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 마음을 비추는 빛, 말씀

본문 : 고린도후서 4장 6절

설교자 : 조정의

미국 개혁 교단(장로교) 개척매뉴얼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정하신 방편을 통해 자신의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이다.”(88페이지)

여기서 교회는 특정 장소, 예를 들어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수세로90번길 9번지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장소”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교회 곧 그리스도의 백성이 이 땅에 있는 동안 한곳에 모이도록 명하셨기 때문입니다(히 10:25).

우리가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는 자신이 정하신 방편을 통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말은 시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런 기분, 유사한 느낌을 받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이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만나는 것처럼, 인격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몸 된 교회 안에서 그분이 정하신 방편을 통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떤 방편을 통해 우리를 만나주시는지, 어떤 방편을 정하시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시는지 그것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반드시 은혜의 방편을 잘 알아야 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그 방편에 참여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는 말씀과 성례(만찬과 침례)를 은혜의 방편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기도, 찬양, 교제, 봉사 이렇게 네 가지를 더 추가하여 총 일곱 가지 은혜의 방편을 2월 말까지 매주 하나씩 살펴보려 합니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은혜의 방편들은 우리가 이미 매주 행하고 있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일들일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듣고, 찬양을 부르고, 교제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봉사하고, 특별히 매주 만찬에 참여하는 일은 누군가가 물어보면 정말로 중요하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설명하겠지만, 매주 반복적으로 행하면서 정작 그 가치와 의미를 점점 잊어버리기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현재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 특별히 정하신 은혜의 방편에 지루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이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에게 나타내주시려고 정하신 은혜의 수단, 방편에 정작 큰 감흥 없이 형식적으로 참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번 은혜의 방편 시리즈 말씀을 통해 여러분과 저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 정하신 은혜의 방편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방편들을 통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은혜의 방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원합니다.

오늘 제가 맡은 부분은 은혜의 방편 중 첫 번째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백성을 만나십니다. 이 시간 제가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제가 말씀을 풀어 그 의미를 여러분에게 설명할 때는 그 설명에 하나님이 원래 뜻하신 의미와 다른 것이 있지 않은 이상,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말씀을 대신 전달할 사자(일꾼)를 통해 여러분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이라는 방편을 통해 여러분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만나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실 굉장히 신비로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제가 복음반에서 아직 하나님을 믿지 못한 사람과 이야기할 때 그들이 종종 묻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이 정말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그냥 이제부터 믿어야지 하면 믿는 것이냐?”

그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되는 질문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성경이라는 한 권의 책이 말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그 책의 사람들’이라고도 부릅니다(코란). 그런데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모두 걸 만한 믿음이 어떻게 생기냐는 것이죠.

초등학교 6학년 때 저는 매일 일기를 써서 선생님께 제출했는데, 제가 상상한 나라인 칸자니아에 사는 친구에게 늘 편지하는 형식으로 제 일과를 얘기해주며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일기를 썼습니다. 그 일기를 읽는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참 귀여웠고 특별하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올해 마흔하나가 되었는데, 지금도 칸자니아라는 나라가 있다고 믿고 그 친구에게 실제로 늘 편지를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망상에 빠져 있는 불쌍한 사람, 현실 감각을 잃은 사람 취급을 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인이 마치 그와 같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천지를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을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오래된 책이 말하는 것에 온전히 자기 인생을 걸 수 있는가?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해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것을 믿게 되셨습니까? 어떻게 여러분의 인생을 이 책에 걸고 있습니까? 이 대답이 곧 내가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주 확실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고린도후서 4장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떳떳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에게 나타냈기 때문입니다(2절). 바울은 확신합니다. 만일 자신이 전파한 복음이 누군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면(‘가리었으면’), 그것은 자신이 잘못된 복음을 전해서가 아니라 듣는 이가 ‘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3절).

이 세상의 신 곧 사탄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4절). 이것이 지금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같은 일꾼을 통해 지금도 진리의 복음을 나타내십니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말씀을 통해 비추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것을 가리는 것입니다.

참고로 ‘혼미하게 하다’는 말은 ‘눈을 멀게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분들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탄이 여러분의 눈을 멀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믿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 이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까? 6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의 주어는 분명히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셨습니다’.

이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가져와 설명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듯 창세기 1장 1절을 보시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행하기 전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창 1:1-2). 그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하셨고 그 결과 어두움 가운데 처음으로 빛이 비추었습니다.

공허하고 혼돈하고 어두운 땅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이 비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창조의 능력이 복음을 듣는 이의 마음속에 동일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공허하고 혼돈하며 어두운 영혼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복음반에서 ‘어떻게 이 말씀을 그대로 믿을 수 있냐?’고 물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제 영혼에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구원받으신 분들은 모두 공감하실 것입니다. 매번 듣던 말씀, 매우 익숙했던 성경의 가르침이 어느 날 분명하고 또렷이 들렸던 순간이 있습니다. 정확한 시점을 모르더라도, 이제는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을 수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과연 내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어떻게 바꿔놓으신 것일까요? 바울은 본문 말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신 빛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은 이 표현을 적을 때, 자신이 거듭난 경험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광의 빛으로 자신을 찾아왔을 때, 바울의 육체의 눈은 잠시 멀었으나, 그의 영혼의 눈은 밝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를 대적하는 배교자 예수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수께서 사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비추심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영생은 성경을 하도 많이 읽거나 들어서 세뇌된 사람들이 얻는 환각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믿겠다는 사람의 강력한 의지로만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생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더 정확히 말하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요 1:18).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이 성경이 증언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될 때 그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우리에게 비춰집니다. 요한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고백했습니다(요 1:14).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일어나는 초자연적 역사,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을 전파할 때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무지로 가득한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진실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이것이 우리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영혼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말씀의 빛으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십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비춰주심으로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영적 전쟁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단에서 수없이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기의 영광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비추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신이 여러분 마음의 눈을 멀게 하려고 발악하기 때문에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을 갈수록 견고하고 딱딱하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그와 같았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지금도 마찬가집입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나타내십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우리 영혼에게 비추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무지하거나 그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일은 보통 큰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이 세상의 신을 물리쳐 달라고 구하십시오.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말씀의 빛으로 당신의 영광을 비춰주십시오”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습니다(롬 10:17). 계속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춰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자, 이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 히브리서 6장 4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믿는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고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보고 현재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한번 빛을 비추고 마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번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치시고 마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 자신의 일꾼을 세우시고 그를 통해 교회에게 지금도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일 오후 늦게까지 일정이 있더라도 집에 가면 제가 꼭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주일에 제가 한 설교를 다시 한번 들어보는 것입니다.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즐겁지만은 않은 그 일을 매번 하는 이유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여러분의 양심에 떳떳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 설교를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실수나 잘못된 표현 등을 발견합니다(‘거짓 예수 이단을 언급하면서 그중 진짜 예수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함). 아, 이렇게 말하지 말걸, 저렇게 표현할 걸, 여기서 왜 웃었지? 이런 농담은 하지 말걸. 여기서 힘을 더 주어 크게 강조하면 좋았겠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여러분에게 나타내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로서 더 쓰임받게 좋고 유용한 도구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 반성과 비판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가끔 제가 설교를 듣는 자리에서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지? 왜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을까? 나 같으면 여기서 이런 것을 강조했을 텐데…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를 만나주신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설교를 전달하는 사람의 능력이나 기술만 보고 있으면 계속해서 그런 비평이나 생각이 흘러나옵니다. 때로는 ‘아 지루하다’, ‘오늘 애찬 뭐지?’, ‘오늘 저녁에 한국 축구한다고 했지’이런 잡생각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어제 청년들과 시편 119편을 나누면서 176절이나 되는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을 오직 말씀을 노래하기 위해 기록하면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처럼 사모했다는 것을 청년들과 함께 확인했습니다.

그중 제가 가장 마음에 와닿은 말씀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비춰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18절,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130절,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씀 앞에 이런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떡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시편 기자처럼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 이런 태도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저를 깨닫게 합니다.’ ‘주님, 말씀을 통해 내 눈을 열어 주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하여 주세요’

말씀을 통해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춰주십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둔한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말씀으로 깨우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비춰주십니다.

전하는 사람의 은사의 크기가 다르고 전파하는 기술이나 스타일이 다르지만 만일 그가 성경의 의미를 혼잡하지 않게, 잘못된 가르침과 섞지 않고 오로지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면, 그래서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전파하고 있다면, 여러분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 여러분을 만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여러분을 만나고 계신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우리를 만나기 위해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정하셨다면, 여러분은 말씀을 진정으로 사모하며 적극적으로 들을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며, 규율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몇 번 들으면 충분할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보는 것이 적당할까요? 나는 주일 설교 한 번이면 충분해서 수요일이든 주일오후성경공부든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원하십니까?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나타나 나를 만나주기를 바라십니까?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그분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더 많이 듣고, 더 귀 기울여 듣고, 더 자주 듣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들은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