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신을 낮추라
본문: 누가복음 18장 9~14절
설교자: 조정의

지난 시간 저는 기도를 떠받드는 두 기둥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믿음’이고 둘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끈질기게 구하는 과부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그 불의한 재판장도 끈질긴 요구를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겠냐고 물으셨습니다. 믿음을갖고항상기도하라고말씀하신것입니다.

이제 ‘겸손’에 대해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오늘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기도에 꼭 수반되어야 할 태도인 겸손을 가르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겸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1. 비유의 대상(9절)

누가는 예수님이 누구를 대상으로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분명하게 밝힙니다.

“또 자기를의롭다고믿고다른사람을멸시하는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9절)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교만한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 때문에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대상으로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꼭 바리새인이 아니더라도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교만할 수 있습니다.

J. C. 라일은 우리 모두가 “천성적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합니다. 교만은 “아담의 모든 자손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 질병”이라고 말합니다(라일, 237). 그의 말처럼 교만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죄이면서도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왜 심각한지 잠시 교만에 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교만은 첫 사람 아담을 무너뜨린 죄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고 싶었습니다. 인류가 겪는 모든 죄의 저주가 교만에서 시작되었으니 교만이 얼마나 심각한 죄입니까?

또한 교만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죄입니다.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몰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한다면 누구도 스스로 의롭다고 자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처럼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멸시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 우리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이 되려는 반역죄가 교만입니다. 그러니 교만이 얼마나 심각한 죄입니까?

우리는 이 죄에 너무 쉽게 넘어집니다. 생각하지도 못할 때 은근히 우리 안에 스며드는 죄가 교만입니다. 단호하게 경계하지 않으면 교만은 너무 쉽게 우리 마음 문을 열고 들어와 주인행세를 합니다. 빨간 신호에 정지선에 멈춰 있을 때 특별한 생각이 없다가도 옆에 신호를 어기고 달려가는 차를 보면 “어휴, 저런 사람이 다 있네”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법을 지키고 있는 자신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미투 운동 뉴스를 읽으면서 “인간의 탈을 쓰고 어쩌면 이런 일을 할 수 있지?”라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음에 교만이 넘어 들어옵니다. “나는 저 사람 보다는 낫다”는 생각입니다.

교만은 교회 문도 열고 들어옵니다. 지각하여 늦게 들어오는 사람, 힙합 패션으로 코와 귀에 피어싱을 하고 온 청년, 믿음이 연약한 어린 아이 같은 성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자만하여 판단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사람에게 있어 교만은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잠 3:34). 여러분은 혹시 이 비유의 대상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까? 이제부터 예수님의 비유를 잘 들어보시고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2. 비유의 내용(10-13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10절)

예수님의 비유 속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오전 9시, 오후 3시) 매일 두 번씩 회중을 위한 공식적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성전에서 기도 드릴 때 효과가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되면 많은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바클레이, 307).

여기 두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극과 극인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덕망 있고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능하여 잘 가르치고 품격 있게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 베푸는 선행과 종교적 헌신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금식, 십일조-12절).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야말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그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가르침이나 행동으로 많은 존경을 받는 목사님이나 일꾼, 교회학교 교사 정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건의 시간을 빼먹지 않고, 늘 하루에 세 번 기도하고, 가정 집회를 빠짐없이 하고, 무엇이든 소득이 생기면 하나님께 일정 부분 드리고, 어려운 성도를 돕고, 교회 집회에 절대 빠지지 않고, 늦지 않고, 깔끔하고 단정한 의복을 입고 일찍 들어와 앞자리에 앉아 예배할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러 올라간 또 다른 사람은 ‘세리’입니다. 성경에 세리는 많은 경우 “죄인”과 함께 언급됩니다(눅 5:30; 7:34). 많은 사람이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범죄한 성도의 출교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마 18:17). 죄인의 대명사가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던 이스라엘 입장에서 세리는 로마 정부를 대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금을 걷는 일을 하고 있는 매국노였습니다. 거기에 많은 세리들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정해진 세금 이상을 착취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분노를 더 많이 샀습니다. 세리의 친구는 다른 세리와 죄인들뿐이었습니다. 누구도 세리와 어울리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세리는 친일파입니다. 나라와 백성을 팔아 산 고급 외제 승용차를 끌고 교회 주차장으로 들어옵니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비싼 옷을 입고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손에 고가의 시계가, 코와 귀에는 피어싱이 되어 있습니다. 손등에는 문신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내가 매주 앉는 맨 뒷자리에 앉습니다.

조금은 과장된 묘사지만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라고 했을 때 당시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자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감정이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생겼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둘 중 한 사람 옆에 앉아야 한다면 어디에 앉기 원하십니까? 둘 중 한 사람과 마주앉아 식사를 함께 해야 한다면, 혹은 집으로 초대하기 원한다면 누구와 함께 하고 싶으십니까?

겉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비유 속에 그들이 하고 있는 기도를 통해 진짜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봅시다.

1) 바리새인의 기도(11-12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뒤에 등장하는 세리가 멀리 섰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아마도 바리새인은 세리와 멀찍이 떨어진 성전 안뜰 깊은 곳까지 들어갔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참 특이합니다. 먼저 그는 이 짧은 구절의 기도문에서 “나”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언급합니다. 그의 기도문을 직접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바칩니다. 나는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셔서,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한 일만 강조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이렇게 기도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 내가 너무나 대단한 사람이라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대럴 벅, 750)

그는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분리합니다.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토색은 속여서 빼앗는 죄(고전 5:10), 불의는 공정하지 못한 죄(출 23:1-위증), 간음은 부부관계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적인 죄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죄는 구약의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죄입니다(출 20). 또한 신약 성경에서도 이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고전 6:9-10).

혹시 바리새인이 이런 마음으로 기도한 것은 아닐까요?

‘주님 제가 주님의 용서를 받지 못했더라면, 은혜를 얻지 못했더라면 죄인들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속여서 뺏고, 불의하고, 간음을 하며 삶을 망쳤을 것입니다. 그런 저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주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해주신 용서나 은혜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자기를 구분하여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지, 그것에 감사합니다. 심지어 대놓고 멸시합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성전 밖에 있는 불특정 다수의 죄인들과 같지 않음에도 감사하지만, 특히 성전 안에 저 멀리 서 있는 죄인 세리와도 같지 않음에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당시 기도 방식대로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소리를 내어 이런 기도를 했을 것인데, 그의 기도문을 잘 생각해보면 이게 하나님께 하는 기도인지, 남들이 듣고 자기를 높이길 원해서 하는 기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는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무엇을 근거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어떤 기준으로 세리와 죄인을 멸시하는 것일까요? 12절에 그 근거가 나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2절)

그가 자부심을 가진 이유는 자기의 ‘행위’에 있었습니다. 아주 철저한 종교생활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구약 성경은 일 년에 오직 한 번 대속죄일에 금식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예수님 당시엔 바리새인들이 대체로 일주일에 두 번(월, 목/모세가 시내산에 율법책을 받으러 간 날과 돌아온 날) 자발적으로 금식하였습니다. 자신은 성경의 규정보다 더 열심히 법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얻는 모든 것의 십일조를 냅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채소, 박하, 운향 같은 식물과 채소까지도 하나님께 철저히 드렸습니다(마 23:23; 눅 11:42). 이런 열심이 남들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특히 저 세리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기준으로 자기를 의롭다 여기고 남을 멸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39,40,42)

바리새인이 행한 금식이나 십일조는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그들의‘마음’입니다. 바리새인의 이 기도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통회하고 낮아진 겸손이 보이십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기를 바라봐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다른 이를 멸시했습니다. 한 마디로 교만했습니다. 그 교만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2) 세리의 기도(13절)

이제 바리새인이 멸시한 죄인 세리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절)

먼저 세리의 행동이 나옵니다. 그는 멀리 서 있습니다. 성전 안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이방인의 뜰 끝부분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도 다른 사람과 따로 서서 기도를 드렸는데, 세리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고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유는 완전히 다릅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의롭게 여겼기 때문이고, 세리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불의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 성전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리기 원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깨달았기 때문에 감히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또 가슴을 칩니다. 여인들이 장례식에서 비통하게 여길 때 했던 행동입니다(눅 23:27).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그의 행동에서 묻어납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소서”(힐라스코마이)는 희생 제물을 통한 속죄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백성의 죄를 속량(히 2:17) 하셨다고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자기 죄를 사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며, 자신은 그 앞에서 철저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 은혜로 자기 죄를 사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에스라가 백성을 위해 했던 기도와 유사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또 세리의 기도는 다윗 왕의 기도와 유사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1-3)

세리는 자기보다 더 못한 죄인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며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간 세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만 섰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기를 바라봤습니다. 그분 앞에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요구되는 겸손입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누구 옆에 앉기 원하십니까? 누구와 함께 식사하기 원하십니까? 누구를 영접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3. 비유의 교훈(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4절)

예수님은 판결문을 읽어주십니다. “자, 이것이 두 사람이 올린 기도의 결과다. 바리새인은 그 기도가 열납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람(세리)이 의롭다는 판정을 받고 그 집으로 내려갔다.”

아마도 바리새인은 그 기도를 드리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의기양양하게 내려갔을 것입니다. “오늘도 참 기도 잘 드렸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기뻐하실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습니다.

마이클 윌코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너무 자축하는 말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게 날아가기는커녕 땅에서 이륙할 수조차 없었다’(마이클 윌코크, 225)

오히려 멀리 서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던 세리, 그가 의롭다 함을 얻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기도는 겸손에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비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절)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고 말했고, 베드로 역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라고 말했습니다.

잠언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겸손이 존귀의 길잡이입니다. 겸손한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겸손을 입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겸손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 11:29).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 그 겸손의 마음을 품으라고 바울은 말합니다(빌 2:5).

세상에 악한 자를 볼 때, 우리는 쉽게 “사람으로 어떻게 저럴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보다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은 옆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 저 사람 참 악하지, 그런데 나는 저 사람뿐만 아니라 네 죄 때문에 죽은 거란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내가 만든 기준에 못 미치는 이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월감을 느낍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저렇게 말하지? 저렇게 행동하지? 판단하고 멸시합니다. 우리 겸손의 왕,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 앞에서 너를 보지 말고, 내 앞에서 너를 봐라. 거룩한 보혈을 네 대신 흘린 나를 위해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하나님 앞에 선 자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으신 구세주를 믿고 따르는 자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 그 거룩한 하나님, 온유하고 겸손한 구세주 앞에서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끄러워하고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은혜를 내려주소서…’ 이렇게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품어야할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