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예배에 대한 이해
본문: 요한복음 4장 23절-24절
설교: 조 성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라는 것은 ‘엎드려 절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크신 사랑 때문에 마음속에서부터 넘쳐나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쥐어짜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예배할 거리를 찾는 것 역시 아닙니다. 예배는 생수가 넘치는 것처럼 내 안에서 흘러넘치는 감사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고 이것을 위해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예배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절). 하나님은 그와 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전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예배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예배의 핵심은 ‘진정성’입니다.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 흘러넘치는 것, 마음의 속사람이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진정으로 드리고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마음 속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예배에는 ‘입술로 고백하는 예배’와 ‘물질을 드리는 예배’,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이것은 교회에 나와서 찬양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늘 흘러넘치는 찬양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생각하면 입술에서 찬송이 저절로 나옵니까? 마음속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일어나 입술을 통해서 찬송하십니까? ‘주님을 믿은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 어떻게 한결 같이 그런 찬송이 나올 수 있느냐’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론,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가 몇 십 년이 지나면 마르고 없어지는 것일까요? 주님은 여러분과 저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실 때 얼마 동안이나 찬송받으시려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까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생수를 주신다고 하시면서 그것은 너희 속에 흘러넘치는 샘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은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부족하고 찬송이 부족한 이유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 붙잡혀 있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던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치심과 행하시는 이적들에 날마다 놀랐습니다.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메말라 가는 것은 우리가 그와 같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내 마음이 가득차지 않고 그분의 은혜가 내 마음에 머물지 않을 때, 예배는 기쁨이 아니라 의무가 됩니다. 현재 우리는 말라기 시대 때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과거에 감사가 넘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는 귀찮은 것, 힘든 것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물질을 통한 예배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기억하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땅을 팔아 일부를 감추고 일부를 사도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소유를 가지고 있거나 그것을 팔거나 우리는 소유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나”(행 5:4). 베드로가 “땅을 판 것이 이것 뿐이냐”고 물었을 때 “아닙니다. 내가 필요해서 일부를 떼어놓았습니다.”라고 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체면 때문에 성령을 속이고 말았습니다.

물질을 드리는 것도 예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에 대해서 절대 억지로 하지 말고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가 얼마를 헌금하는지 공개된다면 우리는 아마 그 액수를 정하기가 참 힘들 것입니다. 모든 예배가 하나님께 자원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물질이 많이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서별로 회비를 걷는 것에 대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물질을 아껴서 교회의 살림살이를 구입하고 도움을 주는 것은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일에 사용되더라도 그것이 자원하는 마음이 없이 이뤄지면 문제가 큽니다.

우리의 마음 자세가 중요합니다. 어떤 부서의 회비를 올리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것에 대한 우리의 마음 자세, 그것이 때로는 가슴 아프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입고 신고 다니는 것을 보면 참 고가의 상품들입니다. 백 만 원 어치 이상을 몸에 걸치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에는 참 인색합니다. 교회에서 고물들을 팔아 비용을 마련한다는 생각은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참 지혜로운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저의 자녀들이 저의 칠순 잔치를 위해 자금을 마련하자고 하면서 그 금액을 가지고 너무 많다느니 적다느니 싸운다면 그 모습을 보는 저의 마음이 어떨까요? 조금 뒤에 합의가 되었다면서 그 해결책으로 각자 자기 집에서 나온 고물을 모아 팔기로 했다고 말한다면 그 때 또한 저의 마음이 어떨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직장에 다니면서 많은 돈을 벌면서 그것을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쓰는데는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데 참 인색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것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그 예배에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섬기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주님을 섬기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나의 자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건축할 때 너무 많은 물질을 가져와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이제 그만 가져와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식어졌을 때 그들이 가져온 것은 병들고 저는 것, 못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 자체를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흠없는 첫 새끼를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아까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직장이 없어 돈이 없다고 헌금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싼 레스토랑과 커피숍, 영화관을 잘 다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떤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나는 나의 물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쉽게 외식하고 메이커 옷을 입으면서 하나님을 위한 일에는 적은 돈에도 인색해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헌금통에 적은 돈을, 그러나 생활비 전부를 넣은 한 과부를 보시며 그녀가 제일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성, 자원하는 심령을 원하십니다. 얼마를 드리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아내에게 처음으로 나와 살고 있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느냐”, “필요해서 사느냐”, “나를 사랑해서 사느냐”. 제 아내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대답이 괜찮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들, 물질들, 삶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물질의 양도 얼마나 오래 교회에 참석하느냐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과 물질, 예배에서 진정성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에 진정성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입니다. 일주일 동안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 성경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로, 주님을 잊어버리고 살면서 주일에 교회에 와서 성경을 펴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기만인 것입니다.

왜 우리는 삶에서 감사를 쥐어 짜내야 하는 것일까요? 삶에서 솟아나오는 감사를 왜 드리지 못할까요? 내 자녀들과 자기 자신에게는 인색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일에는 왜 이렇게 인색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손에서 성경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우리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있습니다.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사람들은 성경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봅니다. 성경이 점점 우리의 손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연속극에는 열광하지만 성경책은 들기만 하면 졸음이 쏟아집니다. 영혼이 병들어서 예배가 메말라가고 하나님께 드리는 돈과 시간에 인색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평가할 수 없지만 주님은 다 아십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깝습니다. 우리는 다시 예배의 진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입술의 고백과 물질을 사용함에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 안에 풍성히 거하여 주님으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내 속에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내 예배의 진정성은 어디 있는가 생각해보십시오. 입술을 통한, 물질을 통한, 삶을 통한 진정성이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대하는 자세가 올바르지 않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예배를 다시 회복시켜야 할 것입니다.