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인생에서 해결책을 찾다

본문: 사사기 21장 1절~25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고 또 우리가 만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겁니다. 어떨 때는 해결책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해결책이 적절하지 못해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를 풀려고 하다가 상황이 더 나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못된 해결책을 찾았을 때 그렇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합니까? 해결책은 밥을 먹는 겁니다.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합니까? 해결책은 약을 먹는 겁니다. 그런데 배가 고플 때 약을 먹고 배가 아플 때 밥을 먹으면 어떨까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맞지 않을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합당한 해결책을 찾으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올바른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적절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인생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내가 만나는 문제들도 다양하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문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도 큰 문제를 앞에 두고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었는데 문제를 해결하다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 벌어진 끔찍한 일을 바로 잡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래서 큰 희생을 치르면서 베냐민과 싸웠고 결국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아예 사라질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제야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고 이스라엘이 직면한 현실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기 시작합니다.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2)

전에 이스라엘은 베냐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승리한 후에도 울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승리는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가 곧 이스라엘의 위기가 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3)

이스라엘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누가 베냐민 지파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인가요?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를 원망하고 있습니까? 잘못은 자기들이 해놓고 하나님을 탓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허락하셨고 베냐민을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승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베냐민에 속한 성읍을 불태우며 성읍의 사람들을 학살합니다. 베냐민에 속한 성읍들을 진멸합니다. 그래서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습니다(16). 이스라엘은 전쟁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 여자와 가축까지 모두 죽입니다. 그 결과 베냐민에 남은 사람은 전쟁에서 도망쳤던 남자 600명이 전부였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누가 만든 겁니까? 이스라엘이 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도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죄악 된 본성을 따라 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거나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베냐민과 싸우기 전에는 그래도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문제 해결이 시작됩니다.

두 가지 잘못, ‘하나님에 대한 원망’, ‘하나님께 묻지 않음’, 이 두 가지로부터 문제 해결이 출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통해 이스라엘이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모르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탓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묻지 않음’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의 생각대로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 방법이 아니라 자기 눈에 좋은 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두 가지 잘못으로 시작한 이스라엘의 문제 해결은 두 가지 맹세와 두 가지 대책으로 전개됩니다. 이스라엘이 직면한 문제는 베냐민 지파가 남자만 600명이 남았기 때문에 이대로 두면 베냐민 지파가 정말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지파의 딸들과 결혼해야지만 그 기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했었던 맹세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앞두고 미스바에 모였을 때 맹세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1)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7)

이스라엘이 베냐민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를 했기 때문에 베냐민의 남은 자들은 아내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급한 맹세를 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의 문제는 더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했던 맹세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5)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 모든 백성이 이 일에 동참하며 강한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두 가지 맹세를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베냐민에게 딸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일에 동참하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앞뒤 가리지 않고 죄악을 바로잡으려는 생각으로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성급한 이 맹세는 부메랑이 되어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옵니다. 지킬 수 없는 이 맹세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은 두 가지 맹세를 지킬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맹세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두 가지 대책입니다.

먼저 첫 번째 대책입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 그곳에 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입니다. 야베스 길르앗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첫 번째 맹세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맹세할 때 그 자리에 없었으니 야베스 길르앗의 딸들은 베냐민에게 주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둘째 맹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미스바에 오지 않았기에 이들을 심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사로잡아서 베냐민에게 주기로 합니다. 그들이 생각한 대책입니다.

이스라엘은 큰 용사 1만2천 명을 야베스 길르앗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주민들을 모두 진멸하고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들만 사로 잡아옵니다. 이스라엘은 또 다시 백성들을 죽이며 동족의 피를 흘립니다.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맹세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맹세입니까? 이렇게 하면 그들이 한 맹세를 지키는 것이 될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래! 내 앞에서 맹세한 것을 성실하게 잘 지켰구나!’ 이렇게 칭찬하실까요? 정말 그들이 맹세를 온전히 지키려고 했다면, 왜 처녀들은 살려둔 겁니까? 결국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맹세를 이용하고 명분만 남은 맹세를 지키기 위해 어리석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정말 바보 같이 앞뒤가 안 맞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급한 맹세와 그로 인한 비극은 입다의 이야기에서도 강조되었습니다. 지금 이들이 하는 일은 입다가 자신의 딸을 바쳤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된 맹세를 철회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엎드리기 보다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또 망령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사기 저자의 평가가 나옵니다.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12)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했지만 여전히 그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살고 있지만 여전히 그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가나안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만든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우리가 속해 있는 곳도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이 집은 세상과 다르지 않더라’, ‘이 교회는 세상에 속해있더라’, ‘이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더라’ 정말 무서운 평가가 아닐까요? 지금 이스라엘에 대한 평가가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일이 가나안과 같습니다. 왕이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얻은 처녀의 수가 400명입니다. 하지만 아직 200명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대책이 나옵니다. 두 번째 대책도 정말 가관입니다. 200명을 더 얻기 위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생각한 대책입니다. 에브라임의 성읍인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 쉽게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축제가 있었는데 이 축제를 이용하자는 겁니다. 축제 일이 되면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는데 그 때 베냐민 사람들이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실로의 여자를 납치해서 자기의 아내로 삼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 실로의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어떻게 말할지도 이야기합니다.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22)

지금 이 말을 전문 용어로 하면 알리바이입니다. 범죄가 일어났을 때 자신은 그 범죄와 관련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결백을 주장하는 건데 이것은 신앙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만일 실로 사람들이 와서 이 일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면 신앙의 알리바이를 가르쳐 주어서 그들의 결백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베냐민 사람이 한 일이기 때문에 맹세를 어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누구를 속이려고 하는 걸까요? 하나님이 이들의 의도를 모르실까요? 정말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절을 범죄에 이용할 뿐만 아니라 정말 망령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6)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 금하신 일을 거리낌 없이 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한 마음으로 이악한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의 남은 자들은 실로의 딸들을 납치해서 자기 땅으로 돌아갔고 성읍을 건축하며 그곳에 거주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24)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두 가지 대책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자기 가족이 있는 곳으로, 자기 집으로,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갑니다. 다들 제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실로의 딸들, 그리고 야베스 길르앗의 처녀들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돌아갈 집은 없습니다. 여인들은 납치되었고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한 시대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여자들입니다. 레위 사람의 첩이 그러했었고 오늘 본문은 수많은 여인들이 그러합니다. 힘없고 이름 없는 여인들이 그 시대의 악함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무엇을 위해 모였습니까? 능욕을 당한 한 여인을 보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없애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죄악을 바로 잡았습니까? 오히려 더 많은 여인들에게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잡으려고 했던 일을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스라엘을 쳐서 성읍들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무자비한 살육을 저질렀습니다. 여자들을 얻기 위해 납치했고 능욕합니다. 결국 모양은 다르지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했던 일을 이스라엘이 다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의 한 지파를 살리기 위해서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울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을 정당한 일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핑계 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안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탓할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일이, 사사시대에 벌어지는 일들이 그러합니다.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해결책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그 문제는 더 커지고 더 심각해지고 더 악해지고 더 잔인해지고 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더 암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입니다. 사사기의 결론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결론에서 미가의 가정에서 시작된 우상 숭배는 단 지파의 우상숭배로 커지고,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두 번째 결론에서 레위 사람이 첩을 두어서 벌어진 가정의 작은 문제는 이스라엘 전체의 전쟁으로 커지게 되었고, 한 지파가 멸절되다시피 합니다.

사사기는 그 시대에 벌어진 이 심각한 문제들을 보여주며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5)

사사기는 문제의 책입니다. 문제투성이인 사람들의 모습,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혼란에 빠진 인생, 그리고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사사시대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왕이 없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왕이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왕이 없는 것이고,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은 왕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왕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내가 왕이 되어서 내 눈에 좋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오셔서 나를 다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해결책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들을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왕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해결책이 되십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어려움들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말 막막해 보이고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들, 괴로움에 마음이 무너지고 힘들어 지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감히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싶은 그런 어려운 문제도 만납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해결책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해결책을 줄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해결책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유일한 해결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해결책이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유일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께 여러분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그분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평안과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분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저는 여러분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 그분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말씀으로 힘을 얻으시고 말씀으로 세상과 담대히 싸우시고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있는 문제들을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우리의 왕이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다른 것을 바라보고 다른 것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 자리에 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계속해서 주님을 마음에 두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