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존중할 자를 존중하라

본문 : 출애굽기 20장 12절

설교자 : 최종혁

지난 여름에는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삶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 한 분 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모든 일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참된 예배다.

십계명의 나머지 6계명은 하나님과 나의 이런 수직적인 관계가 나와 이웃들 간의 수평적인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주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도 밝히 말씀하셨듯 모든 율법의 계명은 크게 둘로 요약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기초가 되는 계명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기초 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의 말처럼, 우리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고, 반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도 없다.

율법의 축소판과도 같은 십계명에도 이 두 요소가 잘 구분되어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십계명의 돌 판이 두 개인 이유가 하나는 1-4계명이 기록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 5-10계명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아마 그런 이유 보다는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언약을 맺는 두 당사자를 위해 두 개의 돌판이 기록되어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은 있다. 정확하게 두 개의 돌판에 같은 내용이 기록된 것인지, 각각에 나눠서 기록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명령의 내용이 크게 둘로 구분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번째 명령들의 시작이 바로 5번째 계명이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오늘은 이 명령의 무게, 의미, 실천이라는 세 개의 포인트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겠다.

명령의 무게

앞의 계명들에 비해 5번째 계명은 무게감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갑자기 어린 아이들에게 해당되는 명령이 주어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거의 즉각적으로 “자녀들아, 부모님 말씀 좀 잘 들어라”로 읽어 버린다.

하지만 앞의 명령들과 이어지는 명령들의 대상이 동일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명령만 주어진 대상이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 생각해보라. 이스라엘 백성 중 한 가족이 손을 맞잡고 이 놀라운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1-4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5계명이 되자 옆에 자녀를 바라보면서 ‘이건 니 얘기야’ 이렇게 말했겠는가. 그렇지 않다.

5계명은 일차적으로 어린 아이들이 대상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부모 아래 태어난 모든 사람을 말하고 있다. 부모가 없이 태어나는 사람이 없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대상이 된다. 혹시 오늘 말씀 본문을 보고 내가 아닌 자녀를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 생각은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자녀들에 대한 말씀이 아닌 것도 아니니 자녀들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5계명에 대해 생기는 질문은 왜 이것이 5번째, 즉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 중에서는 첫번째에 위치하느냐다. 이어지는 명령들이 이웃 간의 관계에 있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하고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데 비해, 상대적으로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니 지키면 좋은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그 자체를 심각한 범죄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도덕의 영역이지 법의 영역으로는 잘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계명이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의 첫번째에 위치한 이유는 있다.

십계명이 중요도에 따라서 순서가 정해져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번째 계명들의 기초가 제 1계명인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번째 계명들의 기초는 바로 제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태어나 가장 먼저 만나는 이웃이 바로 부모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라. 아이에게 있어서는 부모가 전부다. 아이가 배고프면 어떻게 하는가? 부모를 찾는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아플 때, 뭐가 잘 안될 때, 부모를 찾는다. 사고 쳐도, 억울한 일 있어도 부모를 찾는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부모에게서 숨는다. 즉, 부모가, 다른 말로 하면 가정이 우리 모두의 첫 학교이자 병원이자 정부이자 법원이자 사회인 것이다. 첫 교회도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정을 디자인하셨기 때문이다. 동물들을 보면 부모가 이런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들이 많다. 오히려 ‘가정’이라는 개념을 가진 동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관계인 결혼에 기초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가정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되게 하셨다. 사람은 그 가정을 통하여 사람으로서 성장한다. 육적으로 성장할 뿐 아니라, 인격적, 지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라는데, 부모와의 관계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5계명은 이웃 사랑 계명들의 기초가 되고 그래서 정말 중요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명을 어겼을 때의 형벌은 사형이었다.

출 21:17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 21:18-21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외식의 예로서 바로 부모 공경에 대한 명령을 그들이 하나님을 핑계로 지키지 않는 것을 말씀하셨다(마 15:3-6). 그만큼 부모 공경은 기초적이고 중요한 명령이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앞선 명령들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어지는 명령들의 사이에 위치하여 연결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특히 모세오경에서는 이 ‘공경하라’는 명령은 하나님과 부모 외에는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고,그것이 우리 삶의 근간이 된다.

오늘날 전통적인 가족관이 변화의 정도를 넘어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도 이런 면에서 우리가 절대로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있듯이, 사탄은 계속해서 인간관계의 근간인 가정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결혼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니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또 같은 이유로 남남 혹은 여여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자녀를 낳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적인 선택의 문제로 본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것 비혼 출산도 같은 맥락에 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이미 가정의 일이 아닌 사회의 일이 되어 버렸다. 부모들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육아독박(독박육아)’이라는 말은 정말 서글프다.

방금 언급한 것들은 그 자체로서 죄가 아닌 것들이 많다. 하지만 결국 그 이면에 있는 동기가 선하지 않고 끝내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정의 원리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됨을 기억해야한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사탄은 가정을 공격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질서에 대한 명령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다른 명령들보다 먼저 주신 것이다.

그럼 그 가정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령을 살펴보자.

명령의 의미

“공경하라”

이 명령을 거의 즉각적으로 아이들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공경하라’는 명령도 ‘순종하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명령은 아이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아니다.

공경하라의 문자적인 기본 의미는 ‘무겁다’다. 그래서 명사형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위엄을 나타내는 단어로 많이 사용되었다. 한자 무거울 ‘중’에 해당된다고 이해하면 쉽다. 그래서 이 명령은 기본적으로는 부모를 중하게 여기라는 명령이다. 부모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마땅한 대접을 하는 것, 즉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역으로 이야기 하자면, 가볍게 보지 않는 것, 무시하지 않는 것,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부모는 그저 우연찮게 나의 부모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음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하게 부모를 대해야 함을 이 명령을 말하고 있다.

이 명령에는 ‘질서’가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은 가정에 대해서 다른 명령을 주실 수도 있으셨다. 대표적으로 가족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주실 수도 있었다. 가족의 근간이 되는 관계인 부부에 대한 명령을 주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정 내에서의 수직적인 관계에 대한 명령을 주셨다. 즉, 이 명령은 질서가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창세기 초반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기록에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이 ‘질서’에 대한 부분이다. 질서는 줄을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할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셨을 뿐 아니라 그 만들어 내신 것들을 제자리에 두시는 일을 하셨다.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구분하셔서 각각의 자리에 두셨다. 물을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셨고, 육지를 만드시고 물은 한 곳(바다)에 모이게 하셨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은 있어야할 곳에 두셨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창조의 모습이었다.

인간 사회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질서를 세우셨다. 이 질서는 변하지 않는 진리로서 우리 사회가 올바르게 동작하게 한다. 인간의 타락 이후로 조금씩 이 질서에 균열이 생겼고 그것이 사회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위에 우리 사회는 세워져있다. 그리고 그 질서의 기초는 앞서 말한대로 가정이다. 가정에서 이 질서가 바로 세워지지 않고, 가정에서 이 질서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사회의 질서도 그렇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다른 명령보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명령을 주셨고, 그 핵심은 질서에 있다. 자녀가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세우신 권위인 부모를 존중하는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명령에는 성경의 다른 명령들도 그렇듯, 마음과 행동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부모를 전혀 존중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유, 예를 들면 경제적인 이유나 물리적인 이유 때문에 부모의 말에 따르고 부모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마음으로 존중한다고 하면서 아무런 행동이 없어서 부모가 그것을 전혀 알 수 없다면 그것도 존중한 것은 아니다.

이 명령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척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는 것도 사랑이 아닌 것처럼, 부모를 공경하는 것, 존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 진심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잘 표현되어야 한다.

“네 부모를”

다음으로 공경의 대상으로 하나님은 “부모”를 말씀하셨다. 부모, 즉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무섭게 하는 사람, 때리는 사람만 대상이 아니다. 반대로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 안때리는 사람만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부모를 수식하는 단어는 ‘너의’ 외에는 없다. 즉, 부모가 어떤 부모인지는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나의 부모라면 이 명령을 내가 실천하고 적용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부모의 성품에 관계 없다. ‘존중할만한’ 부모를 존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부모라는 것 자체가 이미 ‘존중할 자’가 된 것이다. 부모가 얼마나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서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도 관계 없다. 유산을 많이 남겨줄 부모만 공경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한테 까다롭지 않게 하고 잘 돌봐주고 내 말을 잘 들어주는 부모만 공경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또 여기에는 젊고 힘 있는 부모만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해서 독립을 했다고 해도 여전히 내 부모는 내 부모다. 어느 순간 부모님보다 내가 더 클 때가 있다.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여러모로 내가 더 큰 사람이 될 때가 있는 것이다. 더 많이 배우고 사회적 지위도 높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명령은 계속해서 적용된다.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나도 마찬가지다. 부모를 존중하는 모습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 부모에 대해서 존중해야 한다는 명령 자체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에 인간적으로 정말 어려운 상황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도저히 마음으로 존중해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더 많은 도전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부모를 존중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할 때 항상 우리가 마주치는 문제다. 나의 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서도 우리는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쉬운 것이 나에게는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가 힘들어도 다른 명령들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이 때도 그렇게 해야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를 다시 마음에 새기고, 우리 모두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그리하면 …”

다른 명령과 다르게 이 명령에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 은혜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상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인 일반 원리다.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는 단순히 장수할 것에 대한 약속이라기 보다는 은혜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것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악한 자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권하고 나쁜 것을 멀리하라고 하는 것이 부모다. 어려서부터 술담배를 권하고 마약을 권하는 정상적인 부모는 없다. 원하면 남의 것을 마음대로 훔치고 빼앗으라고 가르치는 부모도 없다. 특히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라면 그 부모를 존중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삶을 망가뜨릴 수 있는 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결국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게 할 것이다.

이 은혜의 약속은 부모를 공경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여기에 더해서 성경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며(엡 6:1), 또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골 3:20). 부모를 존중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고 이 명령을 정말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명령의 실천

이 명령이 적용되는 범위는 사실 가정을 뛰어 넘는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단순히 ‘부모’를 존중하라를 넘어서서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존중할 자를 존중하라’는 명령이 되기 때문이다(롬 13:7).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우리는 마땅히 존중할 자들이 있고 그들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제 5계명의 핵심은 가정에 있으므로 가정 내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해 보자.

성경을 보면 부모 공경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가 강조됨을 알 수 있다. 여전히 부모의 권위 아래 있는 어린 자녀와 장성한 자녀의 경우로 나눠서 생각해 보자.

어린 자녀 : 부모에게 순종하라

어린 자녀란 부모의 공급과 보호 아래서 함께 살아가는 자녀를 말한다. 이 경우는 부모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이고, 따라서 부모를 존중하는 모습으로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순종이다.

앞서 읽었던 신명기 말씀에 나오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잠언은 일차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의 말씀인데, 그것을 잊지 말고 순종해야 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예, 잠 6:20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분명한 명령으로 주었다(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과거에 비해 오늘날은 자녀들이 이 말씀에 따르는 것이 더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귄위는 우리 사회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자 사회 제도는 점점 권위 자체를 제거하는 쪽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다. 교권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고, “웃어른”, “공경”과 같은 단어는 점점 사장되어가고 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도 부모의 권위보다는 아이의 인권이나 자율성이 더 강조된다. 물론 아이의 인권을 무시하고 부모의 권위를 세우는 것만 중요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 둘을 대립하는 것으로 만들어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문제다. 순종은 구시대적 가치라는 생각이 문제다.

아이들의 인권 혹은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아이들이 자신의 행복에 관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또 그래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이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는 것은 결코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 어린 지도와 인도가 필요하다. 2살짜리 아이가 원한다고 해서 날카로운 칼을 쥐어줘서는 안된다. 5살짜리 아이가 원한다고 해서 자동차 핸들을 쥐어줘서는 안된다. 15살짜리 아이가 원한다고 해서 자기가 원하는 집에서 혼자 마음대로 살게 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기위해 부모에게는 권위가 필요하고 아이들은 부모의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이고 올바른 가정의 모습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일까. 우선은 앞서 명령의 의미에서 말했던 것처럼 부모를 가볍게 보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그것은 부모의 말에 따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부모의 말에 하나님의 권위가 있음을 알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순종이다.

어떤 이의도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자녀는 자라면서 생각이 자라고 분별력이 생긴다. 자기 의견을 부모에게 말할 수 있다. 부모가 하나님은 아니기에 자녀가 아는 것을 모르고 잘못된 순종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정중하게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다.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존중하면서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부모에 대한 태도도 중요하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가 하라는대로 하기는 하지만 의도적으로 말을 못들은 척하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나중에 한다고 미루기도 한다. 이 역시 순종하는 모습은 아니다. 부모에게 무례하게 말하는 것,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에게 부모의 좋지 않은 면을 말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부정적인 예를 들었지만, 결국 부모의 말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서 순종하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사춘기가 되어서 중2병에 걸렸어도 마찬가지다. 고3님이 되셔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에도 부모를 경멸할 수 있는 권리가 자녀에게 생기지 않는다. 존중할 자를 존중해야 한다.

어린 아이를 둔 부모 역시 이 계명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순종하기를 가르쳐야 하고 권위를 가르쳐야 한다. 친구 같은 좋은 관계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진 자로서 양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삶이 되도록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좋은 믿음의 본을 보여서 그들이 더욱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야 한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가르칠 것을 가르치고,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장해 가는 본이 어린 자녀들에게는 필요하다.

성인 자녀 : 부모를 돌보라

다음으로 성인이 된 자녀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는 대부분 결혼을 해서 독립을 한 상황을 말한다. 요즘처럼 결혼이 늦는 시대에는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경제적으로 독립 하고 스스로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성인 자녀로 봐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성경이 강조하는 부모 존중의 모습은 순종이 아닌 돌봄이다. 독립을 했다는 것은 더 이상 부모의 권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순종의 의무는 없다. 하지만 부모를 여전히 존중해야 하고 그때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부모를 돌봐야 한다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제 5계명을 통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꾸짖으시면서 이 부분을 언급하셨다.

마 15:3-6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여기서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은 경제적인 도움을 드리는 일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마땅히 부모에게 드려야할 것을 “하나님에게 드렸다”라고 하기만 하면 부모에게는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바울도 이것이 마땅히 해야할 일임을 강조했다.

딤전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부모는 그만큼 더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스럽게 도움이 필요한 부분들이 생긴다. 경제적인 필요가 있다면 도와야 한다. 외로워 하신다면 대화 상대가 되어드릴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부모님의 지혜와 조언을 구할 필요도 있다. 그대로 해야하는 의무는 없지만 신중하게 고려하여 부모를 존중해야 한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은 어떨까? 요즘은 부모들이 먼저 싫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닫아 두어서는 안된다. 부모와 가까이 있으면서 지속적인 도움을 드려야할 상황도 있고, 그럴 때 자녀들은 기꺼이 부모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렇게 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어쩌면 지금 부모님이 성인 자녀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전화 한 통, 식사 한끼 일 수도 있다.

지혜자는 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잠 23:22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앞서 말한 구체적인 적용은 다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성인이 되었다 해도 여전히 부모는 내가 존중할 자고 그렇기에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도전

어쩌면 오늘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낡은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현대의 사회학이나 심리학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는 예전의 이야기일 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오래된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오늘날 우리가 순종해야 할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특징 중의 하나를 사람들이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향은 사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사람 사이에는 존중이 사라지고 편 가르기와 갈등만 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렇게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는 일이다. 전도가 필요한 가족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십계명의 제 5계명을 기억하고 순종해 보기 바란다. 그 가족이 어린 아이이든 나이드신 부모님이든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 모습에서 세상과는 다른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가정이 제 5계명에 순종하는 가정이 된다면, 또한 세상의 다른 가정에게도 복음의 빛을 비출 수 있을 것이다.

제 5계명은 풍성한 삶이라는 은혜의 약속이 있다. 이것은 비단 우리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복이 아니다. 우리의 자녀, 우리의 부모님, 우리의 배우자, 직장 동료, 이웃 주민에게 참되고 영원한 삶을 정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존중할 자를 존중하는 우리의 삶이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