구원의 은혜를 맛보신 분들은, 자신이 어떤 상태에서 긍휼을 입었는지 잊지 마십시오. 받은 은혜에 감사하시고 찬양하십시오. 이 은혜와 함께 온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삶에서 맺어 가시길 바랍니다. 입술과 삶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이 높아지시고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실 수 있기를, 하루하루 긍휼을 입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