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녀들은 왜 부모를 공경하는가?
본문: 에베소서 6장 1절~3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말씀 제목은 “자녀들은 왜 부모를 공경하는가?”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으로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원하는데, 먼저 오늘 참석하신 분 중에 “자녀”이신 분들이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확실히 배우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면에서 “자녀들은 왜 부모를 공경(해야)하는가?”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목적은 “부모”이신 분들이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자녀의 공경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이 측면에서는 “자녀들은 왜 부모를 공경하는가? 어떻게 그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최고의 본문 중 하나는 바로 에베소서 6장 1~3절이며 오늘의 본문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감금되었을 때(AD 60~62)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함께 쓴 옥중서신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1~3장은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구원에 대한 교리, 4~6장은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삶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특별히 5장 후반에서 6장 초반에서는 여러 인간관계 속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남편과 아내/부모와 자녀/상전과 종). 오늘 본문에서도 시작부터 그 명령의 대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1절 자녀들아…너희 부모에게(2절네 아버지와 어머니)

오늘 본문에서 명령의 대상은 바로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뜻대로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의무를 다해야 할 대상은 바로 “너희 부모”(1절)입니다.

바울은 “너희 부모”(1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2절)라고 두 번 강조하며 자녀들이 각각 자기가 속한 가정에서 자신의 부모, 즉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옛사람의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 충만 가운데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을 통해 이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행할 능력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1절)

그럼 먼저 첫 번째 “자녀들이 왜 부모를 공경하는지” 혹은 “공경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 끝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1절 …이것이 옳으니라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마땅한 일입니다. 신기한 것은 바울이 이 편지를 기록한 로마 제국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 지역을 장악했던 그리스 헬라 문화, 또 서양과 동떨어진 동방의 공자 사상까지 모두 하나같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같이 그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당연한 도리라고 말하며, 이치에 맞는 예의라고 말합니다.

유대인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녀는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나 옳은 일이었는지 모세는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해도 순종하지 않는 자식을 “완악하고 패역한 자식”이라 불렀고, 그런 자식이 있으면 장로들의 재판에 따라 모든 사람이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신 21:18-21).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서도 “부모를 거역하는 일”은 항상 대표적인 죄악 중 하나로 거론됩니다(롬 1:30; 딤후 3:2).

그러면 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무슨 근거로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가지 근거를 찾았는데, 하나는 부모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자녀가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부모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자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죽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는 생존의 이유가 됩니다.

저에게 조카가 둘이 있는데, 제 여동생과 동서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재준이와 하영이가 존재합니다. 둘 중 하나만 바뀌어도 재준이와 하영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종 두 사람이 아이를 키우는 집에 들를 때가 있는데, 제가 경험한 적은 없지만, 여기가 바로 전쟁터구나 싶습니다. 밥 먹이고, 약 먹이고, 매일 병원 데리고 다녀야 하고, 옷 입히고, 옷 벗기고, 씻기고, 재우고, 놀고, 치우고… 아주 가끔 제가 두 아이 중 하나를 잠시 봐줄 때가 있는데, 속으로 ‘내가 얘를 버리고 몇 시간만 방치해도 얘는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부모가 없으면 아이는 생존의 위협을 받습니다.

바로 이 두 가지 근거로 인해 로마 사상뿐만 아니라 그리스 헬라 사상, 공자 사상까지 시대나 지역을 불문하고 하나같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결론 내립니다. 부모 때문에 자녀가 존재하고 생존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합당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1절에 있는 작은 문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1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주 안에서.”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감옥에서 쓴 편지 중 하나인 골로새서 3장 2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풀어 설명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우리말 성경).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라면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창조하신 분이며 당신의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육신의 부모를 통해 당신을 낳으시고 기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에게 마땅히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부모를 거역하고 징계를 받아도 회개하지 않는 자녀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곧 부모 위에 두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라면 자녀를 바라보며 “들었지? 무조건 순종해”라고 말하기 전에, 자녀에게 무엇을 명령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골로새서 3장 20절 말씀으로 자녀들에게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문 1절에서도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분명히 명령합니다. 이 말씀이 선포된 회중 가운데 자녀들은 이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을 듣는 회중 가운데 부모가 순종해야 할 말씀이 있었으니 곧 에베소서 6장 4절에 기록된“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로 보건대 자녀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부모가 모든 일에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학생, 청년들이 부모의 명령에 순종하기 힘들어하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면 부모의 명령이 주의 교훈과 훈계와 동떨어진 편견과 세속적인 생각에 의한 것이라서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자녀에게 말하기 전에 내가 자녀에게 하는 명령이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에 합당한 것인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 특히 주를 믿는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해 부모에게 권위를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에 순종하여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부모의 명령이 부모에게 권위를 두신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면 아이는 심각한 내적 갈등과 함께 부모에게 순종하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녀에게 내가 하는 명령이 정말 주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말입니다. 자녀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부모에게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신다면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가르치십시오.

2. 명령이기 때문이다(2절a)

자녀는 왜 부모를 공경하는가? 첫째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이유는 2절 끝에 있습니다.

2절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계명, 곧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약속이 있는”이란 수식어가 있는데 이는 세 번째 이유를 설명할 때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이 계명이라는 사실을 주목해 봅시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공경은 1절에 나오는 “순종”과 비슷한 의미지만 조금은 다릅니다. 순종이 외적인 순종이라면 “공경”은 외적인 순종에 수반되는 내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1절과 2절을 통해 내면과 외면 모두 부모를 경외하는 자녀가 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모를 향한 순종의 행위뿐만 아니라 공경의 태도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성경에서 아주 뚜렷이 찾아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출애굽기 20장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신명기 5장 16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신 5:16)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아주 분명하게 명령하셨고, 동시에 그에 따른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들을 인용하시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바리새인의 외식을 크게 꾸짖으셨습니다(마 15:4~6).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오늘 말씀으로 다시 한번 부모를 공경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입니다.

이 명령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알려면 반대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저주하고 조롱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출애굽기 21장 17절 말씀입니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7)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16)

하나 더 살펴볼까요?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 30:17)

아주 무서운 심판이고, 끔찍한 저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이처럼 진중하고 엄위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 계명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말합니다(롬 7:12).

제가 자녀로 40년을 살아봐서 아는데, 부모를 공경하기는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모든 일에 완벽한 사람처럼 보여서 혹은 나보다 힘이 세고 무서워서 공경하고 받들기 쉽지만, 점점 머리가 커져 내 생각이 분명해지고 부모의 불완전한 모습을 하나둘 발견하고 부모님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 데 반해 나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질 때, 부모를 공경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론 자녀의 판단이 옳을 때가 있습니다. 자녀의 생각이 더 지혜로울 때가 있습니다. 부모가 치명적인 약점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인격적인 결함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나를 낳고 기르신 분이니까…라고 이해하려고 해도 공경하기까지는 참 힘든 순간순간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럴 때라도 자녀의 마음속에 강력하게 솟아난 그 불같은 반항심을 잠재우고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이유가 있으니,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그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핑계 댈 수 없습니다. 거역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에게 외적 순종과 더불어 내적인 공경을 당신의 육신의 부모에게 보이라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자녀”이신 분들은 잘 들어 보십시오.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본체 예수님이 보기에 육신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고 불완전했겠습니까? 예수님의 실제 아버지는 성전에 임재하시는 하늘 아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면서 성전을 가리켜 “내 아버지 집”이라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가 거기서 그들에게 “순종하여 받드셨다”고 기록합니다(눅 2:51).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진흙과 먼지 같은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부모에게 순종해야겠습니까? 순종하십시오.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을 품고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자녀와 부모의 관계 속에 그것 하나를 명령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부모”이신 분들도 할 일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공경 받을 만한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자녀들은 부모의 완벽함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완벽하십니다.

자녀는 부모의 성장을 기대합니다. 멈추지 않고 뒤쳐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부모의 영적 경주를 보며 존경합니다. 바울이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편지를 마지막으로 바울은 순교당했습니다. 그 전에 감옥에 갇혔을 때 바울이 빌립보에 쓴 편지는 사뭇 다릅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영적 성장을 자녀에게 보여주십시오. ‘이런 성질 타고난 걸 어떻게 해, 이 나이에 뭘 더 바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고 또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부모만큼 가까이서 본받을 수 있는 믿음의 본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자녀도 부모의 완벽함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자녀는 부모의 완주를 기대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삶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자녀에게 말해주고, 죄를 범하면 자녀에게 사과하며 하나님 앞에서 서로 화평을 이루는 본을 보여주고, 그 나라에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의 형상을 점점 더 닮아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녀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3.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2절b~3절)

자녀들은 왜 부모를 공경하는가? 왜 공경해야 하는가? 그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이유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 마지막 이유는 3절에 나와 있습니다.

3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3절의 내용은 2절에서 말한 “약속”에 해당합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줄 때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율법의 이 조약은 단순히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만 하면 오래 살고 복을 누릴 것이란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했고(신 6), 자녀는 그 부모의 교훈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는데(출 20:12), 그럴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정을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제시된 십계명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는 마땅히 부모가 전달해주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천 대에 이르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절대적인 법칙은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을 봐도 악한 왕이 죽고 그 아들이 선한 왕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선한 왕이 죽고 그 아들이 아주 악한 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일반적으로 악한 부모는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지도록 자녀를 인도하고, 자녀는 그 막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반대로 선한 부모는 하나님의 길로 자녀를 인도하고, 자녀는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고, 바울을 통해 신약의 교회에게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가운데 “자녀”분들은 부모님께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놀랍고 은혜로운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이 2). 우리가 참 좋아하는 말씀이지요. 

여기엔 조건이 있습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영혼이 잘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  대까지 미치는 하나님이 은혜가 그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부모”이신 분들은 다시 한번 자녀를 주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하는 게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은 이런저런 미신으로 부모를 유혹하기도 하고 많이 속기도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가 복을 누릴 수 있는 참 길을 제시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바울이 4절에 바로 이어서 말씀하는 것처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순종하도록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녀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은혜가 임합니다.

어려서부터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교훈으로 가르칠 기회로 삼으십시오.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적어도 이 정도 유산은 물려줘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믿음의 유산, 신앙의 유산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부모는 자녀를 떠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만 마련해주지 마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 수 있도록 신앙의 기반을 부지런히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와 그 시대 사람들이 떠나고 이스라엘이 급격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던 것처럼, 자녀들이 그런 영적 비극을 맛보지 않도록 부지런히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기 때문이고, 둘째, 하나님의 명령이며, 셋째,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이 이유로 마땅히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이렇게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에게 미칠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는 자녀가 진정으로 잘되는 일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탕자같이 주님을 멀리 떠난 다 큰 자녀를 두신 부모님께 한 마디 위로와 소망이 되는 말을 남기기 원합니다. 여러분의 역할이 다 끝난 게 아닙니다.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탕자는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나서 악독한 주인의 착취를 당하면서 아버지의 인자하심을 기억합니다. 자기 종들에게 풍족하게 나눠주는 아버지의 성품과 삶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다시 발걸음을 집으로 돌립니다.

자녀가 돌아오도록 끝까지 탕부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오래 참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기도하십시오. 언젠가 자녀가 하나님을 닮은 부모의 그 인자한 성품을 기억하고 돌아오도록 말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유평교회의 모든 부모와 자녀가 그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