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본문: 마태복음 1장 18절~25절

설교자: 이병권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셨는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라는 날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갈수록 크리스마스 의미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날로, 혹은 불우이웃을 도우며 좋은 일을 하는 날로 생각합니다. 다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크고 놀라운 선물을 놓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크리스마스의 진짜 의미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지, 왜 크리스마스가 필요한지, 크리스마스가 온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연인들이 데이트 하는 날, 파티를 하며 즐기는 연말 축제일뿐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산타와 루돌프가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여러 가지로 바빠집니다. 정말 뻣뻣한 몸으로 원하지 않는 율동을 하게 될 수도 있고 그것도 무대 중앙에서 하라는 압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악기를 연주하거나 외워지지 않는 대사를 읽어가며 연기를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느라 목소리를 높여야 할 수도 있고 서로 의견이 잘 안 맞아서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시간에 쫓기다보면 정작 우리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에게는 크리스마스가 특별할 것 없는 날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올해는 좀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우리 각자가 더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금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는 12월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이 시간에는 최초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의 이야기는 너무도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우리에게는 충격이나 놀라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 일을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 일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심각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일은 한 개인의 삶을 바꾸는 일이었고 더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마태는 요셉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당시의 약혼은 오늘날의 약혼과는 다릅니다. 약혼을 한 두 사람은 부부로 인정되었고 법적인 구속력을 가졌습니다. 그 기간은 보통 1년 정도 되었는데 서로의 순결함을 증명하며 따로 떨어져 지내야만 했습니다. 약혼한 사람은 결혼한 상태로 여겨졌기 때문에 만약 이 상태에서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과부가 되었고 이 기간 중에 간음을 행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와 같은 약혼을 한 상태였고 동거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큰 일이 발생합니다. 요셉은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정혼한 여인인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알고 있지만, 요셉은 모릅니다.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정혼한 상태에 있는 여자가 임신을 한다면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정혼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거나 아니면 정혼한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 두 가지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 임신했다면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임신한 마리아를 봤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요? 정혼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아니라면 정혼한 남자에게 버림을 당하든지 죽임을 당하든지 그에 따른 벌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러면 요셉은 임신한 마리아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요셉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분명히 요셉과의 약속을 깨는 일을 한 것입니다. 요셉을 두고 다른 남자와 함께 함으로 요셉을 배신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런 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요셉은 두 가지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임신한 마리아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셉을 두고 수군거릴 것이고 이 일은 그의 인생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마리아와 이혼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합당한 이혼사유가 되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 일을 공개적으로 처리하든 조용히 처리하든 요셉의 생각에 따라 결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요셉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리아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마리아가 저지른 죄를 드러내고 행한 일을 갚아주고 싶지 않을까요? 요셉은 상황을 모르니까,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요셉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사람은 어디까지나 부정을 저지른 마리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떤 결정을 합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 요셉은 정말 신사적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요셉도 참 멋진데 신약에 나오는 요셉도 정말 멋집니다. 요셉은 이 일을 드러내지 않고 마리아를 생각해서 가만히 끊고자 합니다. 문제를 크게 만들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려고 합니다.

요셉은 율법에 따라 하나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죽어야 한다는 율법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신 22:20-24). 요셉은 공개적으로 돌로 치는 벌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의로운 요셉은 누명을 벗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으려면 일을 공개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더 좋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 선택이 더 나은 것이지만, 하지만 요셉은 마리아를 배려합니다.

가만히 끊으면 요셉은 새 삶을 살고 마리아는 가족 곁에 남으면 됩니다. 그러면 그녀의 가족이 마리아와 아이를 돌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요셉에게 초자연적인 만남이 찾아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

요셉이 이 일을 생각할 때였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잠깐 잠이 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이 일을 생각할 때에” 다음에 “보라”라는 말이 있어, 천사가 나타난 것을 주목하게 합니다.

이렇게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는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꿈에서 듣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라. 마리아가 가진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천사가 한 말을 들은 요셉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성령으로 잉태가 되었다니 요셉은 지금 도대체 상상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없이 태어나다니요! 앞으로도 이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놀라운 일들이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어떻게 아버지 없는 아이가 있을 수 있냐고, 그것을 사실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예수라는 인물을 보통사람과 다른 비범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떨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능력에 벗어나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 처녀의 몸에 태어나는 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이것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성의 문제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면,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보다 이것이 필요한 일인가? 하는 질문이 더 합당한 질문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이 왜 이 일을 하시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을 하셨습니다. 요셉은 천사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요셉에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1)

천사는 아들을 낳을 것을 그리고 그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예수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옛적부터 약속하신 구원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인 마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서 설명합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2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선지자로 하신 말씀의 성취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사야에 있는 말씀을 인용합니다(사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

마태는 이 아기의 이름을 하나 더 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백성들이 이사야가 전한 말씀을 듣고 ‘임마누엘’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곳에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하게 임재 하셨고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영으로 임하셔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특별히 택하신 지도자를 통해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 그 아들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을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된 아기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성경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고의 기적, 최고의 신비, 가장 기이한 일이 무엇일까요? 천지창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아니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일까요? 어느 성경교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성육신이 가장 놀라운 신비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연약하고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기저귀를 해야 하고 젖을 먹어야 하고 말을 배우고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성장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가지는 한계와 부족함, 연약함과 피곤함, 아픔과 슬픔, 그 모든 것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왜 사람으로 오셨습니까? 왜 성육신 하셨습니다. 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까? 그분의 이름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든 함께 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없다면 함께 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크고 작든 간에 희생이 있어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어린 아이와 함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수준을 낮춰야 하고 그만큼 나를 희생해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더 큰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어떨까요? 하나님과 우리는 수준 차이가 얼마나 날까요?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함께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대신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그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고,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기록했고 복음서를 마치면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강조합니다. 마태가 그의 글을 마치면서 마지막에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록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임마누엘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 땅을 떠나실 때에도 임마누엘을 말씀하십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혼자라고 느껴질 때도 있고 외롭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고 누구도 위로가 되어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늘을 뚫고 이 땅에 내려오셨고, 죄를 빠져 있는 우리를 건져내시고, 하늘 높이 올리셨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현실과 여러분이 처해있는 상황과 여러분 앞에 놓인 문제들, 여러분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을 기억하시고 그분의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태가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아기로 오셨습니다.

임마누엘 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임마누엘 찬양대의 특송을 들을 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 때마다, 크리스마스 찬송을 들을 때마다, 크리스마스 연습을 할 때마다 그 이름을 생각하십시오. 임마누엘을 기억하시고, 그 이름의 뜻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어려울 때에도 힘들 때에도, 마음이 좋을 때에도 나쁠 때에도 괴로울 때에도 속상할 때에도 억울할 때에도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늘 기억하시고 계속 기억하시고 항상 기억하시고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